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부 외교의 첫 시험대가 될 대중국 정책
노무현·문재인의 '균형 외교' 미국은 '反동맹'으로 기억한다 지금 美·中은 좋은 시절 다 끝나 한미 동맹 없는 한국은
중화 제국주의 앞에서 제2의 우크라이나일 뿐 균형 외교가 초래할 역풍 명심을
한국 신정부의 대중국 접근 가능성에 대한 경고음이 미국 조야에서 쏟아지고 있어, 대중국 정책이 신정부 외교의 첫 시험대가 되고 있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이달 초 싱가포르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대화) 연설에서 중국의 아시아 지배 야심을 비판하면서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의지하려는 일부 우방국들의 안미경중(安美經中) 노선이 “중국의 악의적 영향력을 심화시킨다”고 지적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 대선 결과에 대한 백악관 논평에는 “세계 민주국가들에 대한 중국의 개입과 영향력을 우려하고 반대한다”는 이례적 경고 메시지가 포함되었다.
미국 학계와 정치권의 반응도 우려의 목소리가 대세다. 대선 직후 발간된 미국 CSIS(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한국 대선 분석 보고서는 한미 동맹 내에 ‘조용한 위기’가 진행 중이라고 하면서, ‘안미경중의 이중적 행보를 용납하지 않는’ 트럼프 행정부와 중국에 대한 실용적 균형 외교를 지향하는 이재명 정부 사이에 갈등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와 고든 창 변호사 등도 한국 신정부의 대중국 접근 움직임에 강한 우려를 표시했다.
이러한 미국 조야의 우려는 전 세계가 미·중 두 진영으로 결집된 신냉전 국제 질서 속에서 미국의 최전방 동맹국인 한국이 중립 또는 친중 진영으로 이탈할 가능성에 대한 깊은 의구심을 반영한다. 한국 신정부는 단지 실용주의에 따른 균형 외교를 추구할 것이라 말하지만, 그러한 균형 외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국은 새삼스럽게 다시 겪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미국은 과거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 당시 한국 정부가 균형 외교의 이름으로 행했던 반동맹적 행보를 잘 기억하고 있고, 트럼프 대통령 자신이 1기 집권 시절 문재인 정부를 몸소 겪은 바도 있다.
오늘날 대중국 정책을 둘러싼 외교 환경은 그 당시보다 훨씬 열악하다. 첫째, 과거 미·중 관계는 상당 부분 전략적 협력 관계였으나, 현재의 중국은 미국이 총력을 기울여 타도하려는 최대 적국이다. 둘째, 과거 동아시아 안보의 주된 위협은 북한이었으나 현재는 중국의 군사적 팽창이 훨씬 큰 위협이며, 이는 한국의 의사와 무관하게 한미 동맹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셋째, 전 세계가 미·중 두 진영으로 재편되고 유럽의 전통적 중립국들마저 중립을 포기한 신냉전의 세계에 대중국 이중 외교가 설 땅은 없다. 더욱이 미국의 안보 지원에 의존하는 동맹국 한국이 균형 외교를 논할 분위기는 아니다.
과거 미·중 관계가 좋던 시절에는 안보와 경제를 분리해 대미 정책과 대중 정책을 별개로 취급할 수 있었고, 안미경중도 그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미·중이 사생결단의 패권 대결을 벌이는 현 상황에서 대미 관계와 대중 관계는 분리될 수 없고 제로섬의 계산법이 적용되는 단일 사안일 뿐이다. 따라서 한국이 한미 동맹의 이면에서 중국과 별도의 거래를 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대미 관계 희생이 불가피하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유럽 국가들을 오랜 평화의 꿈에서 깨웠을 때, 제2차 세계대전 이래 70년간 중립을 고수해 온 스웨덴과 핀란드가 즉각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결정한 건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2017년 인도·태평양 지역에 쿼드(QUAD)가 창설된 것도, 2021년 미·영·호주 사이에 오커스(AUKUS)가 창설된 것도 모두 중국의 팽창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직 평화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한반도 서해를 남중국해처럼 중국 영해로 만들고 남북한을 길들여 속방처럼 거느리려는 중국에 맞서 주권을 지키려면, 견고한 한미 동맹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다.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을 축출하고 패권을 장악하려면 한반도는 대만과 더불어 중국의 최우선 장악 대상이며, 이는 한국이 홀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중화 제국주의 앞에 한미 동맹 없는 한국은 제2의 우크라이나일 뿐이다. 이처럼 한미 동맹의 중요성이 지난 수십 년 어느 때보다 중요한 현시점에, 신정부가 ‘한국은 신뢰할 수 없는 동맹국’이라는 인식을 미국에 심어주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동맹국을 향해 심판의 칼을 뽑아 든 현 상황에서 한국이 미국의 주적 중국을 향해 균형 외교의 나팔을 분다면, 그로 인해 초래될 역풍은 단지 주한 미군 감축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2025년 6월 13일 조선일보 이용준 세종연구소 이사장·前 외교부 북핵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