男高 소멸괴담… 강남 8학군 그 아파트엔 아들 둔 가족 몰린다

“아들 키우기 힘든 세상이다.”
요즘 아들 둔 부모들의 한탄이다. 초등학교에서 산만하고 선생님 말씀 안 듣는다고 혼나는 건 대개 남학생이다. 중·고교로 갈수록 차분하고 자기 관리 잘하는 여학생에게 밀린다. 야외 활동과 체육 수업은 줄었다. 탐닉할 것은 도파민 터지는 게임뿐.
빈둥대다가도 필요할 때 폭발적 힘을 내 살아남던 원시 시대 수렵 본능은 뇌에 각인돼 있는데, 21세기 학교와 입시는 장기간 한눈팔지 않고 꼼꼼히 채집해야 하는 스펙과 친밀한 의사소통 위주로 돌아간다. 모험과 방황의 시공간을 박탈당한 아들들은 도망칠 곳이 없다고 느낀다.
10대 중후반, 갈등은 극에 달한다. 부모와 관계는 시한폭탄. 아들의 특성에 맞춰 교육하는 남학교마저 찾기 어렵다. 남녀 공학(共學)이 대세다. 물론 여고도 사라진다. 그러나 거기에 불만 갖는 딸들은 드물다. 위기는 여고보다도 적어진 남고다. 소멸해가는 남고, 어쩌면 거기엔 생각보다 많은 우리 사회의 문제가 담겨 있을지 모른다.
여학생이 더 잘한다 ‘공학의 여고화’
경기도 부천시에서 초등생 아들 둘을 키우는 학부모 A. “여긴 남고가 부천고 딱 하나 남아있었는데 그마저 곧 과학고로 바뀐다. 일반 남고가 전무한 것”이라며 “남고가 몇 곳 있는 인천으로 이사하려 한다”고 말했다. 서울 은평구의 아들 엄마 B도 “근처 고교는 남녀공학과 특목고뿐이고, 30분 거리의 남고는 면학 분위기가 떨어진다”며 “강남·목동 등 학군지의 남고로 무리해 옮길지 고민”이라고 했다.
지난해 기준 전국 고등학교 2380교 중 남녀공학의 비율은 1577교로 66.3%다. 3곳 중 2곳이 공학이다. 나머지 단성(單性) 학교 중 남고는 392교, 여고는 411교다. 자연적으로 남자가 더 많은데도 남고 수는 더 적다.

부동산업계와 학원가에 따르면 전국에서 아들 둔 집의 ‘남고 찾아 삼만리’ 대이동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세종시나 분당, 일산, 동탄 등 신도시들은 공학만 있어, 인근 구(舊)도시나 서울 학군지로 이동하려는 수요가 많다. 강남 8학군엔 남중·남고에 배정받기 쉬운 아파트에 아들 둔 가족만 몰려 사는 단지도 있다.
이는 내신 경쟁력을 노린 여학생들이 남녀공학에 몰려 소위 ‘공학의 여고화’ 현상이 일어나는 것과 대조적이다. 95년간 남고였던 서울 장충고는 2023년 공학으로 전환하자마자 여초(女超) 학교가 됐다. 공학인 서울 이대부고와 중대부고, 현대고 등도 여학생 비율이 60~70%다. 전국 공학 고교마다 여중생 지원자가 몰려 추첨을 할 정도지만, 남학생은 자주 미달 사태가 벌어진다.
전국의 외고는 여학생이 70~80%다. 서울대를 가장 많이 보낸다는 남녀공학 자립형사립고인 서울 하나고도 여학생 입학 경쟁률은 4대1에 육박하지만 남학생 경쟁률은 2대1 수준.
전북 상산고 등 유명 자사고들이 속속 공학화되다 보니, 희귀하게 남고로 남은 경북 김천고나 충남 한일고 같은 곳은 “여학생과 경쟁할 필요 없다” “군대처럼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다”며 주목받고 있다.
유럽선 “남아 입학 1년 늦춰야” 주장도
최근 학령인구 감소 탓에 단성 학교 통폐합과 공학 확대는 불가피한 측면이 크다.
그런데 남녀에 차이를 두지 않고 똑같이 가르치는 혼성(混性) 교육은 진보 진영이 고교 평준화와 함께 오랫동안 추진해온 이념형 정책이기도 하다. 보편 교육 확대와 양성 평등, 사회성 함양 측면에서다. 남성 기득권층의 네트워크 핵심인 지역별 명문 남고에 대한 불편한 시선도 작용했다.
공학 전환과 신설은 DJ 정부인 1990년대 말 본격화됐다. 진보 교육감이 장기 집권한 경기도는 현재 공학 고교 비율이 91%나 된다.
반면 보수적인 지역이나 동문의 영향력이 강한 학교들은 남고·여고의 명맥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서울 강남 3구는 고교 절반(49%)이 단성 학교다. 인천도 단성 학교 비율이 47%, 대구 44%로 전국 평균(33%)을 웃돈다.

아동기부터 사춘기까지 여성의 성장이 더 빠른 데다, 여성의 사회 진출에 대한 제약이 줄자 여학생들은 눈부시게 달려나가고 있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각국 여학생이 남학생을 압도하고, 한국 등 많은 선진국의 대학 진학률도 여성이 앞선다.
남아 교육 전문가인 라인하르트 빈터 독일 튀빙겐사회과학연구소장은 “요즘 교사들은 버릇없고 장난치는 아이에겐 나쁜 점수를 주고, 같은 성적이면 ‘불량함’으로 감점한다. 협력과 소통, 자기 절제에 능한 여학생에게 유리한 환경”이라며 “남자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학교는 여자들의 것’ ‘사회는 남자에게 적대적’이란 생각을 고착화할 위험이 크다”고 했다.
유럽에선 이민자와 소외 계층에 준해 남학생을 배려하는 쪽으로 교육 정책이 바뀌고 있다. 최근 노르웨이에서 ‘남아 입학을 1년 늦추자’는 제안이 나온 배경이다.
중학교 여교사 C는 “성적 상위권은 물론이고 각종 수행평가, 합창대회 우승도 여학생이 휩쓴다. 팀 과제를 시키면 여학생이 이것저것 시키고 남학생이 따라가는 게 흔한 풍경”이라고 전했다.
고교 남교사 D는 “남학생들은 무협지만 읽으면서 ‘수능 국어 공부’라고 주장하거나, 부족한 점을 지적해도 ‘저 이만하면 괜찮지 않아요?’라며 상황 파악조차 못 하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했다.
이러다보니 공학에서 “전교 1~20등 중 남자는 단 2명” “남자애들이 내신을 다 깔아준다”는 이야기가 불문율이 됐다. 여중생들은 십중팔구 공학 고교에 지원한다. 가장 선호하는 건 ‘내신에 유리한 남녀공학이되, 남자애들과 뒤섞일 필요 없는 남녀 분반 고교’라고.

고교 입시 전문 컨설턴트 E는 “올해 도입된 고교 학점제 때문에 남학생이 더 불리해질 수 있어, 아들 부모에겐 ‘최상위권이 아니라면 무조건 남고 보내라’라고 말한다”고 했다. 고1부터 대입 큰 그림을 짜고 경쟁력 있는 과목을 찾아 듣는 등 “메타인지를 가동해 멀티태스킹을 잘해야” 하기 때문에 여학생 우위가 심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학생은 막판 스퍼트를 올려 수능에 올인하는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대입에서 3년 치 생활기록부를 보는 수시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는 데다, 정시에서도 내신 반영률이 높아져 ‘정시 파이터’ 전략도 쉽지 않다고 한다.
똑같이 다루면 이해하고 화합할까
공학에서 여학생들 내신은 앞설지 모르지만, 전체 학업 성취도는 좋지 않다. 2025년 수능 표준점수 분석 결과 국·영·수 모든 과목의 남녀공학 평균이 남고·여고보다 낮고, 하위권(8~9등급) 비율은 가장 많았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팀은 “중·고교생의 학업성취도는 사회경제적 요인보다 단성 학급 편성 여부에 좌우된다”며 “혼성반에선 남녀 모두 성적이 하락하는데, 그 불이익은 남자가 더 크다”고 분석했다.
“아들은 남고” “순할수록 남고”란 말이 나온 게 학업 경쟁 때문만은 아니다. “사춘기에 이성(異性) 문제에 잘못 얽히면 남자아이들이 사고를 치거나 상처 입기 쉽다”고 걱정하는 이가 많다. 대전의 아빠 F는 “우리 애 학교에서 남학생이 전교 1등을 하자, 2등 여학생이 그 애와 사귀다 곧 차버려 정신을 못 차리게 한 뒤 1등을 뺏었다더라”고 전했다. ‘여학생이 남학생을 상대로 각종 심리전을 벌인다’는 별별 괴담이 곳곳에서 돌지만 진위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만큼 아들 부모의 공포가 크다는 건 분명하다.
공학에선 학교 폭력 발생률도 단성 학교보다 높게 나타난다. 현장 교사들은 “남학생이 여학생 시선을 신경 쓰다 우발적 폭력을 일으키는 일이 많다” “남고 아이들보다 공학 남학생을 지도하기가 훨씬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남학생들이 여학생 앞에선 교사에게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한다는 것. 이 때문에 정부의 공학 전환 압박에도 교사·학부모가 똘똘 뭉쳐 ‘남고로 남겠다’고 버티는 경우가 각지에서 속출하고 있다.
애초 남녀공학 도입엔 ‘남녀 상호 이해를 높여 사회 통합을 이룬다’는 취지가 컸다. 그러나 경기도 일산의 학부모 H는 “오히려 공학 학교에 다닌 세대에서 젠더 갈등과 저출산이 더 심화하지 않았느냐”며 “무조건 평등하게 만들면 서로 이해하고 화합한다는 건 오해다. 남녀의 다름을 인정하고 나눠 가르치는 게 진정한 양성 평등”이라고 말했다. 혼성 교육의 본산인 미국에선 20여년 전 뇌·호르몬의 성별 격차를 두고 격렬한 학계 논쟁이 벌어진 이래 남녀 분반이 확대되고 있다.
2025년 6월 21 조선일보 정시행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