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과학 기술원: KIST
1965년은 우리 과학기술 역사의 전환점이 된 해다. 그해 5월 박정 희 대통령은 미국에서 열린 존슨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선물 12개를 받았다. 우리 젊은이들이 월남에서 피 흘린 대가였다. 그 가운데 우 리가 예상치 못한 선물이 포함돼 있었다.
공동성명문 맨 끝에 있는 '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를 지어주겠 다'는 문구였다. 1966년 2월 2일 박 대통령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 (KIST) 설립 정관에 서명했고, 다음날 최형섭 박사를 초대 원장에 임명했으며, 4일 양국 정부가 한미 공동 지원사업계획 협정 서'에 조인했다.
KIST 설립 출자금은 2000만 달러였다. 당시 80kg 쌀 한 가마니 가 3000원이었으니 상상할 수 없는 액수였다. 세계에서 가장 못사 는 나라였던 한국에 대한 투자는 무모해 보였지만 훗날 가장 성공적인 베팅으로 기록된다. KIST가 그간 창출한 가치는 600조원이 넘는다.
연구 인력을 모으는 것도 한 편의 드라마였다. 초대 원장 최형섭 은 미국을 돌며 한인 과학자들에게 호소했다. "가난한 조국은 당 신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첫해인 1966년 18명이 귀국한 후 1990년까지 영구귀국한 과학자가 1000명이 넘는다.
귀국 과학자들은 당시 국립대 교수 연봉의 3배를 받았지만 그 것도 미국에 있을 때의 절반이 안 됐다. 개중엔 대통령보다 더 높은 보수를 받은 이들도 있었다. 논란이 일자 대통령이 그들의 급여 명 세서를 훑어보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이대로 시행하시오!” KIST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초석을 쌓았다. 그 위를 달릴 포니자 동차를 현대자동차가 만들도록 한 것도, 그것을 수출하기 위해 조 선소를 현대중공업이 짓게 한 것도, 그 재료를 생산하기 위해 포항 제철소를 짓게 한 것도 모두 KIST의 두뇌에서 나왔다.
KIST는 우리 산업의 청사진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국산 최초의 컴퓨터 '세종1호'(1973년), 폴리에스터 필름(1977년) 개발 같은 과학 사에 남을 업적도 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 · 국방과학연구소 같 은 14개 연구기관을 탄생시키는 데도 '맏형' 역할을 했다.
탄생 100주년으로 돌아보는 박정희 100장면 책자에서 발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