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만 감시하는 '파놉티콘 사회'
판사 뒷조사해 해명 강제한 전형적인 독재 권력의 행태 마음에 안 들면 감시·처벌 절대 권력은 범죄에도 안전

지귀연 판사가 엊그제 대법 윤리감사관실에 해명 자료를 냈다. 민주당이 ‘룸살롱 접대 증거’라며 공개한 사진에 대한 소명이라고 한다. 진실이야 감사를 통해 밝히면 될 일이지만, 판결로 말하는 판사를 뒷조사하고 개인 행위를 해명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한 과정은 공포심을 자아낸다. 전형적인 독재 권력의 행태이기 때문이다.
지 판사가 공격받은 이유는 민주당 마음에 들지 않는 판결을 했기 때문이다. 이재명 전 대표 선거법 위반 사건 항소심 무죄 선고처럼 유리한 판결을 한 판사였다면 애초에 공격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뒷조사당하고 의혹 제기받을 일도 없었다. 지 판사가 접대받았는지 사실 여부는 민주당에 중요하지 않다. 누구든 마음에 안 들면 공격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데 이미 성공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최근 조희대 대법원장에 대한 특검법 발의에 이르기까지 공직자 탄핵이란 칼이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학습했다. 이제껏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심기 거스르는 이들 손보는 데 뒷조사·사찰·특검·탄핵을 빈번히 사용할 것이다.
효율적인 감시 체계로 ‘파놉티콘(Panopticon)’이란 근대 감옥 설계가 있다. 반원(半圓) 모양으로 옥사를 짓고 간수는 가운데 공간에서 죄수를 지킨다. 간수는 옥사를 한눈에 볼 수 있지만, 죄수는 간수의 존재 여부를 알기 어렵도록 설계했다. 파놉티콘 감옥을 설계한 제러미 벤담(1748~1832)은 효용을 최고로 여기는 공리주의자답게 최소 인원으로 최대 효과를 내는 방식을 고안했다. 일제(日帝)가 발 빠르게 이를 배웠다. 서울 서대문형무소가 대표적인 파놉티콘 감옥이다. 지난 주말 찾아가 봤다. 부챗살처럼 옥사 세 동이 길게 뻗어 있고 옥사가 모이는 중앙 공간에 한 사람이 앉을 의자와 탁자가 놓여 있다. 간수 한 명이 죄수 수백 명을 감시할 수 있는 구조다. 감방에 갇힌 죄수는 중앙에 있는 간수를 볼 수 없다. 죄수는 늘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절대 권력은 파놉티콘을 감옥만이 아니라 사회로 확장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를 죄인으로 지목하고 털을 불어 흠결을 찾는 ‘취모멱자(吹毛覓疵)’가 일상화된다. 빌미를 주지 않으면 된다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괴로워한 청년 윤동주도 일제 감옥에 갇혀 목숨을 잃었다. 민주당 행태를 일제 통치에 비유하는 건 지나치다고 할지 모르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상대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처벌하며 제 권력을 강화한다. 늘 감시당하고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해 권력에 반대하기 어렵게 한다. 처음엔 공직 사회를 두렵게 하지만 곧 비판적 언론을 공격하고 나중엔 일반 시민까지도 ‘비국민(非國民)’으로 찍어낸다.
파놉티콘 사회에선 권력자만 자유롭다. 상대편은 사소한 잘못도 들춰내 처벌하지만 권력자와 권력 편에 선 이들은 범죄를 저질러도 안전하다. 혹여 이를 수사하려는 검사, 제대로 판결하려는 판사가 있다면 바로 뒷조사해 망신 주고 특검 또는 탄핵으로 무력화시키면 그만이다. 입법 권력과 사법 장악에 이어 정권까지 잡으면 우리 사회는 거대한 파놉티콘으로 가는 것은 아닐까. 설마 그럴까 싶겠지만 이미 열거하기 숨찰 정도로 사례가 넘치는데 지나친 우려라고만 할 수 있을까. 안전을 도모하려면 절대 권력 편에 줄을 서야 할 것이다.
지귀연 판사에게 큰 문제가 있다면 그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를 ‘죄인’으로 지목한 방식이 더 큰 문제라고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내가 공격받은 건 아니니까” 무관심했던 이들에게도 언제 화(禍)가 미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2025년 5월 26일 조선일보 이한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