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 답사
    낙서장 2023. 5. 21. 19:46

    지난 토요일 신문에 부산 초등생 학생들이 보훈처장에게  서울 마포구 양화진에  묘지에 잠들어 있는 미국인 헐버트박사의 훈격을  올려달라고 단체 청원을 냈다고 했다.

    지난 17일 서울 마포구 양화진의 호머 헐버트 박사 묘역을 찾은 부산 동신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박민식 보훈처장에게 청원을 건네고 있다.

    미국인인 헐버트 박사는 188623세 나이로 한국에 왔다. 대한제국 왕립 영어 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에 왔다가 고종의 자문을 맡았다. 5년 동안의 교사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귀국한 헐버트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권유로 목사 안수를 받고 1893년 북감리회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이후 배재학당 안의 삼문출판사 책임자로서 선교잡지를 통한 문서선교에 힘썼다. 1896년에는 서재필, 주시경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배재학당 제자인 주시경과 함께 한글을 연구하며 띄어쓰기와 구두점을 한글에 도입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고종의 친서를 품고 미국에 특사로 파견돼 부당성을 알렸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기간 동안 독립운동가 김규식과 여운홍의 한국 독립 청원 외교활동을 돕기도 했다. 1942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결성한 한미협회에 참여했다. 1950년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그 학생들은 웬만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한국을 위해 청춘을 바친 박사님의 훈격을 높여주면 후대가 그분의 일을 더 높이 기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고 학생들의 청원을 받은 . 보훈처는 학생들이 제안한 헐버트 박사 훈격 상향 청원을 적극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라 했다고 한다

     

    그기사를 읽고 양화진 묘역을 찾아가보려고 했다. 오늘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지하철로 합정역 7번출구에서 하차하여 양화진 외국선교사 묘지 공원을 찾아갔다. 그곳에 갔더니 천주교 묘역과 개신교 묘역이 분리되어 설치되어 있었다. 개신교쪽 묘지를 둘러보니 그곳에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우리민족을위해 일생을 바친 외국인 선교사 가족 145명이 안장되어 있다. 선교사들은 당시 세상의 변방이었던  우리나라에  복음의 빛을 나누기 위해 헌신하였고 이들은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여 사회발전을 꾀하였고 이들중 일부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위험을 감수하기도 했습니다.   

    그곳을 답사하고  그곳 홍보자료를 읽으면서 인상깊었던 선교사를  소개하면   배재학당을 세웠던켐불선교사 , 이화학당을세운  스크랜턴 대부인, 연세대학을세운 언더우드  그리고  세불란스병원을 세운  에비슨 선교사를  들수있다. 

     

    캠벨선교사는  미국의 남감리회에서 한국으로 파송한 첫 여성 선교사로서 배화학당을 설립하였고, 한국 여성들을 복음 안에서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에 헌신한 선교사이다. 1853년 미국 텍사스 주의 감리교 목사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캠벨 목사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았으나, 27세 때 남편과 사별하고 곧이어 두 자녀마저 병으로 잃는 큰 아픔을 겪었다. 이후 그녀는 선교사가 되어 남은 일생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캠벨 선교사는 189744세의 나이에 내한하여, 1898년 지금의 종로구 내자동에 학교를 열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배화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배화학당이다191865세 때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가 한국에 낙농업을 보급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병을 얻게 되었다. 안식년이 끝난 후, 더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에 몸을 바쳤으니 죽어도 한국에 가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며 기어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고 내한 3개월 만인 192011, 67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100여 년 전 양화진에 묻힌 그녀의 묘비에는 요한계시록 1413절 말씀이 새겨져 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녀의 인생을 정리한 글귀가 신앙의 후배들에게 주는 울림은 여전히 크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조선에 온 최초의 여선교사이자 우리나라 근대 여성교육의 선구자이다. 그녀는 53세 되던 18856월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로서, 외아들인 의료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 부부와 함께 한국에 왔다. ‘대부인이라는 호칭은 한국인들이 존경의 의미를 담아 부른 호칭이며, 동시에 며느리 스크랜턴 부인과 구분하기 위해 부른 호칭이기도 하다. 1886년 그녀는 성벽 주위에 버려진 아이들과 첩과 같이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집에서 학당을 시작했다. 점차 학생들의 숫자가 늘어났고 1887년에 조선 정부에서는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자신이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하도록 이끌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1891년 이화학당장 자리를 후임에게 물려주고, 이후부터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직접 전도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1906년에는 엄비의 후원을 받아 진명여학교를 설립하는 일에도 기여했으며, 서울외곽 지역을 돌며 순회전도활동을 펼치는 과정에서 수원에 삼일여학교(매향여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70대가 되어서도 그녀의 선교 열정은 식을 줄 모르고 타올랐다. 1909년에 접어들면서 스크랜턴 대부인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는데, 귀국을 마다하고 자리에 누워서도 그를 찾아오는 선교사와 전도부인들을 지휘하는 병상 선교를 계속하였다. 1909108, 조선 여성들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으로 24년 동안 헌신한 스크랜턴 대부인은 마침내 77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 땅을 밟은 미국 북감리회 최초의 복음선교사로서, 한국 감리교의 개척자이자 한국 근대교육의 선구자이다. 아펜젤러는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아내와 함께 선교지 조선을 향해 출발하여 1885년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선교사가 세운 국내 첫 미션 스쿨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교육기관을 설립하였는데, 이듬해 이 학교는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라는 토론회를 조직하고, 독립협회의 서재필, 윤치호 등을 강사로 초청해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 의식과 독립 정신을 고취시켰다. 또 아펜젤러는 188710월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를 설립하고, 18971226일 성탄 주일에는 한국 개신교 최초로 붉은 벽돌로 지은 벧엘예배당을 봉헌하였는데, 이 교회가 바로 오늘날의 정동제일교회이다. 아펜젤러는 출판 분야와 성서번역 분야에서도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배재학당 안에 삼문출판사라는 인쇄소를 만들어 기독교 소책자들과 <독립신문> 등 일반신문도 인쇄하였으며, 언더우드, 스크랜턴과 더불어 성경번역위원회를 최초로 조직해서 한글성경번역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처럼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아펜젤러는 1902,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일어난 선박 충돌 사고로 안타깝게 순직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44살이었다.

     

    언더우드선교사는 미국 북장로회가 한국에 파송한 최초의 복음 선교사로서, 선교 초기에 그의 흔적이 묻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한국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188545일 부활주일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함께 내한하여 당시 기독교 전파가 불법인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쳤다. 18865월 서울 정동에 고아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언더우드학당, 예수교학당, 민노아학당을 거쳐 경신학교로 발전했다. 18879월에는 역시 정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회를 설립하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새문안교회의 모체다.

     

    의료선교사로 내한한 릴리아스 호튼(1851-1921)1889년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명분으로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선교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아내 호튼 선교사는 제중원 부인과 과장으로서 의료사역은 물론, 왕비 민씨의 주치의 직분도 잘 감당하여 왕실의 신임이 두터웠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915년 연희전문학교의 전신인 조선기독교대학을 설립하여, 훗날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대가 합쳐져 오늘날의 연세대학교가 탄생하도록 산파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 대학교육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887년 초대 성경번역위원장을 맡은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위원장으로서의 그 책임을 다하였고, 대한제국기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출범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미국으로 돌아가 안식년을 보내는 중에도 신학교 방문과 열띤 강연을 통하여 많은 젊은이들을 고무시켰고, 그 중 여러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를 자원하도록 이끌었다.

     

    1916년 건강이 악화되어 치료차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그해 1057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미국에 있던 그의 유해는 1999년 한국으로 돌아와 양화진에 잠들어 있는 부인 호튼 선교사와 합장되었다. 이곳에는 언더우드 1, 2, 3세 부부 6명을 포함, 4대에 걸쳐 모두 7명이 안장되어 있다.

     

     

     

    에비슨선교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의 4대 원장을 역임하고, 세브란스병원을 설립하는 등 한국 근대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선교사이다. 그는 1890년 토론토의대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외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캐나다에 와 강연을 한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권유를 받고 한국에서의 선교사 사역을 결심 하였다. 18937월 온가족과 함께 한국에 온 그는, 그해 11월부터 제중원의 원장 을 맡아 환자들을 진료하는 한편 고종의 주치의로도 활동했다.

     

    내한 초기 에비슨 선교사는, 제중원의 재정 결핍과 의료진 및 시설 부족 등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를 낳는 전염병의 예방과 치료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제중원을 왕립병원에서 민간병원으로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18949월부터 북장로회 선교부가 제중원 운영을 맡게 되었고, 애비슨 선교사가 그 책임자가 되었다.

     

    첫 안식년을 맞은 1900, 그는 뉴욕에서 열린 만국선교대회에서 만난 강철회사 사장인 루이스 세브란스 씨로부터 기부를 받아 1904년 세브란스병원을 건립하고, 세브란스병원의학교를 통해 19087명의 첫 한국인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또한 1916년 순직한 언더우드 선교사에 이어 경신학교의 교장으로도 18년 동안 헌신하였는데, 이때 경신학교 대학부를 연희전문학교로 발전시켰다.

     

    에비슨 선교사는 33세에 한국에 온 이래 42년간 의료선교사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 하였고, 1935년 캐나다로 귀국한 후 1956년 미국에서 96세로 별세하였다. 부산에서 출생한 에비슨 선교사의 넷째 아들 더글라스 에비슨은 아버지의 모교인 토론토대학 의대를 졸업하고, 1920년 의료선교사로 다시 내한하여 1923년부터 세브란스병원에서 교수 및 병원장으로 재임하면서 병원 성장에 기여하였다.

     

    1939년 귀국하여 1952년 캐나다에서 사망하였고, 생전의 유언대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더글라스 에비슨의 부인 캐슬린 선교사는 1920년부터 1939년까지 남편과 함께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했으며, 1985년 캐나다에서 사망하여 양화진의 남편 곁에 안장되었다.

     

    이곳 저곳 모두 돌아보려고는 했지만   인생 8학년을 살다보니  몸 콘디숀이 따라주지못해  부자연 스러워 아쉼은 있지만 그런대로  그곳에 매장된 선교사님들께 감사한 마음이다.  잘보이  않은 눈으로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하며  횡설 수설   어설프게 글을 썼기에   오자와 탈자 가 있더라도 양해를  구하며  올려놓습니다.  

    2023년 5월 21일 

    소다 가이치는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는 유일한 일본인이며, 한국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은 첫 일본인이기도 하다. 소다와 그의 부인은 그들의 삶을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바쳤다. 1867년 일본 야마구치 현에서 태어난 소다의 젊은 시절은 방황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1899년 어느 날 대만에서 소다가 술에 만취한 채 노상에서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는데, 이 때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았던 무명의 어떤 한국사람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05년 소다는 은인의 나라에 은혜를 갚으리라 결심하고 한국에 와 서울 YMCA 일본어 선생이 되었다. 소다는 YMCA에서 만난 이상재 선생에게 큰 감화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고, 41세 때에는 독실한 신앙인이자 이화여학교와 숙명여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던 30세의 우에노 다키와 결혼했다. 1911년 소다는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YMCA 동료들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자,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동료들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힘썼다. 1921년부터 소다는 카마쿠라(겸창)보육원 경성지부장이 되어 사회사업에 투신하게 되는데, 우리나라가 해방될 때까지 천명 이상의 고아들을 돌보았고, 소다 부부는 고아들의 대부, 대모로 불렸다. 소다가 운영하는 고아원 출신 아이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일이 늘어나자, 일제 경찰은 소다가 항일교육을 시킨다고 생각하고 그를 조사하기도 했다. 소다는 일제의 패망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서 한 손에는 세계평화라는 표어를, 또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다니면서 조국 일본의 회개를 외쳤다. 그는 한경직 목사의 초청으로 94세 되던 1961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소다는 겸창보육원의 후신인 영락보린원에서 1년 동안 고아들과 함께 지내다가 196295세로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묻혔다.

    .

    양화진에 대해 더 자세이 알고 싶으시면 여기를 클릭하시면 보실수있습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