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등산 장학금: 산에 오르면 100만원
"산 오르면 100만원" 서울대 등산 장학금 만든 81세 사업가
'미산 지덕체 장학금' 5억 기부… 경제학부 졸업생 권준하 대표

서울대 경영학과·경제학부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장학금을 이번 학기 내걸었다. 성적이나 외부 수상 실적, 봉사 시간 등 어떤 것도 묻고 따지지 않는다. 기준은 오직 하나, 등산(登山)이다. 기부자는 익산화물터미널 대표 권준하(81)씨. 경제학부를 졸업한 그는 29일 본지 인터뷰에서 “서울대 후배들은 평생 책에 파묻혀 살았을 것”이라며 “대학에 와서도 도서관에서 밤낮 공부만 하지 말고 건강과 추억도 함께 챙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난 2013년부터 최근까지 96억원을 기부한 권씨는 지난 2022년 서울대 상과대학 향상장학회에 5억원을 기부했다. 그러면서 “성적을 기준으로 주는 장학금은 이미 많다. 공부만큼 중요한 게 건강”이라고 했다. 학생들의 ‘건강 관리’를 기준 삼아 장학금을 주고 싶다며 종목으로 등산을 선택했다. 비싼 장비가 필요 없고, 점수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된다. 권씨는 “축구, 농구를 선택했다가 서울대 학생들의 경쟁 심리를 자극해 오히려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장학금 이름도 아버지 호를 따 ‘미산(彌山) 지덕체 장학금’이라고 지었다.
장학금은 2월부터 7월까지 7번 이상 등산을 하면 100만원을 받을 수 있다. 3번 이상, 7회 미만일 경우 30만원이다. 정상석 앞에서 찍은 사진을 스마트폰 앱에 올리면 ‘등산 인증’이 완료된다. 똑같은 산을 계속 올라선 안 된다. 여러 산을 오르면서 다양한 풍경을 즐기라는 뜻이다. 해발고도 500m 이상 산은 최대 3번까지, 500m 미만은 1번까지만 인정된다.
학생들 반응은 뜨겁다. 당초 30명을 지원할 계획이었지만, 신청자 79명이 몰려 대상자를 50명으로 늘렸다. 경제학부 배현진(22)씨는 올봄 고향 충남의 광덕산, 가야산, 흑성산을 주말마다 찾아 올랐다. 배씨는 “이번 장학금을 계기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등산을 해봤다”며 “본가에 내려갈 때마다 부모님과 함께 집 근처 산을 오르다 보니 부모님과 대화 나누는 시간도 늘었고, 건강해지는 기분”이라고 했다. 지난 3월 친구 2명과 함께 인왕산을 올랐다는 하지현(22)씨는 “장학금 아니었다면 산 정상까지 오르지 않고 포기했을 것”이라며 “등산한 뒤 친구들과 칼국수를 먹으면서 추억도 쌓아 일석이조”라고 했다.
권씨도 40대 중반부터 매주 전국을 돌면서 산을 올랐다. 그는 “지리산 봉우리 사이에 걸쳐 있는 구름, 겨울 덕유산의 설경이 눈에 선하다”며 “정상에서 발아래 있는 세상을 바라보면 웬만한 일들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 기분이 정말 좋았다”고 했다. 그는 “요즘 학생들은 대학 입학 전에는 내신·수능 점수 1점, 대학 입학 후에는 학점 0.1점 차이로 희비가 교차하는 삶을 산다”며 “등산 중에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호연지기를 길렀으면 한다”고 했다.
권씨는 대학 졸업 후 삼성그룹에 공채 입사해 약 8년간 근무했다. 이후엔 사업가로 살았다. 고향 전북 익산에 있는 부친의 부동산과 사업체를 물려받았다. 부친 양조장을 경영하면서 자동차 공업사, 운수회사 등 자동차 관련 사업도 시작했다. 1992년부터 작년까지 기아자동차 이리 대리점을 운영했다. 1998년부터 익산화물터미널 대표로 있다.
권씨는 2013년 이후 최근까지 사랑의 열매에 46억원, 숙명여대에 20억원, 서울대 10억원, 사랑의 달팽이 5억원, 남성고 10억원 등을 기부했다. 그는 “장학금만 생각하면 배가 부르고 마음이 따뜻해진다”며 “재산을 자식에게 주면 분쟁만 생기지 않나. 더 많이 기부할 생각”이라고 했다. 권씨는 다음 학기부터는 ‘등산 장학금’ 대상을 상경계에서 서울대 전체로 확대하기로 했다. 또 권씨 아내의 모교인 숙명여대에도 기부해 같은 형태의 장학금을 시행하기로 했다.
2025년 5월 30일 조선일보 강지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