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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2(아일랜드 록그룹)는 이승만을 배워야 했다

양병택 2025. 7. 25. 06:00
 
 
일러스트=이철원
 

“에~요!”

하얀 민소매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그룹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외친다.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관중 수만 명이 환호하며 따라 외친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하이라이트인 이 장면은 1985년 에티오피아 난민의 기아 문제를 해결할 기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개최한 자선 공연 ‘라이브 에이드(Live Aid)’의 일부였다. 이 공연에는 퀸뿐 아니라 데이비드 보위, 폴 매카트니, 레드 제플린, 스팅, U2 등 당대 최고 록스타가 총출동했다.

 

이 중 아일랜드 출신의 U2는 사회문제 참여에 진심인 밴드였다. U2는 보컬 보노의 시원하고 호소력 짙은 목소리, 기타리스트 에지의 맑고 영롱한 딜레이 사운드 위에 적극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곡들로 인기를 끌었다. 북아일랜드 평화 시위 무력 진압 사건인 ‘피의 일요일 사건’을 다룬 ‘Sunday Bloody Sunday’,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을 위한 헌정곡 ‘Pride’, 미국의 중남미 외교 정책의 이중성을 비판한 ‘Bullet the Blue Sky’, 미얀마 민주화 운동가 아웅산 수지를 지지한 ‘Walk On’ 등이 대표적이다.

 

U2는 음악 활동을 넘어 정치적 행동으로 신념을 실천했다. 먼저 아프리카의 부채(Debt) 탕감, 에이즈(AIDS) 퇴치, 공정 무역(Trade), 아프리카(Africa) 기근의 앞 글자를 딴 DATA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그리고 ‘one’이라는 곡에 이런 주제를 담아 불렀다. 보노는 2005년 G8 정상들과 만나 아프리카 국가들의 채무를 탕감해 주기를 요구했다. 또 1조원이 넘는 기금을 모아 아프리카인 2500만명 이상에게 에이즈 치료제를 제공했다. 보노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부정적 여론도 있다. 평소 U2는 아일랜드 정부가 아프리카에 공적 원조를 더 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던 U2는 아일랜드 정부에서 2006년부터 예술인 소득세 면제에 상한선을 두는 법안을 시행하자 자신들의 음악 저작권 수입을 얻는 법인을 세율 낮은 네덜란드로 이전했다. ‘아프리카를 돕자’면서 오히려 정부 재정 기여를 줄인 U2를 언론과 시민 단체는 ‘내로남불’이라며 비판했다.

또한 자선 활동의 실질적 효과에 대해서도 여러 의문이 제기됐다. 막대한 모금액 중 대부분이 공익 법인 운영비로 사용되고, 실제 현지 주민에게 전달되는 비율은 낮았다. 이에 공익 법인으로 탈세를 노린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의료 인프라가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에이즈 치료제만 보급되다 보니 오히려 환자에게 부작용만 안긴 사례도 생겼다. U2의 DATA를 포함한 여러 자선 단체의 노력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1985년부터 2023년까지 세계 인구 중 하루 3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빈곤층 비율은 45%에서 10%로 하락했지만, 아프리카 인구 중에서는 60%에서 50%로만 낮아졌다. 구조적 빈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커녕 지원 자금과 구호품이 그 국가의 독재 권력을 재생산한다는 여론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활동이 때로는 ‘도움’이 아니라 ‘통제’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서구 유명 인사가 아프리카를 구제하는 이미지를 앞세우는 순간, 현지인은 자율성과 주체성이 없는 수동적 구제 대상이 된다. 특히 빈곤과 고통을 과도하게 부각하며 감정적 후원을 유도하는 방식은 이른바 ‘빈곤 포르노’라는 비판까지 받는다. 이런 이미지 마케팅은 밴드의 도덕적 브랜드를 강화하는 데는 효과적일지 모르지만, 장기적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다.

 

U2뿐 아니라 좋아하는 여러 록스타의 자선 활동을 보며, 선의는 존중하지만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늘 아쉬웠다. 그럴 때면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의 정책을 참고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대표적 공으로는 외부 위협 때 안보를 확보해 경제 발전에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준 ‘한미상호방위조약’, 다수 농민에게 지켜야 할 나의 것을 만들어준 ‘토지 개혁’이 많이 거론된다.

 

그러나 가장 큰 업적은 ‘교육 혁명’이었다. 이승만은 80%에 이르던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빈약한 나라 살림에도 국가 예산의 10% 이상을 교육에 투자했지만 전국에 학교를 짓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이승만은 지주들에게 ‘땅을 사립학교 설립에 쓴다면 토지 분배 대상 농지에서 제외해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지주들은 땅을 헐값에 정부에 팔지 않아도 되고 지역민에게 ‘교육자 집안’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제안을 환영했다. 이에 따라 사립학교 재단이 대거 세워졌다. 개혁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기득권의 저항도 잠재운 정책이었다.

 

이승만 재임 기간 초등학교 수는 1.6배, 중학교는 10배, 고등학교는 3.1배 늘었다. 대학 진학률도 4배 이상 올랐으며 문맹률은 22%로 떨어졌다.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인재를 선발해 선진국에 유학을 보내는 엘리트 교육도 병행했다. 자립할 수 있는 ‘깨어난 국민’층이 형성된 것이다. 그 국민은 부정선거로 독재를 계획한 자유당 정권을 무너트렸다. 이후 박정희 시대의 폭발적 경제성장 주역이 되었다.

 

가난한 이에게 물고기를 잡아주는 건 쉽다. 그러나 그것은 한 끼 식사로 끝나고 만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만 진정한 자립이 가능하다. 빈곤을 탈출하게 만들 근본적 해결책은 교육이다. U2여! 당신들의 활동이 단지 세금 회피와 도덕적 이미지 구축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진심으로 빈곤국의 미래를 위하는 것이라면, 대한민국의 성공을 이끈 이승만의 교육정책에서 배워라.

 

2025년 7월 25일 조선일보 박은식  갈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