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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 대선에 묻힌 '3000억' 투자 경주 APEC스크랩된 좋은글들 2025. 5. 13. 07:05
조기 대선에 묻혀 주목받지 못하는 국가적 행사가 있다. 올해 10월 말 경주에서 열리는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로,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태평양 연안 20국 정상이 부산 APEC 이후 20년 만에 인구 24만명의 천년고도(千年古都) 경주로 모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전쟁 와중에 열리는 이번 행사는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지형과 세계 경제 질서의 향방을 가름할 장(場)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역사·문화의 도시 경주는 컨벤션 도시로 성공할 가능성을 시험하는 기회이며, 한국이 새로운 국제 협력 체제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도 초미(焦眉)의 관심사다.
경주 APEC 행사는 참가 정상(頂上)의 면면에서 최근 5~6년 새 전 세계에서 열린 국제 행사 중 최고 이벤트다. 우선 중국 시진핑 주석의 참석이 확실시된다. 시진핑의 방한은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4년 이후 11년 만에 성사되는 것으로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배치 이후 경색된 한중 관계를 복원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도 참석할 가능성이 높다. 시진핑이 트럼프의 조롱과 일방적 관세 정책에 분노한 캐나다·대만·베트남·호주 등 회원국을 규합해 반미(反美) 협력 체제를 구축하려는 것을 트럼프가 눈 뜨고 그냥 둘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은 희망 사항이지만 푸틴 러시아 대통령까지 참석한다면 경주 APEC은 2019년 일본 오사카 G20 정상회의 이후 6년 만에 미·중·러 정상이 한자리에 모이는 빅 이벤트를 연출할 수 있다.
APEC 준비위원회에서는 미·중 정상이 모두 참석할 경우 세계 각국에서 최고위급 정부 인사와 기업인, 취재진 등 최소 2만5000명이 몰려올 것으로 예상한다. 예컨대 트럼프 대통령이 방한하면 수행 인원이 1500명에 이르고, 미국과 기(氣)싸움을 벌이는 중국 사절단은 이보다 많을 것으로 본다. 일론 머스크 같은 세계적 기업인도 경호원만 20명이 넘는다고 한다.
하지만 마냥 기대에 부풀어 있기엔 우려스러운 대목이 많다. 우선 경주에는 5성급 호텔이 2곳뿐인 데다 호텔당 객실도 300실 안팎에 불과하다. 또 정상회의 행사장에서 반경 10㎞ 내에 1만3000여 객실이 있다고 하지만 상당수가 낡고 오래돼 세계 정상이나 글로벌 기업인들이 묵기엔 적절치 않다. 조직위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자동차 주행 1시간 넘는 거리인 부산 기장·해운대 호텔과 기업 연수원, 심지어 크루즈선(船)을 빌려 활용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한 관계자는 “경주에는 서양식 메뉴는커녕 식사를 아예 제공하지 않는 콘도 형식 숙소가 많다. 기업인들이 비즈니스 미팅을 할 만한 고급 음식점도 태부족한 형편”이라고 우려했다.
공항 등 교통 상황도 난제(難題) 중 난제다. 경주 인근 포항공항은 국내선 전용이라서 대형 항공기가 내릴 수 없고, 해외 방문객을 위한 입국·통관 시스템도 안 돼 있다. 외국 방문객들은 부산 김해공항을 주로 이용해야 하고 최악으로는 인천공항에 내려서 기차나 자동차로 경주까지 와야 한다. 게다가 김해공항~경주 구간(약 100km), 해운대~경주 구간(100km)은 평소에도 교통량이 많아 상시 체증을 겪는 곳이라서 자칫 해외 귀빈들이 한국에서 최악의 교통 체증만 경험하다가 돌아갈 수도 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6월 조기 대선에 따른 불확실성이다. 당장 APEC 준비위원장을 맡았던 한덕수 전 총리가 정치권으로 뛰어들어, 세 번째 대통령 권한대행인 이주호 교육부 장관이 느닷없이 바통을 이어받은 데다 선거 관리 등 다른 업무에 치여 아직 관련 회의를 개최하지 못했다고 한다. 6월 이후 공직 사회의 대격변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실무 공무원들도 일이 손에 잡힐 리 없다.
경주 APEC에는 혈세 3246억원이 투입된다. 그 돈이면 매년 100만명 이상이 방문하는 잠실이나 부산 사직야구장을 새로 지을 수 있다. 만약 제2의 잼버리 사태를 빚으면 세계를 대표하는 정·재계 인사들 앞에서 국제적 망신은 물론 새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혈세 낭비 논란으로 스텝이 꼬인다. 뒤늦게 네 탓 공방을 벌이지 않기를 바란다.
2025년 5월 13일 조선일보 조형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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