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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한민호님의 글을 읽고 공감하여 올려놓습니다. 안경넘어로 글을 읽어가며 베낀글이기에 오타및 오자가 있을수있음을 미리 밝혀 둡니다. 2022년 11월 4일
한민호님은 현 공자학원 실체 얄리기 운동본부 대표. 서울대학교 역사 교육과를 졸업하고 8년간 중학교 역사교사로 일하다가 제37회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공직의 길에 들어섰다. 문화체육관광부 체육 정책관, 미디어 정책관 등을 역임했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대미·대일외교,원전폐기등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2019년 10월 파면 되었으나 2022년3월,파면 처분취소 청구행정소송에서 승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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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의 대가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 모른다. / 한민호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주먹만 한 딱딱한 눈덩이를 뭉쳐야 한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일정한 정도로 자본을 축적해야 본격적인 발전을 이룰 수가 있다. 경제학에서 ‘원시적 자본 축적’이라 부르는 것이다.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선진국은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 자본을 축적했지만,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독일이나 일본은 정부가 나서서 단기간에 강압적으로 국가의 역량을 집중시켜 산업화에 성공했다. 소련은 더욱 폭력적으로 그 일을해냈는데, 그 과정에서 20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1970년대 전반까지도 북한의 경제력이 우리를 앞서 있었던 바, 국가총동원체제가 갖고 있는 힘 덕분이었다
평균적인한국인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이하 수시로 ‘그’라 약칭한다)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고 흔쾌히 그러마고 답했는데 막상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으니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시실을 절감했다. 일제 때 일본 육사를 나와 관동군 장교로 근무했다. 해방 후 남로당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5·16 군사혁명을 일으켰다, 개발독재로 한국경제를 기적적으로 발전시켰다, 10·26쿠데타로 서거했다. 누구나 아는, 이게 다 였다. 그래서 글을 못 쓰겠다고 하려다가 내가 평균적인 한국인 정도의 지식은 갖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면 ‘평균 적인 한국인’으로서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를 글로 정리하고 동시대인들과 공유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박 대통령은 1917년, 한일합방 된 지 7년 뒤에 일본제국 신민으로 태어났다. 1945년, 그가 28세 때 우리는 해방을 맞았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그는 33세였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을 일으켰을 때 그는 44세였다. 1972년 10월 유진을 선포했을 때는 55세였다. 1979년, 측근의 흉탄에 쓰러졌을 때는 62세였다. 그는 일제 때 태어나 온몸으로 대한민국 현대사를 살아냈다. 그를 모른다는 것은 우리 현대시를 모른다는 것과 같다. 나아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 모른다. 그래서 애써 일궈낸 기적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오판을 히곤 한다. 이 글은 반성문이다.
개인적 기억
1968년 12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했다. 당시 나는 충북 오지의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우리 집은 학교가 있는 읍내에서 10여 리를 더 가야 했는데 버스요금은 5원이었다. 나는 그걸 아끼느라 등하교를 걸어서 하곤 했다. 어느 날이었던가. 나는 국민 교육현장을 외우려 애쓰며 집까지 걸어갔다. 아마 숙제였던 모양이다. 내 나이 50이 넘어서야 그게 해방 이후 최고의 명문名文이란 생각이 들어 수시로 암송하곤 한다.
1977년 12월 22일 대한민국은 수출 100억 달러 목표를 달성한다. 당시 평택고등 학교 1학년이었던 나도 그 뉴스를 듣고 감격에 겨워 혼자 밤히늘을 바라보며 박정희 대통령께 감사했다.1979년 10월 27일, 11월 7일로 예정된 예비고사를 앞둔 고3 입시생으로 한참 쫓기고 있었는데 그가 흉탄에 서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80년 3월 대학에 입학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서울의 봄’ 시위대에 휩쓸려 다니다가 휴교령을 맞았고 운동권 지하서클에 들어갔다. 그때 처음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일제 때 일본군 장교로 근무했으며, 이름도 다카기 마사오 (高木正雄)였다는 사실을 들었다. 지금까지 속았다는 사실에 분노했고 후일 노무현이 얘기했듯이 “대한민국은 친일피들이 만든 부정한 나라”라는 잘못 된 관념에 빠졌다.
다카기 마사오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일제 때 청년 박정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와 당시 조선인들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 일제는 우리를 강제로 ‘식민지’로 만들고 억압, 수탈, 착취한 악마였던가? 우리는 그렇게 배웠지만, 아니다. 일제는 우리를 자기들과 일체화하려 했다. 일본에서 시행하던 제반 제도를 그대로 조선반도에서 시행했다. 식량과 토지를 수탈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징용공들은 노예노동을 한 게 아니라 제값을 받고 일본인과 같은 조건에서 일했다. 일본군 헌병이나 경찰이 우물가의 소녀를 납치해서 성노예로 부리는 일은 없었다. 합병 이후 문맹자가 많은 조선인들에게 조선어 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한 건 조선총독부였다. 조선왕조가 지배할 때에 비해 조선인들의 생활은 제도와 실질 모두 눈부시게 개선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1945년 일제의 해빙에 이르는 36년 동안 조선인 대다수는 서서히 일본 국민으로 변해 갔다. 박시춘이 작곡하고 남인수가 부른 ‘감격시대’ (1939)의 가사는 청춘 예찬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일제가 욱일승천의 기세로 뻗어나가던 분위기를 반영한다. 2절에 나오는 희망봉은 아프리카의 희망봉이다.
바다는 부른다 정열이 넘치는 청춘의 바다여 깃발은 펄렁펄렁 바람세 좋구나 저어라 저어라 저어라 저어라 바다의 사랑아 희망봉 멀지 않다 행운의 뱃길아
이재호가 작곡하고 백년설이 불러 크게 히트한 ‘대지의 항구’와 ‘복지만리’는 영화 ‘복지만리 福地萬里'(1941)의 주제가였다. 여기서 ‘복지’는 만주였다. 노래 ‘복지만리’의 가사를 보면 당시 조선인들이 만주에 대해 품었던 기대와 동경을 느껄 수 있다.
달 실은 마차다 해 실은 마차다 청대콩 벌판 위에 헤이 청노새는 간다 간다 저 언덕을 넘어서면 새 세상의 문이 있다 황색 기층 대륙 길에 어서 가자 방울소리 울리며
역시 이재호가 작곡하고 진방남이 노래한 ‘꽃마차(1942)는 어떤가?
노래하자 하루빈(=하얼빈) 춤추는 하루빈 아카시아 숲속으로 꽃마치는 달려간다. 하늘은 오렌지 색 꾸냥의 귀걸이는 한들 한들 손풍금소리 들려온다 방울소리 들린다
1940년, 당시 23세의 피 끓는 젊은이였던 박정희가 문경보통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만주제국 육군군관학교에 저12기생으로 입교했을 때 조선의 분위기가 그러했다. 정일권 백선엽을 비롯한 뜻있는 청년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박정희처럼 만주군관학교 또는 그 전신인 봉천군관학교(2년제)를 나왔다. 이들이 해방 이후 한국군의 주역이 되었고,6·25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했다.
박정희는 그학교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42년에 일본육사3학년으로 편입했다. 1944년에 일본 육시를 졸업하고 그해 7월 1일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1945년 7월 중위로 진급하고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나이 겨우 28세 때였다. 관동군 소속 일본군으로 근무하면서 독립군을 토벌한 일은 없었다. 당시 그곳에 독립군이 존재 하지도 않았고, 관동군은 중공군 팔로군과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박정희가 비록 일본군 장교였지만 독립군을 토벌한 적은 없다”며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 행적’을 변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쓰럽다. 당시 박정희도 ‘감격시대’, ‘복지만리’, ‘꽃마차’를 듣고 부르던 대부분의 조선인들처럼 생각하고 살았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그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손쉽게 ‘친일파’라고 매도할 수 있는 것인가.
일본은 1867년 메이지유신 이전에 이미 조선보다 월등한 국력을 가진 나라였고, 개항 이전에 이미 난학을 통해 서양 문물을 도입하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의 님하를 막으려는 당시 세계 최깅국이었던 영국과 미국의 후원 히에 1894년 일청전쟁, 1905년 일러전쟁에서 승리한다. 1910년 조선을 병합했다. 제1차 세계대전 (1914-1918) 때도 영국 등 협상국 편에 서서 전승국의 일원이 되었다.1922년에는 세계 최초로 항공모함을 실전 배치했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 패배를 계기로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지만,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은 그 이후에도 일본의 승승장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역사는 탁류다. 지금 옳은 것이 한 세대 후에는 그른 것으로 변하기도 한다. 1945년 해방은 우리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연합군의 승리로 주어진 것이었다. 500명 내외의 광복군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적이 없었다. 해방 직후 문맹률은 80%에 달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 공무원, 경찰, 군인, 교사로 일할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다 어떤 식으로든 일제에 ‘부역’한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 빼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늦게 태어난 행운을 누리는 자의 폭거, 반일
우리는 ‘일’ 소리만 나오면 분노하는 조건반사적 반일 감정, 반일 종족 주의라는 질병을 앓고 있다. 맹목적 반일 감정은 해방 이후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모든 정권, 지식인(교수, 교사, 언론인 등)들이 나서서 시실을 왜곡하고 선전 · 선동질한 결과다. 그게 75년이다. 우리 국민 10명 가운데 8명이 “친일 잔재가 청산되지 않았다”, 절반 가까이가 “정치인과 고위공무원, 재벌 등에 친일파 후손들이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일본에 “호감이 가지 않는다”는 입징이 69.4%, “호감이 간다”는 입장은 19.0%다.2019년 2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다.
왜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죄우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이 반일 감정을 조장하면서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문재인 정부만 욕할 게 아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멀쩡한 중앙청 건물을 산산조각 내면서 쇼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친형 이상득 전 의원 등 측근 구속으로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지자 외교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굳이 독도를 찾아가서 한일 관계를 훼손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미국의 주선으로 「한· 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2015) 를 이루고 「한일 지소미아(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 협정(2016) 을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 무대에서 아베 수상을 만나면 찬바람이 돌 정도로 차갑게 대했다.
한일 간에 스포츠 경기가 벌어지면 아나운서가 나서서 “일본만은 꼭 이겨야 한다”며 반일 감정을 자극한다. 이렇게 해방 이후 우리는 일본에 대한 열등감을 떨치지 못하고 온 나라가 반일 감정을 키워왔다. 반일 감정을 확고한 국민정서로 굳어지게 한 것은 1980년 발간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다. 대한민국은 친일파들이 세운 나라어고 북한은 친일파 청산 위에 세워진 깨끗한 나라라는 게 그 책의 핵심 메시지다. 지금은 40-50대가 된 당시 젊은이들의 필독서였다.
이후 전교조를 통해 다음 세대의 모든 학생들에게 그 책의 내용이 전파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는 취임사에서 대한민국 역사에 대해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던 시대” 라고 했다. 이후에도 수시로 “독선과 부패의 역사”, “분열의 역사”, “패배의 역사”, “굴욕의 역사” 등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히는 발언을 했다. 조우석 전 KBS 이사는 그 책에 대해 “방시능 낙진落塵 이상으로 해롭다”고 누차 경고했다.
도대체 청산되지 않은 친일 잔재가 무엇이며, 친일파 후손들이 몇명이나 되고 어떻게 살기에 이런 생각들을 히는 걸까. 문재인 대통령의 부친 문용형은 일제시대에 함흥농고를 나와 흥남시청에서 농업계장을 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도 친일파의 후손인가? 우리가 일제의 지배를 받은 게 1910년부터 36년이다. 그 시대에 일제의 국민으로 태어나 일본인으로 살았던 세대를 이해하고 따뜻하게 품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 그 세대를 두고 친일파 운운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영훈 교수 말씀대로 “늦게 태어난 행운을 누리는 자의 폭거”는 저지르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국사학계의 맹성을 촉구한다
반일 종족주의와 맹목적 반일 감정을 확산·심화하는 데 우리 국사학계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 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 다니면서 학사 경고 두 번, 무기정학 1년에, 학점이 모자라 여름학기에 1학점짜리 보충수업을 듣고서야 간신히 꼴찌로 졸업한 내가 감히 우리 역사학계가 이렇게 타락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다. 우리는 36년간 일제 지배를 받고 미국의 도움으로 해방을 선물 받았다. 해방 이후 정신적으로 우리의 최대 과제는 열등감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재료가 필요했다.
첫째, “우리는 위대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일제가 아니었으면 우리도 자생적으로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는 거짓말이다. 국뽕에 취해 온갖 거짓말을 사실인 것처럼 왜곡했다. 천하의 쓰레기였던 고종을 계몽군주로 떠받들었다. 자본주의 맹아론을 열심히 설파했다.
둘째, “일제는 우리를 가혹하게 수탈, 억압했고 조선인은 노예처럼 시달렸다. 밭에서 일히는,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처녀를 일본 헌병, 순사들이 집아다가 일본군의 성노예로 삼았다. 우리 청장년을 징발해 일본 탄광에서 노예 노동을 시켰다. 쌀을 수탈하고 토지를 강탈했다”는 식으로 일제를 악마로 묘사하는 거짓말이다.
이런 거짓말을 역대 정권이 나서서 했고 국사학계가 열심히 앞장섰다. 스스로 애국한다는 감상에 젖어 역사를 왜곡했다. 나는 북한 빼고 우리가 세계에서 제일 역사 왜곡을 열심히 히는 나리라고 생각한다.
이해를 못하는 바는 아니다.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었다. 문제는 그렇게 역사를 왜곡하고 국뽕에 젖는 게 국익과 민생에 도웅이 되는가이다. 해방 이후 한 세대 30년간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그 이후 우리가 어엿한 니라로 모습을 갖춘 뒤부터는 과거를 직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노력의 싹을 자른게 1980년 전후한 좌경화 물결이다. 남북의 공산주의자들은 대한민국을 한미일 동맹에서 떼어내는 걸 적화 전략의 핵심 과제로 심았다. 반미는 국민감정 때문에 어려우니 반일을 철저히 내세웠다. 위안부 납치, 성노예설이 그래서 나왔다. 공산주의지들, 그에 부화뇌동하는 자들은 틈만 나면 반일 캠페인을 벌였다. 이렇게 반일 감정은 단단히 굳어져 갔다. 국사를 연구하고 가르친다는 자들은 일제 시대를 똑바로 쳐다보는 걸 기피했다. 비겁하고 게을렀다. 이영훈 교수 같은 분들이 목숨 걸고 진실을 외치고 있지만, 명색이 국사를 전공하고 가르치는 교수 박사라는 자들은 여전히 토론조차 기피하고 있다.
나는 역사교육과의 문제아 열등생이었다. 교단을 나와 공무원이 되었고 뒤늦게 진실의 일단을 알았고 건강한 한일 관계가 대한민국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시종일관 반일 선동을 자행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지부상소 (指斧上疏) 하는 심정으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가날픈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파면 당했다.
국사학계의 우등생들이 이제라도 진실을 직시하고 공부를 열심히 해 주기 바란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수탈한 게 아니라, 일본의 일부로 만들고자 했다. 일제하에서 조선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조선인들은 일제의 신민으로서 열심히들 살았다. 역시는 한두마디로 정리하고 단죄할수 있는 게 아니다.
일제의 조선어 정책도 싱식과 너무나 다르다. 조선어 교육을 체계적으로 시작한 게 조선총독부다. 창씨개명도 조선인의 청원을 총독부가 수용했다는 주징어 있다. 학계가 나서서 정리해야 할 문제다. 일제시대 전체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다행히 “매국노 고종”와이즈맵(2020) 같은 좋은 책도 나왔다. 거듭 국시를 공부하는 분들께, 그리고 국사학과 학생들께 호소한다. 일제 시대사를 제대로 공부하시라!
남로당원 박정희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를 압도한 것은 공산당이었다. 소련이 점령한 북한에서는 김일성 일당이 신속하게 권력을 장악하고 군사력을 커웠다. 일제가 공장과 발전소를 거의 모두 북한에 건설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북한어 남한에 비해 훨씬 앞서 있었다. 남한에서도 공산당이 조직과 여론에서 민족 진영을 훨씬 앞서 있었다. 1946년 미군 정청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찬성하는 체제로 14%가 자본주의를, 70%가 사회주의를, 7%가 공산주의를 선택했다. 공산당은 전국 각지에서 폭동과 소요를 일으키면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1946년 대구 폭동,1948년 제주 4·3폭동과 여순 반란을 비롯한 온갖 방해 공작을 극복하면서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6·25전쟁이라는 전면전에 앞서 이미 한편으로는 치열한 전쟁을 치르면서 나리를 세운 것이다.
그 과정에서 청년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담했다가 검거되었다. 당시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적 지주로서 그를 대구사범 학교에 입학시켰던 셋째 형 박상희의 영향이 컸다는 주장이 있다. 박상희는 1930년 대부터 좌익 운동에 가담했고,1946년 대구 폭동에 가담했다가 사살 당했다. 당시 박정희는 29세였다. 그 일 이후 남로당에 입당한 그는 1948년 체포되어 군에 침투한 공산주의자 색출에 협조했고, 1949년 석방되어 문관 신분으로 다시 군에서 일하게 되었다.
6·25 발발 6개월 전인 그해 12월에는 ‘연말종합적정(敵情)판단서’를 주도적으로 작성해 제출했다. 북한 남침 준비 상횡을 소상히 파익해 아군의 대책을 건의한 방대한 보고서였다고 한다. 이로보아 청년 장교 박정희가 사장적으로 공산주의에 빠졌던 것은 아닌듯하다. 33세였던 1950년 6·25 전쟁을 맞이하여 그는 국군과 함께 남으로 이동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진행된 본격적인 군내 좌익 척결을 위한 숙군 작업에도 불구하고 군 핵심부에는 북한의 간첩망이 임약했다. 당시 박정희 소령이 관여했던 조직과는 전혀 별개의 조직이었다. 거물 간첩 성시백이 만들어 놓은 조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 때문에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비상경계령 해제, 주요 지휘관의 대대적 이동, 수도권 방어부대의 재편과 이동, 차량과중화기의 대대적인 후송과 6월 24일 저녁 있었던 군수뇌부의 연회 등이 그것이다. 심지어 당시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의 전속부관 ‘라엄광 중위’는 군적에도 없던 자로서 북한군의 서울 점령 이후 잠적 해버렸다.
이후 박정희는 1950년대에 과거 남로당원이 었다는 경력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 10년 동안 그가 누구와 만났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6·25 발발 이전에 전투정보괴에서 일하면서 만난 김종필을 비롯한 육사 8기생들과 지속적인 교류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는 44세였던 1961년에 5 ·16군사혁명을 일으키고 이듬해인 1962년에 『우리 민족의 나아 갈길)을,1963년에는 『국가와 혁명과 나』를 출간했다. 한국사에 대한 본인의 이해, 새 정부의 이념과 철학, 중동과 중남미의 혁명 시례 분석, 새 정부의 비전을 밝힌 문건이다. 그가 1950년대 10년 동안 국가의 미래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고민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사실, 박정희와 그 주변 인물들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 지식인들 이었다. 박정희 본인이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일본 육사를 3등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그리고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인재들이 가는 학교였던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외로운 개척자
박정희 대통령 치세를 얘기하기 전에, 4·19 이후 1년간 대한민국이 얼마나 난맥상에 었던가에 대해 제대로 된 보고서가 필요하다는 얘기 를 하고 싶다. 중구난방 도저히 국력을 하나로 모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좌익의 준동이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5 ·16 군사혁명이 없었더라면 김일성에 의해 적화되거나 정쟁으로 밤낮을 지새우는 가난한 나라로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죄우를 가리지 않고 “후진국 중에서 산업화와 민주회를 모두 이룬 유일한 나라,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발전한 유일한 나라”라고 자랑한다. 기적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게 사실이다. 박정희 장군은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을 거쳐 1963년 12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박 대통령 취임 당시 사정은 지극히 암울했다. 1953년 휴전 이후 10년이 흘렀지만 전쟁의 상처는 여전했다. 대한민국은세계에서 가장가난한 나라중하나였다. 언제 다시 남침할지 모르는 북한은 치열하게 대남 공작을 전개했다. 야당은 틈만 나면 정부를 비판하고 정권 탈환을 노렸다. 대학생들은 철없는 구호를 외치며 정권을 흔들었다. 박 대통령은 황무지에서 폭풍우를 맞으며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히는 입장이었다.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주먹만 한 딱딱한 눈덩이를 뭉쳐야 한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일정한 정도로 자본을 축적해야 본격적인 발전을 이룰 수가 있다. 경제혁에서 ‘원시적 자본 축적’이라 부르는 것이다.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선진국은 비교적 긴 기간에 걸쳐 자본을 축적했지만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독일이나 일본은 정부가 나서서 단기간에 강합적으로 국가의 역량을 집중시켜 산업화에 성공했다. 소련은 더욱 폭력적으로 그 일을 해냈는데, 그 과정에서 20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1970년대 전반까지도 북한의 경제력이 우리를 앞서 있었던 바 국가 총동원 체제가 갖고 있는 힘 덕분이었다.
대한민국도 똑같은 과제에 직면했다. 국가의 역량을 집중시키기위해 개발독재는 불가피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부정부패도 있었고 노동자들의 희생도 있었다. 거듭 역사는 탁류다. 너도 나도 제몫을 챙기려 아귀다툼하는 것을 방치할 것이냐, 아니면 국가 권력을 동원하여 흩어져 있는 역량을 집중시킬 것이냐 선택의 기로에서 박정희는 후자를 선택했다. 무수한 적을 만들어 내고 목숨 걸고 그들과 씨울 걸 예상하면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비장한 각오가 필요했다. 3선 개헌과 10월 유신을 거치면서 측근들도 떠나갔다.
권력과 돈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의 비전을 이해하고 기꺼이 동참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됐을까? 박 대통령은 외로웠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지만, 다른 길이 없기도 했다.1974년 문세광의 저격으로 부인을 잃고 나서는 더욱 더 외로워했다.10·26으로 인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측근들의 행태를 보면 그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짐작된다.
박정희와 전두환
육사 11기를 각별히 아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 11기 200명이 경남 진해에서 입학했다. 미 웨스트 포인트를 본뜬 4년제 첫 정규 육사였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기장 똑똑한 학생들이 입학했다. 5 ·16군사혁명 당시 전두환·노태우 대위 등이 주동이 되어 육사 생도들은 혁명 지지를 선언했다. 그들은 이후 군의 중추로 성장했다. 10·26쿠데타가 발생하자 소위 12·12사태를 통해 이를 진압한 것도 그들이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대한민국은 4·19 이후의 혼란을 재현하며 죄락의 길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전두환·노태우 두 대통령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은 정치적 · 경제적 체력을 키울 수있었고, 그 덕분에 순조롭게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그런 점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퇴임한 1993년까지가 박정희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정성을 기울여 양성한 인맥이 과도기를 잘 관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 정세의 격랑을 혜쳐 나가다
박정희 대통령을 평가하려면 반드시 당시의 국제 정세를 함께 논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쉽지 않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1963년은 6·25 전쟁 휴전 이후 겨우 10년 뒤였다.1968년 대통령이 된 닉슨은 그 전부터 미국이 더 이상 세계의 경찰이 될 수 없고 베트남에서 미군은 철수되어야 하며, 아시아에서 미국의 개입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0년, 결국 주한미군 두 개 사단 가운데 저17사단을 철수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다. 1972년에는 닉슨이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과 회담했다.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미국·월남·월맹 사어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었고, 미군이 월남에서 철수했다. 1975년 4월 30일 월맹 탱크가 월남 수도인 사어공 대통령궁의 철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월남 대통령이 항복했다· 1976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선거 공약으로 내건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대통령 취임 후 곧바로 주한미군 철수 3단계안을 발표했다. 1978년 말까지 지상군 6,000명을 철수 시키고, 1982년 7월까지 나머지 지상군을 모두 철수시키되, 공군과 해군은 계속 주둔시킨다는 안이었다.
돌이켜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 기간 내내 안보 위기에 시달렸다. 북한은 1968년 1월 무장공비 31명을 침투시켜 청와대를 직접 공격했다. 미군은 철수한다고 하고 북한은 수시로 도발했다. 미국이 중국과 화해하면서 한반도를 중국에 넘기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횡어 전개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권력을 내놓고 서구식 민주주의를 하게 되면 대한민국은 사실상 무방비로 북한의 위협에 노출되는 것이었다. 3선개헌과 10월 유신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은 박정희의 장기 집권에 염증내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개발독재의 필요성과 국민의 민주화 욕구가 정면으로 충돌한게 1980년의 광주 사태였다. 광주 사태에 북한군이 개입했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광주 사태를 타기(唾棄)해서도 신성시해서도 안 되는 이유다. 한국민의 병존하기 어려운 두 욕구가 충돌한 것이었다.
한편, 박정희시대의 경제발전을 논할 때 미국과 일본의 호의를 잊으면 안 된다. 그게 없었더라면 박정희 열 명이 있었더라도 경제발전은 불기능했을 것이다. 이 주제는 많은 전문기들이 자세히 밝힌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정도로 그치고자 한다. 우리는 이승만 을 통해 미국과 만났고, 박정희를 통해 일본과 만났다. 미국을 아버지로, 일본을 어머니로 했기에 우리가 세계사의 기적으로 태어난 게 아닐까.
역사 교과서야 말로 핵심 진지(陣地)
이 글을 쓰면서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대해 꽤 많은 문헌이 있다는 걸알게 되었다. 내가 게을러서 그 존재를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나 같은 보통사람이 박정희 대통령과 그 시대에 대해 여러 권의 책을 찾아 읽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서거한 지 벌써 43년이 되었다. 나보다 젊은 사람탬게 박정희는 그야말로 역사 속 인물이다. 게다가 정보화 시대를 맞아 현대인은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간다. 매일 새로운 정보가 쏟아진다. 과거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결국 대부분 의 한국인들은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좌피들은 일찍이 이걸 깨달은 듯하다. 그들은 역사를 장악하고 역사 교과서를 장악했다. 역사는 문화 콘댄츠의 원천이다. 좌파적 시각으로 왜곡·윤색된 역λ까 국민을 세뇌하는 영화, 드라마, 소설, 미술 등의 소재를 제공한다.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 그람시(Gramsci, Antonio)가 진지한 선전선동으로 문화적 헤게모니를 쟁취하지는 것으로 선전선동이 총이라면 역사는 총알이다.
좌파들은 역사 교과서를 장악한 동시에 각종 과거사위원회를 만들 어 역사 해석의 주도권을 공고히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시도했지만 참담하게 실패하고 국정의 동력을 잃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역사가 얼마나 중요하고 치열한 전당(戰場) 인지 모르고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싸움은 정예부대를 조직하고 정교하고 집요하게 해야 하는 일이다. 공무원 들에게 지시해서 될 일이 아니다. 결국은 백전백패다. 새 정부가 잘해 주기를 간곡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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