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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의 ‘10월 유신’은 어떻게 한국의 ‘위대한 성공’ 됐나?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2. 11. 7. 07:19

     

     
     
    박정희 대통령이 57세 때인 1974년 5월20일 , 10월 유신을 선포한 심정(心情)과 의지(意志)를 담아 쓴 휘호(揮毫)

     

     

    올해 10월17일로 ‘10월 유신(維新)’ 50주년을 맞는다. 반세기 전인 1972년 10월17일 오후 6시,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열어 오후 7시 기점으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날 대통령 특별 선언으로 국회는 해산됐고 정당·정치 활동 같은 헌법 기능도 일부 정지됐다. 다음날 계엄사령관은 8개항의 계엄포고 1호를 내렸다. “정치활동 목적의 모든 옥내외 집회와 시위 금지, 언론·출판·보도 및 방송 사전 검열, 대학 휴교, 위반자는 영장없이 수색·구속….”

    '10월 유신' 대통령 특별 선언과 전국 비상계엄령 선포를 보도한 조선일보 1972년 10월18일자 1면/인터넷 캡처

    ◇박정희는 최악 독재자 vs 최고 대통령?

    1979년 박정희가 62세로 서거(逝去)할 때까지 7년간 지속된 ‘유신 체제’가 막을 올린 순간이었다. 그해 11월21일 국민투표에서 91.5% 찬성률로 가결된 유신헌법은 반(反)민주적 독소 조항이 가득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대통령 간접선거,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선출, 임기 제한없는 대통령에 긴급조치권 및 법관 임명권 부여 등으로 초유의 ‘막강한 대통령 권력’이 탄생했다.

    야당 정치인 등에 대한 불법 감금·고문에다 1974년 1월8일부터 79년 12월8일까지 2159일동안 ‘긴급조치’가 계속됐다. 긴급조치로 처벌받은 피해자는 사망 8명을 포함해 1140명, 기소된 재판은 589건에 달했다.

     

     

    긴급조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긴급조치(緊急措置)는 1972년 개헌된 대한민국의 유신 헌법 53조에 규정되어 있던,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를 말한다.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

    ko.wikipedia.org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2022년 8월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 배석해 있다.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금됐거나 유죄 판결을 받은 본인, 가족, 상속인 등이 청구한 손해배상청구 사건 상고심을 진행했다. 긴급조치 9호는 1975년 5월 제정·선포됐다./뉴스1
     

    이 때문에 박정희의 역할을 인정하는 이들 조차 ‘유신 체제’에 대해서는 “종신(終身) 집권에 눈이 먼 박정희가 일으킨 또 하나의 쿠데타”, “유례없는 민주주의 암흑기”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최근 30여년 동안 박정희는 대통령 대상 여론조사에서 줄곧 1위를 달리고 있다.

     

    1992년 6월 여론조사에서 박정희는 ‘임무를 가장 잘 수행한 역대 대통령’ 가운데 압도적 1위(88.3%)였다. 2015년 8월, ‘해방 이후 우리나라를 가장 잘 이끈 대통령’을 물은 조사에서도 전국 남녀 2003명 중 가장 많은 44%가 박정희를 꼽았다.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압살한 희대의 독재자를 왜 가장 유능하고 위대한 대통령으로 지목할까? 박정희의 ‘유신’은 어떻게 외국의 비판적인 학자들로부터도 ‘위대한 성공’이라고 호평받고 있는 걸까? 이런 모습들은 ‘유신 체제’가 어느정도 불가피했고, 대한민국 발전에 긍정적이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북한 위협·미군 철수가 ‘10월 유신’ 재촉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10월 유신 무렵인 1970~1972년 한국의 국력은 북한에 뒤져 있었다는 점이다. 1970년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384달러)은 한국(275달러)보다 높았고, 그해 군사비 지출은 북한(7.4억달러)과 남한(3.3억달러)의 격차가 두 배 넘었다. 한국군은 소총(小銃) 조차 자력 생산 못하는 반면, 북한군은 소련 현역군 수준으로 무장돼 있었다.

    1970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75달러로 북한(384달러)보다 뒤졌으나 유신 체제 중에 역전했다.
    유신 5년차인 1976년에 한국은 국방비 지출 규모에서도 북한을 능가했다.

    1970년대를 ‘적화 통일의 호기(好期)’로 판단한 북한은 게릴라전 공격을 감행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특공대를 동원한 청와대 습격 사건, 이틀 후인 1월23일 미 해군 푸에블로호 납치, 그해 10~11월 울진·삼척 지역에 100명의 무장공비 침투가 대표적이다. 1969년 4월15일에는 미 해군 정찰기 EC-121이 북한기에 격추당해 승무원 31명이 모두 사망했다.

    1970년 6월22일 공비 3명의 서울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 사건과 74년 8.15 기념식장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의 저격 시도가 노린 표적은 모두 박정희 살해였다. 박정희는 1968년 2월 250만명 향토예비군 창설과 70년 8월6일 국방과학연구소(ADD) 출범으로 대응했다. 이처럼 당시 대한민국은 비상(非常) 상황의 연속이었다.

    평양 대동강변에 정박돼 있는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왼쪽)와 1976년 8월18일 발생한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모습(오른쪽)/조선일보DB

    동맹국인 미국은 도움은커녕 불안을 가중시켰다. 닉슨 대통령은 1969년 7월25일 괌에서 “아시아 방위는 아시아인들이 맡아야 한다”는’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을 발표하고 한국 정부의 반대에 아랑곳않고 주한미군 철수를 강행했다.

    1970년 8월 내한(來韓)한 애그뉴 부통령은 “71년 6월말까지 미군 7사단을 철수하고 향후 5년 이내에 나머지 미군도 완전 철수시키겠다”고 통보했다. 2만여명의 주한미군 제7사단은 예정보다 3개월 빠른 71년 3월27일 한국을 떠났다.

    1971년 3월27일 미군 제7사단 2만여명이 철수함에 따라 그 직전부터 한국 군이 휴전선 155마일을 방어하고 있다. 1970년대 중반 겨울 모습이다./국방부 제공
    1972년 2월 21일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베이징에서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다./조선일보DB

    미국은 그 대신 적국(敵國)인 중공과 손잡았다. 1971년 10월 중공은 정식 국제연합 회원국이 됐고, 이듬해 2월 닉슨 대통령은 주은래 총리와 5차례 회담을 갖고 ‘상하이(上海) 공동성명’을 내놓았다.

    2개 사단 이상의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해 놓고 있던 박정희로선 6.25 전쟁 당시 교전 상대국인 중공과의 화해를 위해 베트남과 한국에서 전격 철군(撤軍)하는 미국의 냉정함에 배신감을 느꼈다. 박정희는 71년 2월8일 대(對)국민 담화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의 국제 사회에서는 강력한 자주, 자립 정신이 없는 민족은 그 누구의 동정이나 지원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 한다. (중략) 정부와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자주국방의 정신을 더욱 굳건히 살려 나가는 결의와 각오를 새로이 해야겠다.”

    2022년 9월29일 충남 계룡시 계룡대 대연병장에서 열린 제74주년 국군의날 미디어데이 행사에 K-2전차가 전시돼 있다./뉴스1
    1978년 한 한국군 장교가 북한군이 비무장 지대에 파놓은 제3땅굴 안에서 손으로 지지대를 가리키고 있다./조선일보DB

    이춘근 이춘근국제정치아카데미 대표는 “달리 말하면 10월 유신의 목표는 ‘미군의 도움 없이도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국가 위기관리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한국 방위를 사실상 포기하고 한미(韓美)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국제정치 구도에서 경제 발전과 자주국방을 이뤄야한다는 ‘절박함’이 10월 유신을 촉발했다는 것이다.

    북한이 남침 준비를 당시 완료했다는 사실은, 1996년 5월22일 발레리 데니스포 러시아 외무부 아주국 제1부국장의 증언으로 확인됐다. 그는 “김일성이 75년 4월 중국을 방문해 ‘남한과 전쟁할 준비가 다 됐다’고 지원을 요청했었다”며 “김일성은 ‘(남조선과의) 전쟁에서 잃을 것은 군사경계선이며 얻을 것은 조국의 통일’이라며 당장 적화통일하려는 야심을 보였다”고 말했다.

    ◇국내 정치 보다 ‘김일성과의 대결 승리’ 노려

    유신 체제 출범의 직접적인 계기로 흔히 1971년 4월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가 꼽힌다. 박정희는 대선에서 김대중 신민당 후보에 95만표 차이로 신승(辛勝)했다. 한달 후 실시된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은 개헌 저지선을 돌파하며 약진했으나, 여당인 공화당은 서울·부산·대구 등 대도시에서 참패했다.

    1971년 4.27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박정희 공화당 후보(사진 위)와 김대중 신민당 후보의 유세(遊說) 모습/조선일보DB
     

    4년 후에는 야당의 집권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10월 유신은 박정희의 무한(無限) 집권 야욕을 충족시키려는 무모한 정치적 선택이었다는 지적이 많다. 그러나 당시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다른 분석도 나온다.

    박정희가 1970년 8월15일, 해방 25주년 기념식에서 북한의 김일성에게 “남북한 간에 어떤 체제가 좋은지 ‘선의(善意)의 경쟁’을 하자”고 제안한 게 실마리이다. 박정희는 71년 4월 대선 유세 연설에선 “나의 경쟁 상대는 야당 후보가 아니라 바로 북한에 있는 김일성이다”고 말했다.

    1971년부터 1979년까지 청와대 경제 2수석비서관을 지낸 오원철은 “북한이 1970년 11월, 1976년 완성을 목표로 석유화학공업 건설 등에 초점을 맞춘 6개년 계획을 내놓았는데, 이는 박정희 정부의 3차5개년 계획목표 연도(1972~76년)와 같았다. 1977년에는 양자 간에 결판이 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인간 박정희 인간 육영수>라는 저서를 쓴 김두영 청와대 비서관은 “박 대통령은 늘 김일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북한 보다는 우리가 잘 살아야지’하는 오기가 대통령의 언동에서 자주 비쳤다”고 했다.

     

    1972년 12월1일 서울을 방문한 박성철 북한 부수상(왼쪽)과 악수를 하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 박성철은 당시 노동당 정치위원이었다.

    1969년부터 78년까지 10년간 청와대에서 일한 김정렴 비서실장은 “남북적십자회담 경험이 유신의 결정적 요인”이라며 이렇게 증언했다.

    “1972년 5월31일과 12월1일 청와대에서 남북조절위원회 북한측 대표인 박성철 일행을 접견한 박 대통령은 북한 권력 서열 10위 내에 있는 김일성의 측근 중 측근인 박성철이 수첩에서 깨알같이 적어온 내용을 한 자라도 틀릴세라 긴장하며 읽어내려 가는 것을 보고, 북한 체제의 경직성과 김일성 유일 체제가 얼마나 강한가를 실감했다.” (김정렴, 165~168쪽)

    야당에 대한 불신도 ‘10월 유신’ 결단에 한몫했다. 1971년 대선에서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내건 ‘대중경제론’은 농업 주도 근대화론으로 박정희식(式 공업화와 산업화의 중단을 뜻했다. 야당의 ‘4대국 안전보장론’과 ‘예비군 폐지’는 북한의 국력이 우세하고, 미국이 한국에서 발을 빼는 상황에서 비현실적인 인기영합적 술수라고 박정희는 판단했다.

    1972년 10월3일 개천절 경축사에서 박정희는 “다양성을 분열로 착각하여 파쟁을 일삼는다든지, 민주제도의 ‘견제와 균형’ 원리를 비능률의 구실로 삼으려는 정략과 간계가 우리 주변에서 횡포를 부린다면, 이 모든 것은 마땅히 광정(匡正)되어야 한다”고 했다.

    유신 기간 중이던 1975년 9월1일 서울 여의도에 준공한 국회의사당. 원자재, 자본 조달, 설계 등 모든 과정을 우리 힘으로 해냈고 당시로선 아시아 입법부 건물 가운데 가장 컸다./조선일보DB

    유신 시절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은 “박 대통령께서는 돈이 들지 않는 민주주의를 해 보자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경제 발전에 쓸 돈도 모자라는데 그 알량한 ‘정치’ 한답시고 돈을 낭비하는 것에 몹시 언짢아하셨다. 그는 국력을 북한 보다 막강하고 압도적인 우위에 올려놓는 데에 국정 목표를 두었다”고 회고했다. (김성진, 67~68쪽)

    ◇수출·방위산업·중화학공업 ‘1석3조’ 달성

    결과는 어땠을까? 박정희는 유신 2년 만인 1974년 1인당 국민소득 543달러를 달성해 그해 북한(515달러)을 사상 처음 제쳤다. 한국의 군사비 지출은 76년부터 북한을 추월했다. 박정희 통치 18년(1961~79년) 동안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에서 1640달러로 뛰었지만, 북한은 195달러에서 1114달러 증가에 그쳤다.

    이런 역전승을 낳은 원천이자, ‘10월 유신’의 백미(白眉)는 중화학공업화이다. 중화학공업화는 시대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한국은 1971년 수출 10억달러 고지를 넘었으나 주력 수출품이 여전히 의류·직물·합판·가발 등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인데다, 채산성 악화로 무역 적자가 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이런 배경에서 10월 유신 선언 3개월 만인 1973년 1월12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했다. 그는 ▲1980년대 초까지 수출 100억달러, 1인당소득 1000달러 ▲총 수출품 중 중화학제품 비중 50% 초과 ▲비철금속·기계·전자·제철·조선·석유화학 등 6대 전략공업 육성 등을 약속했다.

    1970년대 10월 유신 홍보 책자. 100억달러 수출, 1000달러 소득은 10월 유신이 대표적인 구호였다.
     

    보름 전인 72년 12월28일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박정희는 “10월 유신에 대한 중간평가는 수출 100억달러를 기한 안에 달성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유신 체제의 명운(命運)과 정당성(正當性)을 100억달러 달성에 거는 정면 승부수였다.

    김세중 연세대 명예교수는 “중화학공업화는 자본·기술·경영능력이 미흡한 한국의 정상적인 성장 경로를 이탈한 파격이었다. 박정희가 ‘중화학공업 밀어붙이기(Big Push)’에 성공하려면 ‘유신’이라는 특수한 정치 체제가 필요했다”고 했다.

     

    1973년 3월 박정희는 오원철 제2경제수석 비서관을 중심으로 43명의 실무 기술관료로 중화학공업기획단을 구성했다. 미국식 시장 경제논리에 물든 관료들을 배제하고 자신의 계획을 성실히 실현할 테크노크라트로 진용을 짰다. 유신 체제는 이들이 ‘정치 바람’을 타지 않고 일하도록 모든 압력을 막아내는 장치였다.

    오원철 비서관은 “중화학공업 건설은 수출과 방위산업도 해결하는 ‘1석3조’였다”고 했다. 창원(기계), 여천(석유화학), 옥포(조선), 구미(전자), 포항(제철), 온산(비철금속) 등 6개 공업단지부터 방위산업 핵심 기지였다.

    1976년 5월 31일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이 경북 포항시에 있는 포항제철 2고로에서 화입(火入)을 하고 있다./포스코 제공

    자주 국방 강화를 위해 율곡 사업을 승인(74년 3월15일)하고 방위세를 도입(75년 7월16일)했다. 77년 6월에는 핵무기 개발에 용이한 중수로(重水爐)형 경북 월성 원전을 착공했다. 한국은 78년 9월 180km 장거리 미사일 ‘백곰’ 시험 발사 성공함으로써 세계 7번째 미사일 기술 보유국이 됐다.

    박정희는 100억달러 수출 목표를 계획보다 4년 빠른 1977년, 1인당 국민소득은 3년 앞당긴 1978년(1330달러)에 각각 이뤄냈다. 1971~77년의 6년간 한국의 연평균 수출 증가율은 43.9%로 세계사적 기록이다. 71년부터 78년까지 한국 경제와 제조업 평균 성장률은 각각 11%, 16.6%에 달했다.

     

    1977년 12월 26일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하고 한국수출산업공단에서 '수출 100억달러 기념 석찬회'가 열렸다./조선일보DB

    좌승희 박정희학술원 원장은 “중동산 두바이유가 3배 넘게 급등하는 1973~74년의 1차 오일쇼크 위기를 이겨냈다는 점에서 더욱 값진 성과”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정희의 중화학공업화 성취는 공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중단과 자신의 암살이라는 값비싼 희생을 동반했다.

    ◇“국력의 조직화로 진짜 민주주의 역량 배양”

    박정희는 1972년 10월27일 ‘특별담화문’에서 “(유신) 헌법 개정안은 능률을 극대화하여 국력을 조직화하고 안정과 번영의 기조를 굳게 다져나가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74년 10월1일 국군의 날 행사에선 “유신 체제는 공산 침략자들로부터 우리의 자유(自由)를 지키자는 체제”라며 이렇게 말했다.

    1978년 '백곰' 지대지 미사일 발사 시험발사 후 박정희 대통령이 국방부 산하 국방과학연구소(ADD) 직원들을 악수하며 격려하고 있다.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적은 자유는 일시적으로 희생할 줄도 알고, 또는 절제할 줄도 아는 슬기를 가져야 우리는 보다 큰 자유를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은 “박정희의 10월 유신 목적은 자유를 일부 제한해서라도 ‘효율의 극대화’와 ‘국력의 조직화’로 진짜 민주주의 역량을 배양하는 것이었다”며 “유신 체제에서 고통받은 민주 인사들도 자유·민주를 위해 고귀한 밑거름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10월 유신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반발을 알았으나 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나 개인은 조국 통일과 민족중흥의 제단 위에 이미 모든 것을 바친 지 오래”라며 “오늘의 성급한 시비(是非)나 비방보다는 민족의 유구(悠久)한 장래를 염두에 두고 내일의 냉엄한 비판을 바란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박정희가 유신 7년 동안 ‘청렴한 독재자’로서 솔선수범했다는 사실이다. 김정렴 비서실장은 정치회고록 <아, 박정희>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1997년 출간한 김정렴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정치 회고록/조선일보DB

    ◇비리 없고 검소하며 청렴한 독재

    “특별한 행사가 없으면 (박 대통령의) 점심은 멸치나 고깃국물에 만 기계국수였다. 육영수 여사와 나, 의전수석, 비서실장 보좌관 등 본관 식구들은 똑같이 국수를 먹었다. 장관들도 청와대에서 회의를 하는 날이면 점심은 국수였다. (중략) 박 대통령이 살던 본관 2층과 집무하던 1층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전기를 아끼려는 뜻에서였다. 선풍기는 있었지만 그것조차 돌리지 않았다. 한여름에 박 대통령은 파리를 잡기 위해 파리채를 휘두르곤 하였다.(중략) 그는 양복, 외투, 내의, 구두 등 모든 것을 국산품을 썼다.” (344~345쪽)

    10월 유신과 중화학공업의 상관관계를 10년에 걸쳐 면밀하게 분석한 연구서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을 쓴 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는 “박정희 집권 당시 율곡사업에 관련됐던 공무원들은 놀랄 정도로 청렴했고, 박정희의 청렴을 반박할 만한 근거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제5차 수출진흥 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조선일보DB
     

    박정희는 1965년 2월부터 79년 9월까지 15년간 한 달도 거르지 않고, 매월 상공부가 개최하는 수출진흥 확대회의와 경제기획원 주관의 월간경제동향회의에 총 299차례 참석했다

    매월 두 차례씩 회의를 주재하며 경제성장을 지휘하며 세밀하게 챙긴 국가 지도자는 동시대에 박정희가 유일했다. 김형아 교수의 말이다.

    “박정희는 최고사령관처럼 나라를 통치했고 그의 비서관들은 유사 전시(戰時) 내각으로 기능했다. 청와대 비서실은 고도로 중앙집권화되었고, 특정 목적에 맞추어졌으며, 탈(脫)정치화되었다. 비서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경제 및 공업 정책을 운영했다는데 있다.” (257쪽)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Newsweek)'는 1977년 6월6일자에서 한국 경제 특집 기사를 실으면서 표지에 '한국인들이 오고 있다'는 제목을 달았다./인터넷 캡처

    ◇80년대 초 자진 下野...유신은 한시적 조치?

    흥미롭게도 박정희 사후(死後)에 그가 1980년대 초 자진 하야(下野)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증언들이 꽤 나왔다. 김정렴 비서실장은 그 근거로 78년 7월 제9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의 그해 연말 인사를 제시했다.

    “박 대통령은 유신 헌법 자체의 개정 문제를 은밀히 연구시키기로 결심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그만두고 쉬고 있던 신직수씨에게 이에 대한 작업 지시가 떨어졌다. 신직수씨는 (1978년) 연말 개각 때 새로 생긴 대통령 법률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신직수씨로 하여금 유신헌법 개정 작업을 계속 담당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김정렴, 232쪽)

    김정렴 실장은 또 “박 대통령은 카터 대통령이 우리에게 통고한 주한 미 지상군의 완전 철수 시한인 82년까지 우리 손으로 만든 무기로 20개 예비사단을 완전무장시켜 놓은 다음, 자신의 대통령 임기 만료 1년 전인 83년에 하야하시겠다, 이렇게 스스로 본인의 거취 문제를 결심해 놓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김성진, 75쪽)

    1979년 6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방한 환영행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함께 손을 들고 있다./조선일보DB

    하순봉 전 경남일보 회장은 회고록 <나는 지금 동트는 새벽에 서 있다>에서 이렇게 밝혔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월1일 공보비서관 출신의 선우연 의원을 부산으로 불러 ‘나 혼자 결정한 비밀 사항인데, 2년 뒤 1981년 10월에 그만둘 생각이야. 10월1일 국군의 날 기념식 때 핵무기를 내외에 공개한 뒤 그 자리에서 하야 성명을 낼 거야. 그러면 김일성도 남침을 못할 거야’라고 했다.” (조우석, 232쪽)

    유신 기간 중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으로 국민들에게 자조(自助) 정신과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러 넣었다. 1973년부터 79년까지 80여만명의 기능공을 양성한 결과, 한국은 77년 네덜란드 제23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사상 첫 종합1위에 올랐다. 1960년 55.3세이던 한국인 기대 수명(壽命)은 79년 65.9세로 늘었고, 77년 7월에는 국민의료보험제도를 도입했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박정희대통령 기념관 2전시실에 있는 사진과 기념패.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기능경기대회 출전 근로자와 대화하고 있다./송의달 기자

    ◇“최악 조건에서 최대 업적 낸 지도자”

    1975년 2월12일 ‘유신 헌법에 대한 찬반(贊反)’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박정희는 투표율 79.8%, 찬성율 73.1%의 지지를 받았다. 야당의 투표 거부 운동과 언론의 비판 논조 속에서도 상당수 국민들은 유신 체제의 가치와 필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조갑제닷컴의 조갑제 대표는 “박정희는 최악의 조건에서, 최단 시간 내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업적을 남긴 지도자”라며 “박정희는 18년 집권 기간 중 수많은 폭력 시위 앞에서 한 번도 발포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사망한 시위자가 1명도 없었다는 점에서 그의 근대화는 세계적 성공 사례”라고 말했다.

    1970년대 유신 체제에 대한 비판자로서 <박정희 시대(The Park Chung Hee Era)>라는 영문 단행본을 2011년에 낸 고(故)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교수는 “박정희는 헌신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으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국가에 일신을 받친 리더였다”고 했다.

    <박정희 시대>(원제는 The Park Chung Hee Era)를 쓴 에즈라 보겔(Ezra Vogel·1930~2020) 전 하버드대 교수/조선일보DB

    1972년 당시, 대한민국은 건국 24년, 6.25 휴전 19년째인 신생국이었다. 북한의 실존하는 군사 도발과 요동치는 국제 환경에서 박정희는 “서양식 민주주의가 하느님은 아니다”며 10월 유신의 깃발을 들었다.

    이강호 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은 “1961년 5.16이 ‘반공(反共) 태세·재정비 강화’로 시작됐다면, 10월 유신은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을 향해 더욱 확고히 한 것이었다. 10월유신은 또 한 번의 5.16이었다”고 말했다.

    ◇“국가 경제 건설...한국인 자신감 가져”

    그래서 ‘10월 유신’의 가치와 기여도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박정희에게 민족사를 위한 충정이라 할만한 다른 의도는 없었는가. 유신으로 인한 민주제 정치의 훼손이라는 비용보다 그로인한 국가 경제의 건설이라는 편익이 훨씬 컸다는 재평가의 여지도 있지 않나”고 했다.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1943~) 박사. 시카고대 석좌교수를 지냈고 한국 현대사와 현대 국제정치를 전문 연구해오고 있다./조선일보DB
    브루스 커밍스 박사가 1997년에 쓴 저서/인터넷 캡처

    한국현대사를 좌파 시각에서 해석하는 브루스 커밍스 박사는 이렇게 평가했다.

    “누구도, 심지어 슘페터도 한국이 첨단전자 기술 분야에서 미국, 일본과 어깨를 겨루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이 대추진(the big push·유신 체제에서 중화학공업화)후 한국은 종합적인 산업구조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 그것은 위대한 성공(a grand success)이자, 한국의 독립 선언이었다. 한국인들은 이후로 어깨를 펴고 자신만만하게 걸어다니게 됐다. 바로 이것이 박정희를 전후(戰後)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지도자로 만들고 있다.” (Cumings, 325~326쪽)

    19세기 후반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활약한 프로이센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1815~1898)

    독일 통일을 이룬 철혈(鐵血) 재상 비스마르크는 “신(神)이 역사 속을 지나갈 때, 그 옷자락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는 것이 정치가의 임무다”라고 했다. 달리 표현하면 ‘신’은 아무 때, 누구에게나 옷자락을 허락하지 않는다. 대다수 정치인들은 신의 미세한 움직임을 낌새조차 채지 못한다. 한국민을 위해 박정희는 자신을 제물로 바치면서 신의 옷자락을 잡아챈 진짜 정치가가 아닐까?

    ◇참고한 책

    김성진, 박정희 시대(1994), 김정렴, 아, 박정희(1997) 김형아,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2005),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유신 50주년 그때 그리고 오늘(2022), 오원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 강국 만들었나(2006), 이강호, 박정희가 옳았다(2019) 이춘근, 10월유신과 국제정치(2018), 조갑제, 박정희의 결정적 순간들(2009), 조우석, 숨결이 혁명 될 때(2022), Bruce Cumings, Korea’s Place in the Sun(1997/2005) <저자명 가나다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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