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 선교개척자 이수정 그는 누구인가?
이수정은 1884년 일본에서 한문으로 된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다.
우리나라의 한글 성경역사를 보면 선교사보다 성경이 먼저 한반도에 도착했다. 조선선교를 위한 성경번역은 스코트랜드 선교사 존로스(John Ross, 1642`1915)에 의해 시작되었다. 1878년 요한복음과 누가복음 초벌번역을 시도했다. 1879년 4복음서 초벌번역을 마쳤다. 1882년 선양에 있는 문광서원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출판되었다.
1882년 만주에서 누가복음이 한글로 번역되어 출판될 무렵 조선은 임오군란으로 어수선했다. 흥선대원군(수구 세력)과 명성황후(진보 세력) 사이의 무력 충돌이었다. 이 혼란 속에서 명성황후의 목숨을 지키는 데 공헌한 이수정( 李樹廷 , 1842-1886)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고종은 이수정(李樹廷, 1842-1886)이 1882년 임오군란으로 어수선할때 명성황후를 잘 보살폈다는 공로를 인정해 일본 유학 기회를 제공했다. 이수정은 온건 개화파로서 선진 문화를 배우기 위해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네덜란드 농업기술을 배운 농학자 츠다센(津田仙, 1873-1908)에게 기독교 복음을 듣게 되었다. 츠다센은 이수 정에게 한문성경을 선물로 주었다.
이수정은 한문성경(특히 산상수훈)을 읽다가 예수님을 만났 고, 1883년 4월 29일 동경의 한 장로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이수정은 미국 장로교 선교사 녹스(G. W. Knox, 1853-1912)와 감리교 선교사 매 클레이(R. S. MacLay, 1824-1907)에게서 성경을 배웠다. 이수정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불교와 하나님의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기독교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파악했다.
당시 미국성서공회 총무로 섬기고 있던 헨리 루미스(Henry Loomis, 1839-1920) 목사는 믿음직 한 이수정을 찾아가 조선 선교를 위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할 것을 제안했다. 이수정은 문물을 배우는 것보다 동족을 위해 진리의 도(道)를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깨닫고 성경 번역에 착수했다.
그는 먼저 '현토성경'(懸吐聖經, 한문성경에 한글로 토를 다는 방법)으로 1883년 5 월 한 달 만에 신약 전체를 완성했다. 그해 11월 인쇄에 들어가 1884년 8월까지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등 5권을 각각 1천 부씩 출판했다. 현토성경이 일본 유학 중이던 한국 기독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현토성경 번역을 마친 이수정은 1883년 6월부터 1884년 4월까지 마가복음 한글 번역을 마치고, 1885년 2월 《신약전서 마가복음셔 언해》(마가복음) 6천 부를 인쇄했다. 1884년 언더우드선교사가 인도로 선교로할까? 하였는데 이수정이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듣고 한국으로 바꿨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수정의 번역본 성경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반도에 들어올 때(1885년 4월 5일) 들고 들어왔다.
이수정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미국 선교사들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Condition of Korea'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발행되는 선교잡지에 소개되었다. 그 편지(1883년)로 이수정은 '조선의 마케도냐 인'(Macedonian of Korea)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고한다.
2025년 6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