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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누리길 7코스에서 부터 9 코스
    평화누리길 2016. 9. 18. 16:44

    평화누리길 7코스, 8코스, 9코스 자저거 라이딩

    지난 9월 12일 평화누리길 6코스를 가보면서 그곳 성동리에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은 월요일이라 휴관이기에 다음에 찾아가려 했다가 9월 16일 그곳을 찾아가려고 했다.

     

     

    아침 6시경 자전거로 출발준비를 끝내고 일단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까지 자전거로 그곳까지 갔다. 다시 대곡역에서 문산방면으로 환승하고 가다가 금륭역에 하차하고 그곳부터 자전거길로 금릉 습지공원을 따라 오두산 통일전망대까지 갔다. 시계를 보니 9시경이 되었다.

     

    9시부터 그곳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인데 그 시간이 잘맞았다. 그곳을 한 시간 동안 이북 쪽을 보기도했으나 안개가 끼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전시관에 전시된 사진이나 설명문을 보았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과 만나 활짝웃는 사진이 있었으나 지금생각하면  김정일의 동상이몽의 웃음에  우리대통령들이 속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곳 전시장 안에는 전날인 추석명절에 이북 실향민들이 합동제사를 했던 제단과 정당에서 보낸 화환들이 즐비했다. 고향이 한발에 닿을 것 같은 곳에 가보지못한 실향민들에게 마음속으로 위로를 보냈다.

     

    그곳 방문을 마치고 평화누리길 7코스 출발점인 성동리 사거리에서 10시에 출발했다. 처음에는 이정표를 보고 갔으나 4거리를 지나면서 이정표가 보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반구정을 물어가며 갔다. 반구정에 도착했을때는 11시 30분이되었다. 




















    평화누리길 8코스는 출발점인 반구정에서 오후 2시 10분경에  출발했다. 조금가다보니 임진강역이 보였다. 그곳에는 도착하니 많은 관광객이 보였다. 그곳에 자전거를 타고 온사람들이  있어 물어봤으나 자기도 잘모르겠다고 했다. 다시 길을 찾아 가니 평화누리길이란 깃발이 보였다 그것을 딸아 갔다. 논에는 벼들이 익어 황금물결을 이루었다. 석화정에는  오후 2시5분에 도착했다.








    반구정(伴鷗亭) 은 경기도문화재자료 12호이다.  이 반구정은 황희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곳이다. 임진강 기슭에 세워진 정자로 낙하진에 인접해있어 원래는 낙하정(洛河亭)이라 했다. 선생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그를 추모하는 8도의 유림들이 유적지로 수호하여 내려왔으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때 모두 불탔다. 그뒤이일대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정자를 복원해오다가 1967년 개축하고 1975년에는 단청과 축대를 손보았다. 그후 1988년 유적지정화사업일환으로 반구정과 안지대등을 목조건물로 새롭게 개축했다. 정자내부에는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미수허목 선생이 지은 반구정기(伴鷗亭記) 현판이 걸려있는데 당시 정자주변의 풍광이 잘 묘사되어있다.

     





    방촌 황희(厖村 黃喜) 정승은 1363~1452 사람으로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정치가로 청백리의 표상이다. 초명은 수로(壽老), 호는 방촌(厖村)이며, 본관은 장수(長水) 이다. 1363년(공민왕 12) 개성 가조리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머니 용궁김씨가 그를 잉태 했던 열 달 동안 송악산 용암폭포에 물이 흐르지 않다가 그가 태어나자 비로서 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한다. 1938년 진사시(進士)시험에 합격하고 1389년(창왕 1) 문과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조선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추천으로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고 그후 직예문춘추관 · 사헌감찰 · 우습유 · 경기도도사를 역임했다. 1416년 이조판서로 세자 폐출을 반대하여 공조판서로 전임되었으며 이어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다 1418년 忠寧大君 世宗)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庶人)이 되고 교하(交河)로 유배되었다가 남원으로 이배(移配)되었으나 1422년(세종 4)에 풀려나와 좌찬참에 기용되고 강원도관찰사 · 여|조판서 · 우의정 등을 역임 하였다 1427년 좌의정에 올랐고 1430년 투옥된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 되었으나 이듬해 복직, 영의정에 올랐다. 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끼지 19년간 영의정에 재임 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소생의 천역(賤役)면제 등 업적을 남겨 세종으로부터 가장 신망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장상전망대에서 본 모습






    평화누리길 9코스는 율곡탐방로라 하며 오후 2시 10분경에 화석정에서 출발했다.

    화석정은 원래 고려 말의 유학자인 길재(吉再)가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는데 사후 그를 추모하여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폐허가 되었다가 율곡 이이의 5대조인 강평공 이명신(康平公 李明晨)이 세종 25년(1443년)에 정자를 세우고 1478년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중수하였다.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명명하였으며, 이이 때에 이르러 다시 중수된 유서깊은 곳이다.

    정자 주변에는 느티나무가 울창하고 그 아래 임진강에는 밤낮으로 배들이 오락가락 하였으며 밤에는 고기잡는 등불이 호화찬란 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임진강을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고 느티나무 몇 그루만이 그 시절을 증명해주고 있어 쓸쓸하다. 율곡 선생은 평소 정자에 제자들과 함께 기둥과 서까래 등에 들기름을 반질반질하게 먹여 두었다고 하는데, 훗날 임진왜란(선조 25년, 1592년)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당시(4월 29일 밤) 억수같은 폭포속에서 강을 건널 때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질러 무사히 배가 강을 건넜다고 전한다.   

    율곡선생은 국사의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여생을 이 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내면서 시와 학문을 논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勅使) 황홍헌(黃洪憲)이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설도 있다 임진왜란때 불 타 없어져 80여년간 터만 남아있는 것을 현종(顯宗) 14년(1673)에 율곡선생의 증손 이후지(李厚地) . 이후방(李厚坊)이 다시 세웠으나 한국전쟁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화석정은 1966년 파주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한 것으로 건축양식은 팔작지붕 겹처마에 초익공(初翼工) 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랐다. 건물의 정면 중앙에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 있으며, 내부 뒷면에는 율곡선생이 8세때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八歲賦詩> 가 걸려있다. 임진강이 휘돌아 흐르는 언덕에 세워진 화석정의 전망은 아름답기 그지 없다.

     


    황포돗대포구에는  4시 20분경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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