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된 좋은글들

100년을 살지만 1000년을 생각하라

양병택 2025. 6. 9. 06:21

내일의 꿈 위해 오늘을 참자는  용기의 리더십이 안 보인다  그러고도 우리가 도약한다면  그게 노벨경제학상감이다

 

1인당 국민소득 400달러이던 1974년 3월 30일, 경남 마산시 양덕동 한일합섬 방직2부 건물 옥상에서 특별한 입학식이 열렸다. 하루 3교대 근무의 여공(女工) 1600여 명은 “일하면서 배우는 학생으로~’라고 시작된 축사에 오열하기 시작했다. 이 회사 창업주 김한수는 중학교를 마치고 돈 벌러 온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겠다며 한일여자실업고를 세웠다.

 

“오전 근무일 때는 오후에 공부하고, 야간 근무 땐 오전이든 오후든 알아서 나왔다. 배움에 대한 의지는 상상을 초월했고, 최고 학력 수준도 많았다.”

 

이 학교 50주년 동영상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공장 일로 파김치가 된 여공들은 왜 쏟아지던 잠을 이겨가며 공부에 매달렸을까. 그들에게 공부는 미래였다. 후일 누군가의 아내와 어머니가 된 이들이 가졌던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자’는 정신이 지금 누리는 풍요의 원천임을 확신한다.

 

‘어떠한 시련과 곤궁도 극복할 수 있는 소녀 이외에는 이 교문을 들어올 수 없다.’

한일여실고 교문에 붙어 있던 문구다. 첫해 28학급, 1680명인 학생은 1980년 120학급, 7200명으로 눈덩이처럼 불었다. 이 학교 최대 명물은 운동장의 ‘팔도 잔디’. 명절에 고향 내려가 학교서 배운 대로 큰절을 올리다 눈물을 쏟아낸 어린 여공들이 고향을 그리며 파 온 잔디가 운동장을 파랗게 뒤덮었다. 주경야독을 이겨낸 ‘빛나는 졸업장’이란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릴 단어다

 

한일여실고 출신의 이 학교 교장은 “공부하고 싶어, 고등학생이 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공장에 왔다”고 했다. ‘교학상장(敎學相長)’. 가르치고 배우면서 함께 성장한다는 말로, “오히려 학생들에게 많이 배웠다”는 교사들이 많았던 학교다.

 

“교육에 대한 투자 효과는 당장 나타난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투자보다도 효과가 큰 것임을 믿습니다.”

 

이 학교 설립자가 한 연설의 한 대목이다. 학생도, 교사도, 설립자도 미래를 위해 오늘의 어려움을 이겨내자는 생각으로 만든 학교였다.

 

 

‘인간백회 천세우(人間百懷 千歲憂)‘.

대관령 삼양목장의 청연암에 새겨진 글귀다. 사람은 100세를 살지만 1000년 후를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최근 ‘불닭면 신화’로 주가 100만원을 돌파한 삼양식품의 창업자 전중윤의 말이다. 연 매출 100억원 시절에 50억원을 투자해 목장을 만든 것은 라면으로 ‘허기’는 달랬지만 유제품 섭취를 늘려 선진 국민이 돼야 한다는 꿈 때문이었다. 황병산과 매봉 사이 원시림을 개간해 만든 605만평 규모의 목장은 지금도 아시아 최대 규모이다.

 

요즘은 ‘내일보다 오늘을 위해 사는 게 낫다’고 하고, 내가 더 받는 대신 후세들이 더 내게 한 연금 개혁도 용인된다. 심지어 더 일하고 싶다는 사람도 함께 쉬도록 강제하는 법까지 만들었다. 과연 미래를 위해 지금의 고통을 참자고 하면 ‘꼰대’라고 불려야 하는 것일까.

 

예전의 혹독한 노동의 시대로 가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경쟁자를 보라. 중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미래를 결정할 AI(인공지능) 산업 등에 사활을 걸면서 ‘월화수목금금금’의 개발자들이 넘친다. 나라마다 고령화를 대비한 허리띠 졸라매기가 무섭게 진행 중이다. 오늘 고통스러운 구조조정 없이 우리 산업의 내일은 불가능하지만 아무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고 하지 않는다. 막 치러진 대선에서도 가장 아쉬웠던 것은 “앞으로 10년을 위한 희생이 필요하다”고 설득하는 용기 있는 리더십의 부재였다. 오늘의 땀 없이 내일의 풍요가 어떻게 가능하겠나. 그게 가능하다면 진짜 노벨 경제학상 감일 것이다.

 

2025년 6월 9일 조선일보 이인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