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더 극한 임무가 되어가는 '대한민국 보수 유권자'
'3000조원+α' 정치 비즈니스 장악에 똘똘 뭉치고 세 불리는 좌파 진영 그걸 막을 전략도 없으면서 막판까지 헛발질과 내부 분란
보수 유권자에게 무력감 안겨 작은 희망의 씨앗 보여달라
하나의 안건 처리에 불과했지만 문 정부에서 벌어질 온갖 황당한 국정 운영의 예고편이었다. 어렵게 쌓아나가는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원칙을 못난 정치가 한순간에 망가뜨리겠구나 하는 불길한 예감은 머지않아 현실로 입증됐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중요한 허리 역할은 관료제의 공신력, 경찰·검찰의 중립성, 사법부의 탈정치화, 교육의 자율성, 방송을 비롯한 언론의 독립성 등이 담당한다. 1987년 민주화로 선거를 통한 상부의 권력 이양은 자리 잡았지만, 허리 부분은 아직 튼튼하지 못하던 한국 민주주의가 그동안 후진적 정치에 얼마나 오염되고 잠식돼 왔는지는 지난 몇 달간에도 실상이 꽤 드러났다.
윤석열 정부 시절, 국가교육위원회 내 자문 기구인 전문위원회에서 활동했는데 또다시 불편한 기억을 안게 됐다. 교육은 미래 세대를 위해 건설적 논의가 이뤄져야 하는 자리다. 교육계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합리적이고 온건한 전문가들이 전문위원으로 여럿 참여했다. 하지만 교육계의 좌우 갈등은 상상 이상이었다. 한 우파 교육계 인사의 개인적 실수를 꼬투리 잡아 그를 물러나게 만들더니, 외부에 대외비 자료를 유출시킨 자기편 잘못은 덮으려고 좌파 인사들이 일제히 뭉치고 국회로 달려가 여론전을 폈다. 좌파 정부가 집권하면 자기편으로 싹 물갈이하고 우파가 집권하면 어떻게든 조직을 흔들려는 걸 보면서 좌파와 붙어 우파는 백전백패요, 공생의 민주주의는 요원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애당초 목표가 다른 듯했다.
말로만 민주주의를 외치고 행태는 비민주적인 민주화 세대는 민간 활력을 높여 신산업을 창출하는 대신, 좌파와 포퓰리즘의 결합으로 정치를 수익성 높은 신산업으로 키웠다. 한 해 예산을 600조원 넘게 불려 놓았으니 5년 집권은 ‘3000조원+a’ 규모의 정치 비즈니스로 변질됐다. 나랏빚까지 내 매표성 정책을 펴고 온갖 자리를 나눠 가졌다. 가장 후진적인 정치가 나라 전체를 과잉 정치화시켰다. 그걸 바로잡으라고 뽑은 보수 대통령은 돌이킬 수 없는 오판으로 자멸했고, 전대미문의 사당(私黨)화한 민주당은 이 엄청난 이권 앞에 도덕과 규범, 민주주의적 절제 따위는 내팽개쳤다. 눈앞에 권력 고지가 앞당겨 열리자 삼권 분립도 무력화할 태세로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다.
대한민국 성장과 전진의 역사는 보수의 역할이 컸는데 10년도 안 돼 두 번의 대통령 탄핵으로 보수 정치권은 폐허가 됐다. 이제는 좌우 통합의 문제도 아니다. 시계추처럼 좌우 정권이 왔다 갔다 해도 거짓말하지 않고 법을 준수하며 민주주의 규범에 충실한 정치인이 국정을 운영한다면야 어느 당 누가 집권한들 무슨 걱정이겠는가.
말로는 통합과 중도 실용을 내세우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이 민주주의 체제와 법 질서도 형해화할 더 심각한 위험을 제기하는데 보수 정당은 이걸 막을 능력은커녕 얼마 남지 않은 기간에도 황당한 후보 단일화를 시도하다 분란만 키웠다. 내 손에 단 한 표만 든 채 눈 뜨고 코 베이는 심정으로 나라 꼴을 지켜봐야 하는 보수 유권자들에게 집단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그저 상식적인 사회를 기대하는 것뿐인데 대한민국에서 보수 유권자로 살기가 점점 더 고달파지고 있다. 대선까지 고작 3주 남았지만 무너진 돌 더미에서 건강한 보수 정치가 회생하고 있다는 작은 희망의 싹이라도 보고 싶다.
2025년 5월 14일 조선일보 강경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