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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아버지 백선엽, 정권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충성했다”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2. 7. 16. 07:34


    백선엽 장군 2주기 맞아 한국 온
    장녀 백남희의 못다한 이야기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들어선 백남희씨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아버지가 막판까지 출퇴근하던 사무실이 있던 곳이라 내게도 남다른 장소”라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1991년 백선엽 장군이 미국 코네티컷에 사는 큰딸 집을 찾았다. 당시 백 장군의 나이 71세. 그는 다짜고짜 딸에게 “내일 당장 플로리다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으라”고 했다. “밴 플리트 장군이 벌써 99세인데 누워 계신다고 하니 지금 찾아봬야 한다.”

     

     

    ‘6·25전쟁 영웅’인 백 장군은 다부동 전투 등 전쟁의 국면을 좌우했던 주요 전투마다 승리를 거뒀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에 나서 가장 처음 평양에 발을 들여놨고, 빨치산 토벌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쟁이 터졌을 때 대령이었던 그는 1950년 7월 준장이 됐고, 초고속 진급을 거듭해 1953년 1월 대한민국 군 역사상 최초로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이때 백 장군의 왼쪽 어깨에 별 넷 계급장을 달아준 사람이 제임스 밴 플리트(1892~1992) 미 8군 사령관이다. 미군의 시스템과 정신을 알려준 밴 플리트는 이승만 전(前) 대통령으로부터 ‘한국군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았다. 밴 플리트는 백 장군을 각별히 아꼈고, 훗날 회고록에서 백 장군에 대해 “아주 특별하고 존경할 만한 최고의 사령관”이라고 썼다.

     

     

    그런 밴 플리트 장군이 곧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미국행에 나섰던 것. 주소도 전화번호도 몰랐지만, 부녀(父女)는 무작정 밴 플리트의 고향인 플로리다 포크 시티에 가서 집을 찾아냈다. 밴 플리트 장군은 40년 전 한국 전선에서 동고동락했던 젊은 한국군 지휘관을 한눈에 알아봤다. “아버지가 경례를 하자마자 두 분이 아무 말 없이 서로 끌어안고 울었어요. 잘 지냈냐, 오랜만이다, 이런 말도 없이 부둥켜안고 한참 울기만 했어요. 저는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그때 처음 봤어요.”

     

     

    고(故) 백선엽(1920~2020) 장군의 장녀 백남희(74)씨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나눈 두 전우에게 말은 필요 없었다”며 “아버지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자 한미 동맹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고 했다. “사실 제겐 죄송하고 후회스러운 기억이에요. 밴 플리트 장군님이 점심에 스테이크를 먹고 가라고 하셨는데, 장군님 건강이 안 좋으시니까 제가 아버지한테 빨리 가자고 재촉했거든요. 두 분이 좀 더 같이 보낼 시간을 드렸어야 했는데…. 지금 와서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파요.”

    1953년 봄, 백선엽(왼쪽) 장군이 한복을 입은 딸 백남희씨와 찍은 사진. / 백남희씨
     

    남희씨는 백 장군이 생전 “복덩이”라며 총애한 딸이다. 외부에 나서길 꺼려 한 아내를 대신해 각종 행사에도 대동했고, 남희씨도 매니저 역할을 자처했다. 2남2녀 중 맏딸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유족 대표로서 추모 활동을 펼치고 있다. 백 장군 2주기를 앞두고 지난달 귀국한 그는 경북 포항에서 열린 백 장군 흉상 제막식에 참석했고, 한미동맹재단 조찬기도회, 다부동 참전용사 위로 만찬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지난 8일 경북 칠곡군에서 열린 추모 행사에는 국방부 장관, 국가보훈처장, 육군참모총장, 한미연합사령관 등 180여 명이 참석했다. 작년보다 2배 많은 인원이다. 백 장군이 2년 전 별세했을 때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애도 논평도, 조문도 하지 않아 논란이 됐다. 지난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만난 백씨에게 이 질문부터 던졌다.

    ◇“文정권이 홀대했다고 섭섭해할 분 아냐”

    -많이 서운했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안 아팠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렇지만 아버지는 평생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켰고, 한미 동맹을 굳건히 해서 전쟁 없는 환경에서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데만 집중하셨어요. 역대 대통령 중 한 분이 섭섭하게 했다고 해서 서운해하실 분이 결코 아닙니다. 저 역시 담담했고요.”

     

     

    -나라 지킨 영웅을 대하는 태도가 정권에 따라 달라지는 건 문제 아닌가요?

    “아버지는 생전 어떤 정권이나 대통령이 아니라 오직 대한민국에 충성했어요. 정치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으셨고요. 세상 순리는 저울과 같다고 하셨지요. 왼쪽, 오른쪽으로 무게가 움직이지만, 결국은 치우치지 않게 중심을 잡기 마련이라고요.”

     

    -일제강점기 20대 초반 나이에 만주군 간도특설대에 배치됐다는 이유만으로 백 장군을 ‘친일반역자’로 매도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아버님은 1920년생이에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없었던, 조국이 없었던 땅에서 태어나신 분입니다. 나라를 뺏긴 뒤 태어난 식민지 조선인이었고, 일본의 힘이 무엇이고 단점이 무엇인지를 주시하며 일본을 극복하려 했던 세대입니다. 그들이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와 은행, 기업을 세우고 군대를 만들었어요. 지금의 시각으로 그 시절을 재단하면 안 됩니다. 아버지는 목숨 걸고 6·25전쟁을 지휘하며 나라를 지킨 분이에요. 늘 자살 총을 지니고 다니신 걸 저는 기억합니다. 나라가 없으면 본인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을 지킨 분이 저희 아버지 백선엽 장군이에요.”

     

     

    -일각에선 백 장군이 만주군 간도특설대에 몸담고 우리 독립군을 ‘학살’했다는 주장을 합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아버지께 여쭸더니 ‘1943년부터 간도특설대에 복무했지만 독립군과 전투 행위를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하셨어요. 그럼 왜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항변하지 않으시냐 했더니, 그건 내가 밝히지 않아도 역사가 밝힐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백 장군은 생전 회고록에서 “내가 간도특설대로 발령받아 부임한 1943년 초 간도 지역은 항일 독립군도, 김일성 부대도 1930년대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밀려 모두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고 없을 때였다”고 말했다.

    ◇다정다감한 내 아버지, 백선엽

    세상을 떠난 백 장군이 조국에서 받은 대접은 참담했지만, 미 백악관과 국무부, 전 주한미군 사령관들은 일제히 애도 성명을 냈다. 전·현직 주한미군 최고 수뇌부 8명이 전례 없이 한국군 전쟁 영웅을 기렸다. 백 장군 생전 그를 한미 동맹의 상징이자 ‘살아있는 전설’로 예우해온 미군은 ‘한국의 조지 워싱턴’ ‘위대한 군사 지도자’라는 최고의 헌사를 바쳤다.

     

     

    -백 장군은 어떤 아버지였습니까.

    “다른 분들에겐 무서운 장군일지 몰라도, 제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는 자애로운 분이었어요. 현역 장군일 땐 퇴근하면 대문에서부터 ‘남희야!’ 하고 들어오셨죠. 원래 제 위로 언니, 오빠가 있었는데 둘 다 아기 때 세상을 떠났어요. 그래선지 아버지는 늘 저를 복덩이라 부르고, 첫사랑이라고 하셨어요. ‘널 사랑하는 건 무조건의 사랑이야’라고 하셨죠. 다만 어딜 가자는 약속은 단 한 번도 지킨 적이 없었어요. 워낙 바쁘시니까 아버지가 그런 약속을 해도 기대는 안 했어요.(웃음)”

    백남희씨가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조형물을 배경으로 섰다. 백씨는 “6·25전쟁 50주년을 기념해 지난 2003년 아버지 백선엽 장군 주도로 3년 만에 완성한 작품”이라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어릴 땐 원망도 했겠네요.

    “한 번도 원망해본 적 없어요. 아버지는 늘 자랑스러운 존재였죠.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행사가 있으면 저를 꼭 데리고 다니셨어요. 밤에 미군 장군들이 오면 비행장 나갈 때도 자는 저를 깨워서 데리고 나가셨으니까요.”

     

     

    -전쟁 중 아버지에 대해 기억나는 일화가 있습니까.

    “워낙 어릴 때라 전쟁의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전선으로 뛰쳐나간 아버지가 10개월 만에 부산으로 찾아왔는데 처음엔 멀뚱거리면서 보다가 곧 달려들어 품에 안겼다고 해요. 아버지의 전쟁 중 업적은 대부분 책에서 읽거나 다른 분들의 전언으로 들었어요. 궁금한 게 있어서 그 내용에 대해 여쭤보면 늘 먼 하늘을 쳐다보시며 답을 해주셨지요.”

     

     

    -일요일에도 새벽에 출근하셨다면서요.

    “6·25전쟁이 일요일 새벽에 북한의 기습을 받아 시작됐잖아요. 만약 대한민국에 전쟁이 또 일어난다면 반드시 일요일에 터질 거라고, 일요일에도 새벽 6시 30분이면 출근하셨어요. 부하들에게도 일요일에 일은 안 하더라도 아침에 일단 사무실에 들렀다 가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유명한 명승고적보다 (나의) 발길을 끌어들였던 곳은 전쟁터’라고 회고록에 쓰셨지요. 1960년 이후 10년 동안 대만·프랑스·캐나다 등 해외 주재 대사 시절에도 외국 전쟁터를 다니셨다던데요.

     

    “노르망디, 독일 라인강변, 워털루 등 쉬는 날마다 전쟁터를 찾아다녔어요. 저는 중·고등학생 때였는데 너무 재미없어서 투덜거리면서 따라다녔죠. 그런데도 아버지는 너무 신이 나셔서 라인강은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유럽의 헤게모니를 다퉜던 중요한 전쟁터고, 노르망디는 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승부가 갈렸던 곳이라고 세세하게 설명을 했어요. 덕분에 유럽의 모든 전쟁터를 다 가봤어요 제가(웃음).”

    백 장군을 10여 년간 보좌했던 이왕우 예비역 대령은 “장군님은 바둑·화투·장기·포커 등 잡기를 전혀 못했다. 유일한 취미가 독서였다”며 “특히 전쟁사를 읽었고, 읽은 뒤엔 그 현장을 직접 가봐야 직성이 풀렸다. 천상 군인”이라고 했다.

    ◇“진짜 영웅은 내 손가락 따라 말없이 싸운 장병들”

    2주기 추모 행사가 열린 경북 칠곡 다부동은 백 장군을 상징하는 곳이다. 당시 윌턴 워커 장군은 백 장군에게 “다부동에서 패해 전선이 후방으로 밀리면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한다”고 했다. 1950년 8월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30세였던 백선엽 1사단장은 후퇴하는 한국군을 가로막고 “미군은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며 장병들을 독려했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백 장군은 그의 저서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에서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는 하천을 이뤘다. 시체가 풍기는 냄새로 숨을 쉴 수도 없었다”고 기록했다.

    1950년 10월 평양 시가지 진입을 앞두고 작전을 논의하는 백선엽 장군(왼쪽). / 조선일보 DB

    그가 낙동강 최후 방어선을 지켜내지 못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다. 병력 8000명으로 북한군 2만여 명의 총공세를 한 달 이상 기적적으로 막아낸 덕분에 유엔군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후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입성했고, 1·4 후퇴 뒤엔 서울을 최선봉에서 탈환했다.

    2020년 7월 “전사한 전우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장군의 유지에 따라 6·25전쟁 8대 격전지에서 퍼온 흙이 장군의 유해와 함께 매장됐다. 이때 참전 노병 등과 함께 격전지 흙을 뿌린 할머니가 있었다. 19세에 결혼하자마자 다부동 전투에서 남편을 잃은 김임선(92) 할머니. 백남희씨는 “2019년 아버지 모시고 다부동 행사에 갔다가 김 할머니를 처음 만났다”며 “사연을 여쭤보니 가슴이 너무 아파서 매년 한국 올 때마다 찾아뵙는다”고 했다.

     

     

    -어떤 사연인가요.

    “결혼 9개월 만에 남편이 징집돼 전장에 나갔는데, 수십 년 동안 전사자 통보도 못 받고 생사도 모르고 살았대요. 시어머님은 전쟁 중 이분 눈앞에서 공산당 총에 맞아 돌아가셨고, 아이도 없이 평생 시아버님을 모시고 살았답니다. 1998년 50년 만에 남편이 다부동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대성통곡하셨대요. 이분 손 붙잡고 저도 한참을 울었어요. 남편 시신은 못 찾았지만 백 장군 무덤에 다부동 흙을 뿌려주실 수 있겠냐고 부탁을 드렸지요.”

     

     

    -백 장군에겐 그만큼 다부동이 의미 깊은 곳이었네요.

    “다부동을 뺏기면 대한민국을 뺏긴다는 걸 알고 계셨어요. 6·25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가장 희생자가 많았던 곳입니다. 지프를 타고 사단본부를 나설 때, 아버지는 전우들의 시신을 보고 눈물을 감추려고 하늘을 보셨다고 했어요. ‘전쟁 영웅은 내가 아니다. 진짜 영웅들은 내가 가리키는 손가락 방향을 그저 말없이 따라 나가 싸웠던 장병들’이라고 누차 말씀하셨지요. 김 할머니처럼 절절한 사연을 품고 있는 한 분 한 분이 모두 전쟁 영웅이지요. 아버지는 스러져간 전우들과 함께 다부동에 묻히고 싶어 했어요. 여건이 안 돼 포기하셨지만요.”

     

     

    -따님에게 별도로 남긴 유언이 있었나요.

    “아버지가 입원하시고 5개월간 제가 같이 있었어요. 그때 당부하셨습니다. 유해를 바로 묻지 말고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먼저 들러 전우들이 묻힌 장소를 돌면서 인사하게 해달라고요. 그런 다음 경기도 평택의 미군 부대를 찾아서 한미 동맹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해달라고 했어요. 두 곳을 꼭 먼저 갔다가 대전 국립현충원에 묻히고 싶다고 하셨는데, 주변 사람들 반대로 결국 들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저는 아버지 유언을 지키지 못한 불효자이자 죄인”이라며 인터뷰 중 눈물을 흘렸다.

    백선엽 장군 2주기 추모식이 열린 8일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비에서 백 장군의 딸 백남희씨가 추념사를 하고 있다. /김동환 기자

    ◇박정희 대통령 구명 과정 처음 밝힌 딸

    백 장군은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군 내부 남로당 숙청 분위기 속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구명(救命)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남희씨는 이 과정에 대해서 새로운 얘기를 들려줬다. “본래 남로당 가담 혐의자 4000여 명 가운데 12명이 최종 사형판결을 받았고, 그중 한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12명 모두 1949년 총살당할 운명이었으나 박 전 대통령만 극적으로 살아남았지요. 아버지께 그 과정을 여쭤본 적이 있었어요.”

     

     

    -왜 박 전 대통령만 구명한 건가요?

    “아버지는 12명의 사형 집행 예정자들을 한꺼번에 불러서 면담하셨답니다. 당신들 중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 사람은 나를 찾아오라고 하셨고, 유일하게 아버지를 찾아온 분이 박정희 당시 소령이었어요.”

    백 장군을 찾아온 그는 긴 침묵 끝에 ‘살려달라’고 했고, 백 장군은 “그렇게 해봅시다”라고 말했다. 육군 최고 지도부에 그의 감형을 요청했고, 결국 박정희 소령은 풀려나 목숨을 구했다. 백선엽은 군복을 벗게 된 그의 생계를 염려해 정보국 안에 민간인 신분으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백선엽 회고록을 쓴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은 “백 장군 인터뷰를 하면서 그에게 왜 박정희만 살려줬냐는 질문을 던졌지만 ‘나도 잘 몰라’ 하고 넘어갔다. 집요하게 물으면 내놓는 대답이 ‘내 이름에 착할 선(善)자가 있잖아’였다”며 “미세한 연결고리 하나가 빠져있어 궁금증이 남아있었는데 드디어 풀렸다. 우연이 아닌 노력에 의한 구명이었다는 것, 마지막 기회를 백 장군이 먼저 줬다는 것이 흥미롭다”고 했다.

    1951년 3월 서울을 탈환한 국군 1사단 사령부로 도쿄 유엔군 맥아더 총사령관이 예고 없이 방문해 백선엽 사단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조선일보 DB

    ◇미군이 존경하는 한국군인

    6·25전쟁 초기 한국군을 ‘민병대’ 취급했던 미군도 백 장군에게만큼은 존경심을 표했다. 역대 주한미군사령관들이 백 장군을 향해 ‘존경하는 백선엽 장군’이라는 경칭을 붙이는 게 전통이 됐다. 백 장군은 생전 “내 자신을 돌아볼 틈도 없이 분주하고 경황 없이 뛰어온 세월이었다”며 “가족을 돌보지 못했다는 점이 가슴에 아프게 와 닿는다. 아내와 아이 넷을 둔 가장으로서 후한 점수를 받지 못할 만큼 가정에 신경 쓰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남희씨 생각은 달랐다. “여섯 살 때 ‘너에게 물려줄 것은 없지만 네가 역경에 처했을 때 내 이름을 말하면 사람들이 너를 도와줄 수 있게 되길 바란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어요. 그땐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그 깊은 뜻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린 딸에게 자랑을 늘어놓으신 게 아니라, 훗날 국민들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맹세를 저한테 하신 것 같아요. 책임과 명예를 지키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었던 거죠.”

     

     

    -어릴 때 한국을 떠났는데요.

    “아버지가 1961년 프랑스 대사로 가면서 경기여중을 3개월 다니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후 외국에서 10년 공부하고 미국에서 결혼했지만 한 번도 대한민국을 떠났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목숨 걸고 지킨 조국이고 제가 태어난 모국이니까요.”

     

     

    -아버지가 후손들에게 어떤 인물로 기억되길 바랍니까.

    “제가 바라는 건 없습니다. 진실 그대로만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역사가 밝혀줄 거라고 아버지 스스로 말씀하셨던 것처럼, 지금의 오해들도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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