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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동궁과 월지" : 안압지
    종교문화 2024. 3. 21. 07:20

     

     신라 전성기에 만들어진 궁궐 유적 '동궁과 월지'의 야경. /경상북도
     
     
    국립경주박물관은 오는 8월 31일까지 '안압지의 추억, 내 기억 속 월지'라는 제목으로 사진 공모전을 연다고 합니다. '안압지'가 어디일까요? 정작 경주에 가면 그 이름이 적힌 표지판을 찾기 쉽지 않습니다. 지금은 정식 명칭이 '동궁(東宮)과 월지(月池)'로 바뀌었기 때문이죠. 예전에는 이곳을 오래도록 '안압지(雁鴨池)'라고 불렀습니다. 요즘엔 야경이 아름다운 촬영 명소로 꼽히고 있어요.

    바다 같은 인공 호수를 만들다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동궁과 월지'는 신라 전성기에 만든 궁궐 유적이에요. 1963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이 됐습니다. '동궁'이란 보통 왕위를 이을 임금의 아들이 살던 곳을 말해요. 조선 시대엔 '세자', 신라 때는 '태자'가 산 곳입니다. 신라의 동궁은 왕궁인 월성(반월성)에서 약간 떨어진 별궁이었어요. 여기에 '월지'라는 이름의 인공 호수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동궁과 월지'는 궁전 건물과 호수로 이뤄진 왕실 정원인 셈이죠. 건물은 새로 지은 것이지만 호수와 정원엔 아직도 옛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30대 임금 문무왕(재위 661~681) 때인 서기 674년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으며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기록돼 있어요. 다른 기록에는 못 가운데 섬 3개, 못의 북쪽과 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다고 전합니다. 세 섬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봉래·방장·영주산의 '삼신산'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에선 이 세 산 이름이 각각 금강·지리·한라산의 별칭이기도 합니다. 현대의 발굴 조사 결과, 호수(못) 둘레에 돌을 쌓은 석축 길이가 1005m, 전체 넓이가 1만5658㎡나 될 정도로 큰 규모였습니다.

    이 호수인 월지(안압지) 근처에 세워진 건물이 임해전(臨海殿)입니다. 동궁에 있었던 건물 27채 중 하나로 '바다와 가까운 건물'이란 뜻이죠. 그러니까 넓은 호수를 만들어 놓고 바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호수 가장자리에 굴곡을 입히는 기법을 썼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 바라봐도 호수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바다처럼 보일 수 있었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사방 어디서도 전체를 볼 수 없는 무한 공간'이라 표현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국난 극복 기원' 장소였을 가능성도

    월지를 만든 문무왕의 아버지 태종무열왕(김춘추·재위 654~661) 때인 660년.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그 뒤를 이은 문무왕은 668년 고구려 수도 평양성을 점령했습니다. 676년에는 나·당 전쟁 끝에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 신라의 전성기를 활짝 열었습니다. 문무왕의 월지는 이렇게 한껏 국력이 강해진 신라의 자신감을 표현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74년에 안압지가 완공됐다는 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구려·백제 유민들과 함께 큰 나라인 당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던 신라가, 아직 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흥을 위해 월지를 만드는 '사치'를 부릴 수 있었겠냐는 겁니다. 이곳에서 금동판 불상 여러 점이 발굴됐기 때문에, 어떤 종교적 행사를 연 장소였을 것이란 주장도 있습니다. 한창 나·당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지진과 반란까지 여기저기서 일어났기 때문에 '국난 극복을 기원하는 장소'로 쓰였을 거라는 얘깁니다.

    그러나 그것이 월지를 만든 근본적 이유는 아니었을 겁니다. 인공 호수는 연회와 풍류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697년(효소왕 6년)과 769년(혜공왕 5년) 등 여러 차례 왕이 임해전에서 신하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860년(헌안왕 4년) 연회에 참석한 화랑 김응렴이 임금의 사위로 뽑히는 일도 있었습니다. 훗날 신라 48대 왕으로 즉위하는 경문왕입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의 주인공이자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생부로 전해지는 인물입니다.

    이후 신라가 쇠퇴해가는 상황에서도 월지 앞 연회는 끊이지 않았고, 급기야 마지막 임금 시절인 931년(경순왕 5년) 고려 태조 왕건을 임해전에서 접대했다고 합니다. 그 잔치 4년 뒤에 신라는 멸망하고 맙니다.

    "간지럼 참기 당첨!"… 신라의 '벌칙 주사위'

    조선 시대에 월지 주변은 이미 폐허가 됐고 방치된 호수에는 기러기(안·雁)와 오리(압·鴨)가 몰려들어 '안압지'란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75년부터 발굴 조사한 결과 '월지'라고 쓴 토기 파편 등이 나와 신라 때 명칭이 월지라는 것을 알게 됐고, 2011년 옛 안압지를 '동궁과 월지'라는 이름으로 바꿨습니다.

    월지와 그 주변에서 나온 유물은 모두 3만여 점이나 됩니다. 무덤에서 출토되는 부장품용 유물과는 달리, 월지 유물은 상당수가 실생활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이에요. 문고리나 옷걸이, 거울, 가위, 빗, 그릇부터 나무배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하죠. 순금 장식도 숱하게 나왔습니다.

    유물 중 목간(글을 적은 나뭇조각) 200여 점도 흥미로워요. 음식을 담은 항아리에 품목과 날짜를 적어 끈으로 묶어 둔 목간이 발견됐는데요, 가오리·돼지·노루·전복 등 고기 종류가 적혀 있습니다. 이 고기를 항아리에 담아 발효시켜 젓갈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종의 출퇴근 카드 역할을 했던 목간도 있습니다.

    또 유명한 것은 14면 나무 주사위인 '주령구'입니다. 주령구를 굴려 거기 나온 벌칙을 수행하며 연회의 흥을 돋우었다고 해요. 삼잔일거(세 잔을 한 번에 마시기), 금성작무(노래 없이 춤추기), 중인타비(여러 사람 코 두드리기), 농면공과(얼굴 간지럽혀도 참기) 같은 재미있는 벌칙이 적혀 있어 당시 놀이 문화를 짐작하게 합니다. 주령구는 보존 처리를 위해 건조하던 중 기계 오작동 때문에 그만 불타 버리고 말았는데, 다행히 사진과 실측 자료가 있어서 복제품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기록이란 이렇게 중요합니다.
     월지를 만든 신라 30대 임금 문무왕.
     월지에서 발굴된 금동판 불상. /문화재청
     1975년 월지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나무배를 인부 수십 명이 옮기고 있는 모습.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월지에서 발굴된 14면 나무 주사위 주령구의 복제품. /국립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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