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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職 연연하면 '盧모델' 커녕 '탄핵江'도 못 건넌다

양병택 2025. 5. 1. 06:47
 

 

29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열린 제21대 대통령 후보자 국민의힘 3차 경선 진출자 발표 행사에서 3차 경선에 진출한 김문수(왼쪽) 후보와 한동훈 후보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2002년 11월 24일. 노무현 민주당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 21 후보 간의 단일화가 여론조사로 결판 나는 날이었다. 민주당 출입기자였던 필자는 여론조사 중간 집계를 귀동냥이라도 해볼 요량으로 8층 노무현 후보실 앞에서 하루 종일 서성거렸다. 20년도 지난 일이지만 불안과 초조에 짓눌렸던 그날 당사 분위기를 기억한다. 이따금씩 후보실을 빠져나오는 선대위 간부들의 표정이 너무나 무거워서 말을 붙이기 힘들 정도였다.

 

정 후보는 한일 월드컵 4강 바람을 타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대세론을 위협하는 제3 후보로 급부상했다. 노 후보와 정 후보가 여론조사 단일화에 합의한 11월 11일 시점만 해도 노 후보가 지지율에서 밀리고 있었다. 단일화 후보 선호도는 정 후보가 44.6%, 노 후보가 40.1%였고, 이회창 후보와 가상 대결에서도 정 후보는 1.9%p 앞선 반면, 노 후보는 4.1%p 뒤졌다.

 

단일화를 수용하면서부터 노 후보가 상승세를 탔지만 승패가 결정나는 24일 8개 언론사가 발표한 조사에서 정 후보 우세가 5곳, 노 후보 우세가 3곳이었다. 후보실에 모여 있던 선대위 간부들은 “50년 전통의 진보 정당이 후보 자리를 재벌 2세에게 넘겨주는 것 아니냐” “대선 후보를 못 내고 당이 존립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를 쏟아냈다. 24일 자정을 넘겨 발표된 단일화 여론조사 결과는 노무현 46.8%, 정몽준 42.2%. 그 극적인 반전이 대선 본선에서 이회창 대세론을 무너뜨리는 결정타가 됐다.

 

민주당 이재명 후보에게 크게 밀리고 있는 국민의힘이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 2002년 노무현 모델이다. 당의 대선 후보를 뽑아 놓은 뒤 반명(反明) 빅텐트 단일화로 20여 년 전 역전 드라마의 속편을 써보겠다는 것이다. 원작에서 정몽준 후보가 맡았던 제3 후보 배역에는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캐스팅됐다. 단일화 융합 에너지를 증폭시키기 위해 당에서 몰아냈던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에게도 초대장이 발송됐다.

 

경선 참가 주자들도 단일화에 모두 동의했다. 4강이 추려질 때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그러나 최종 2인이 가려지자 뒷걸음질 치는 분위기다. 김문수 후보 측 핵심 관계자는 “단일화를 압박하는 것은 당원들 의사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불과 며칠 전 김 후보가 “빅텐트 구축을 위해 후보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과 다른 뉘앙스다. 한동훈 후보는 “단일화는 후보 중심으로 논의돼야 한다”고 했다. 당 지도부가 ‘감 놔라 배 놔라’ 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양대 정당의 후보로 선출돼 대선을 치르는 것은 대단한 정치 자산이다. 본선에서 패배해도 그렇다. 1992년 김영삼, 1997년 김대중, 2012년 문재인 등 직전 선거에서 2등 했던 후보가 당선되는 경우가 절반에 가깝다. 경선에서 국민과 당원이 함께 선출한 대선 후보는 당을 지휘할 수 있는 정통성을 갖는다. 100명이 넘는 국회의원의 생살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 국민의 힘 대선 후보 자리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단계에 오니 단일화 도박이 망설여지는 모양이다. 여태까지 벌어 놓은 본전 생각이 나서다.

 

노무현 모델의 폭발력은 ‘희생’과 ‘모험’에서 비롯됐다. 정치인이 기득권을 포기하거나, 자신의 정치 생명을 불확실성에 내맡기는 도전을 할 때 국민들의 마음이 움직인다. 노무현은 16개 시도 순회 경선을 통해 어렵게 따낸 집권 여당 후보 자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보다 지지율이 앞서는 정몽준 후보와 여론조사 단일화라는 위험한 선택을 했다. 그러자 한번 사그라들었던 노풍(盧風)이 다시 휘몰아쳤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민정당 군부정권은 정치적 수명을 다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두환·노태우 콤비는 직선제 수용이라는 불확실한 승부수를 던지면서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망설이는 주자들의 심정은 이해가 간다. 지지율 50%를 넘나드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대세론을 단일화로 흔들 수 있을까 확신도 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수 대 진보 1대 1 구도로 대선을 치르는 것은 승리 가능성을 높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국민의 힘 최종 결선엔 반탄 김문수, 찬탄 한동훈이 1명씩 올랐다. 당 밖에도 친윤(親尹) 한 대행과 반윤(反尹) 이준석이 대기 중이다. 서로 다른 입장에 섰던 네 사람이 한 명의 후보를 추려내는 과정에 동참한다면 계엄과 탄핵의 강(江)을 건너게 된다. 그래야 보수는 새 출발점에 설 수 있을 것이다.   

 

2025년 5월 1일 조선일보 김창균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