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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백억원 기부한 이 남자, 신영균, 남은 재산도 다 내놓는다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3. 12. 2. 06:46

    “가져갈 순 없잖아요? 하하” 수백억원 기부한 이 남자, 남은 재산도 다 내놓는다

     

    96세 노신사는 그동안 수백억원을 기부했다. 알려진 것도 있지만 언제, 얼마를, 왜 했는지 기억을 다 못 할 정도로 자주, 남 모르게 했다. 이유를 물었다.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제가 ‘짜다’고 소문이 났더라고요. 짜장면만 산다고. 하하. 제가 짜장면을 좋아해서 산 건데 그렇게들 말하더라고요. 오해예요. 오래전부터 돈은 죽기 전에 좋은 데다 다 쓰고 가자는 생각을 했어요. 제 기부는 이제 시작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원로 배우 신영균은 지난 7월 이승만 기념관을 지을 부지를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20년 가까이 집을 짓고 살았던 서울 고덕동의 4000평이었다. 한강이 훤히 보이는 금싸라기 땅. “이승만 대통령이 고덕동 쪽 한강에서 낚시를 즐기곤 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즉흥적으로 ‘땅이 노니까 거기에다가 기념관을 지어도 되겠다’ 한 거죠. 건국 대통령 아니겠습니까? 예우를 해야죠.”

     

    서울 명동의 한 호텔에서 만난 신영균은 “국민의 사랑을 많이 받은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배우 말고도 치과 의사, 국회의원, 사업가 등 10개 가까운 직업을 가졌다. 1960~1970년대엔 서울에 극장과 제과점, 볼링장을 열어 큰돈을 벌었다. “손대는 것마다 잘되더라고요. 인생의 유일한 실패는 국회의원 선거에 떨어진 거였어요. 그때 쓴맛을 본 뒤 나무나 키워야겠다는 심정으로 고덕동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산 거예요. 시간이 지나 그 땅을 기부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고요. 그러고 보면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없어요.”

     

    수백억원을 기부해온 배우 신영균은 “돌려주는 기쁨이 매우 크다. 죽는 날까지 계속 기부하겠다”고 했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흐트러짐이 없는 이 노신사는 한때 소유했다가 가족에게 물려준 서울 명동의 한 호텔 사무실로 매일 출근한다. 이곳에는 영사기, 포스터, 트로피 등 빛나던 배우 시절이 전시돼 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사랑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

    본격적인 기부는 2006년 즈음 시작했다. 당시 50년 뒷바라지해준 아내를 위해 자녀들과 함께 금혼식을 성대하게 준비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호텔에서 하고 어쩌고 하면 억대가 들겠더라고요.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사람들과 나누자고 마음을 먹었죠. 가족들도 다 좋다고 해서 금혼식을 취소하고 불우이웃 돕기에 1억원을 기부했죠.”

    이전에도 어려운 동료 배우를 위해 몰래 지갑을 자주 열었다. 하지만 ‘신영균은 구두쇠’란 소문이 충무로에 쫙 퍼졌다. 아들 신원식씨는 “검소하고 낭비하지 않는 성격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 뒤로 통 큰 기부가 이어졌다. 2010년 500억원 상당의 명보극장과 사재 100억원이 들어간 제주의 영화박물관을 기증했다. 모교인 서울대, 명예박사 학위를 준 서강대에도 수십억원을 기부했다. 각종 구호 성금, 탈북 학생 장학금 등에도 수십억원을 내놨다. 이번에 기부하겠다고 밝힌 이승만 기념관 부지는 여러 사정으로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이승만 기념관 부지를 기부하겠다고요?

    “기념관 설립 추진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는데, 첫날 모임에서 한마디하라고 해요. 그래서 그 양반을 존경한다고 말했죠. 뭐 하나 해드리고 싶다고요. 고덕동 땅 살 때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도 했다고 하고, 인연이 있는 땅이구나 생각했죠. 그래서 거기에 짓겠다면 기증하겠다고 한 거예요.”

     

    -평소 생각이었나요.

    “그날 즉흥적으로 갑자기 떠오른 것이었어요.”

    -배우 이영애는 기념관 설립에 5000만원 기부 의사를 밝히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는데.

    “좌다 우다 해서 대한민국이 갈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틀린 얘기가 아니잖아요. 나라를 위해 애썼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모셔야죠. 정치적으로 싸우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요. 정치인도 국민도 대한민국을 위한 싸움만 했으면 해요.”

     

    -2010년엔 500억원대 명보극장을 기증했어요.

    “1977년에 인수한 극장이죠. 그 뒤로 충무로 극장이 다 사라졌어요. 장사가 안 되니까. 주변에서 자꾸 팔라는 거예요. 그런데 아들과 (문체부 장관) 유인촌이 ‘영화의 거리를 위해선 명보극장은 남겨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러라고 했죠.”

     

    -보통 결심은 아닌데요.

    “돈이 정말 많아도 기부는 잘 못 하죠. 저는 배우로 사랑받았으니까 그만큼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밥도 싼 것만 산다고 욕도 먹고 그랬는데요. 좋은 일 하니까 너무 좋았어요.”

     

    -기부가 돈 버는 것보다 어렵다고도 해요.

    “혼자서는 못 해요. 가족도 동의해야 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기부한다고 하면 자식들이 찬성해주고, 또 아들이 기부하자고 먼저 말 꺼내면 제가 호응해주고 그래서 된 거죠.”

     

    -2016년엔 탈북 학생 장학금으로 10억원을 쾌척했어요.

    “제가 이북 출신이다 보니 탈북자 교육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통일과 나눔 재단에 10억원을 갖다줬죠. 그때 수표로 가져갔는데 깜짝 놀라더라고요. 현물로 이렇게 큰돈은 처음 만져본다고. 하하.”

     

    -기부를 더 할 건가요?

    “지금까지 얼마나 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아직 멀었어요. 이제 시작이죠. 더 할 거예요. 나이가 있으니 자식들에게 나눠줄 건 다 줬고요. 제가 갖고 있는 남은 돈은 전부 기부하고 떠날 겁니다. 지금까지는 가족 동의를 받았지만 앞으로는 오케이하거나 말거나 할 겁니다. 제 뜻은 변하지 않아요.”

     

    -이유가 있을까요.

    “몰라요. 기부하면 그냥 좋아요. 누구는 아깝지 않냐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기부할수록 제가 더 부자가 되는 느낌입니다.”

    신영균은 국회의원, 사업가 등 10개 가까운 직업을 가졌다. 하지만 그는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배우로 남고 싶다”며 “다른 직업은 부업일 뿐이었다”고 했다. 1960년 영화 ‘과부’로 데뷔해 300편 가까운 영화를 찍으며 당뇨 등 병을 얻기도 했지만 “지금도 나는 배우라는 직업이 좋다”고 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국회의원 낙선이 유일한 쪽박

    일평생 한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신영균은 손만 대면 대박을 쳤다. 그래서 기부를 할 수 있었다.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연 서울 회현동 동남치과는 늘 환자로 붐볐고, 영화배우가 된 뒤엔 흥행 보증수표로 통하며 300편에 출연했다. 사업도 흥했다. 극장도 인수하고 빵집도 열었다. 1970년대 초 명동에 문을 연 우리나라 1호 볼링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맥도널드를 들여온 것도 그다. “해외에 영화를 찍으러 다니면서 본 게 많으니까 이것저것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적중했고요. 이렇게 잘될 수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잘됐어요.”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으로 눈을 돌렸어요.

    “영화는 시대 흐름을 많이 탔어요. 정권에 따라 규제가 달라지니까 키스도 못 하게 하고. 그러니까 관객도 안 들고요. 그래서 영화 관련 협회 등에서 회장도 하면서 사회봉사를 시작했죠. 그즈음 사업도 하고요.”

     

    -손댄 사업마다 대박이 났어요.

    “장사는 극장으로 시작했죠. 1963년 금호동에 2류 극장을 열었어요. 명절 때는 줄이 끝없이 이어졌어요. 영화배우 한 것만큼 돈을 벌었죠.”

    -빵집도 했어요.

     

    “그즈음 충무로 명보극장 옆 빵집을 인수했어요. 그 집 사장이 이민을 간대서요. 극장까지 인수하려고 한 큰 그림이었는데 그게 또 잘됐죠. 그리고 1977년에 명보극장을 샀죠.”

     

    -우리나라 1호 볼링장도 열었다고요?

    “영화배우 할 때 외국에 촬영을 다니는데 볼링장이 크게 유행했어요. 들여와야겠다 했는데 허가가 안 나서 감사원에서 감사까지 받고 시작했어요. 내 성을 따서 ‘신스 볼링장’이었죠. 손님이 정말 많이 왔어요.”

    -뭐 하나 망한 게 없네요.

     

    “글쎄 그랬어요. 그런데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서 떨어졌잖아요. 제 인생의 첫 실패였죠.”

    -갑자기 왜 정치에 뛰어들었나요?

    “선거 20일 앞두고 서울 성동구에 나가라는 거예요. 중앙정보부에서 반협박으로. 별로 내키지 않았어요. 그런데 나밖에 나갈 사람이 없다니까. 돈만 쓰고 600표 차이로 떨어졌죠. 상대 후보가 ‘신영균에게 세컨드(첩)가 있다’고 흑색선전을 했어요. 며느리였는데 말이에요.”

     

    -정치를 안 하겠노라 했었죠?

    “환갑이 갓 지났을 때였어요. 나무나 가꾸고 살아야겠다 해서 고덕동에 땅을 샀죠. 거기서 20년을 살았어요. 그리고 이번에 기부 얘기를 꺼낸 거예요.”

     

    -그런데 15·16대 국회의원을 지냈어요.

    “마지막으로 문화예술계를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했어요. 지역구 출마가 아니라 전국구 비례대표를 하라고 해서 했어요.”

    -정치하면서 이룬 게 있나요?

    “예술가들 의료보험제도가 없었는데, 그걸 제도화했죠. 제일 잘 한 일이에요.”

    -예술계도 좌, 우로 나뉘어있어요.

     

    “그러니까요. 재단이나 협회에서 상을 주면 좌, 우 양쪽에서 난리예요. 통합이 돼야 하는데요.”

     

    -정치도 마찬가지죠.

    “윤석열 대통령을 당선 전에 만났어요. 나를 후원회장으로 모시고 싶었다고 먼저 말을 해주더라고요. 영화를 엄청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고맙게 생각해요. 꼭 성공한 대통령이 돼야 합니다.”

     

    -후배 정치인들에게도 한마디.

    “헌법 개정이 필요해요. 대통령이 5년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윤 대통령도 그렇고요. 우리나라 대통령제는 수명을 다했어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신영균의 대표작인 영화 ‘빨간 마후라’의 포스터./조선 DB

     

    ◇다시 태어나도 배우로 살겠다

    유년 시절에 이유도 없이 배우가 되고 싶었다. 자신을 키운 홀어머니가 “내가 너 딴따라 하라고 이북에서 여기까지 데리고 온 줄 아느냐”고 심하게 반대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얻어맞고도 고등학교 졸업 후 가출해 2년간 전국을 돌며 연극 무대에 섰다. 그런데 배가 너무 고팠다. “직업은 있어야겠더라고요.” 공부해서 서울대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배우의 꿈은 버리지 않았다. 먹고살려고 치과를 개업했지만 2년을 버티지 못했다. 1960년 서른 살이 넘은 나이에 영화 ‘과부’(감독 조긍하)로 데뷔했다. 이후 1962년 ‘연산군(감독 신상옥)’, 1964년 ‘빨간 마후라’(감독 신상옥), 1968년 ‘미워도 다시 한번’(감독 정소영) 등 영화를 300편 찍으며 당대 최고 스타가 됐다.

     

    -배우는 왜 하고 싶었나요?

    “배우가 뭔지도 몰랐지. 왜 그렇게 하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까마득해요.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때 성극을 하는데 뽑혀서 한번 무대에 오르니까 너무 좋더라고. 박수를 받는다는 게. ‘연극이 참 좋구나, 직업으로 하고 싶다’ 했지.”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네요.

    “그런데 배우가 되고자 한 때부터 집 뒤 동산에 올라가 소리 지르고 연극 대사도 따라 하고 그랬어요. 배우가 되겠다고 일편단심이었지.”

     

    -어머니 반대가 심했죠?

    “고등학교 졸업한 뒤 어머니한테 연극배우가 되겠다고 하고 욕을 많이 먹었어요. ‘야, 이 XX야’ 하면서요. 고무신짝으로 두들겨맞고 집을 나왔어요. 2년 동안 극단을 따라다녔죠. 그런데 너무 고생했어요. 트럭 하나에 다 타서 다니다 한번은 떨어져서 죽을 뻔도 했죠. 그때야 어머니 말이 맞는구나 했어요.”

     

    -그래서 공부했군요.

    “1년 더 공부해서 남보다 3년 늦게 대학을 갔어요. 배우가 먹고살 수가 없는 직업이라는 걸 알고 치과 의사를 택했죠.

     

    -졸업하고 바로 개업했나요?

    “먹고살려고요. 그래도 연극을 계속하고 싶었어요. 친구들이 와서 설득해 무대에 한번 섰는데 영화 제작자들이 보고는 병원에 찾아와서 또 배우를 하라고 해요. 그렇게 찍은 게 ‘과부’입니다.”

     

    -반응이 어땠나요?

    “그때는 영화 황금기였죠. 흥행했죠. 배우를 딴따라 취급할 때였는데 서울대 졸업한 치과 의사 출신이라 좋게 봐줬어요. 그 후 1년간 치과 의사를 병행하다가 관뒀죠.”

     

    -의사 하다가 배우 한다고 하면 반대가 심했을 거 같아요.

    “와이프가 반대했죠. 자기는 치과 의사랑 결혼했지, 배우와 한 게 아니라면서요. 스캔들이 워낙 많을 때니까 바람피울까 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약속했죠. 나는 당신만을 사랑하겠노라고.”

     

    -그 약속 지켰나요?

    “지켰으니까 오늘날 이러고 살고 있잖아요. 하하. 유혹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요. 신앙으로 이겨냈고 가족 생각하면서 지켰죠. 그렇게 반대하던 어머니도 영화 개봉하니까 ‘우리 아들이 배우감이었구나’ 하더라고요.”

     

    -배우의 삶은 어땠나요?

    “너무 재밌었어요. 하고 싶은 일이었으니까요. 엄청 바빠서 힘든지도 몰랐어요. 1년에 20~30편씩 찍으니까 잠도 거의 못 자고 다녔죠. 연극과는 달랐어요. 후시녹음이라 대사도 안 외우고 다 즉흥적으로 했죠. 그래서 ‘연산군’ ‘상록수’ 등 동시녹음을 한 작품이 기억에 남아요. 욕심을 내서 한 것들이죠.”

     

    -그러다 은퇴 아닌 은퇴를 했어요.

    “돈은 많이 벌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힘들더라고요. 피곤에서 달아나려고 초콜릿을 많이 먹어 당뇨까지 왔죠. 너무 열심히 달렸어요.”

    -치과 의사 그만둔 건 후회 안 했나요?

    “전혀. 후회 안 하죠. 100%. 하하. 다시 태어나도 영화배우를 할 거예요. 국민의 사랑을 받으니 얼마나 좋아요.”

    배우 신영균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지금 내 모습은 아내 덕

    신영균은 천생 배우다. 아흔을 넘겼지만 스트라이프 남색 정장에 빨간색 넥타이를 매치하고 새하얀 행커치프를 꽂은 모습은 영락없는 배우다. 헤어는 무스로 고정했다. 걸음걸이에 흐트러짐도 없다. 나이가 무색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나 보다. “오늘 나 좀 괜찮아 보이냐”고 묻는 말투에서도 배우의 연륜이 느껴졌다. 그런 그의 스타일리스트는 딱 한 사람이었다. 아내 김선희씨. “평생 그림자처럼 뒷바라지했죠. 그 사람만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합니다.”

     

    -여성 팬이 많았죠?

    “그 시절엔 집 앞에 죽치고 있으면서 혈서 쓰고, 자기 엉덩이에 내 이름 썼다고 보여준다고 하고 그런 사람이 많았어요.”

    -아내가 잔소리 안 했나요?

    “하지 왜 안 해요. 한번은 팬레터를 주머니에 넣은 적이 있었는데 엄청 혼났어요. 별별 유혹이 많았는데 제가 다 물리쳤죠. 그래서 오늘날 신영균이가 있는 거야(웃음).”

    -소원이 있다면요?

    “우리 마누라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또 나랑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진짜. 나 없다고 자살하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지금도 사랑해요. 그 양반도 그렇고. 나도 그 사람 하나만 알고 살았으니까요.”

    -주례도 많이 했죠?

    “수도 없이 했죠. 이병헌 부부도 했고. 그런데 다 잘살지는 않더라고요. 하하.”

     

    ◇가져갈 수도, 가져가고 싶은 것도 없어

    새벽 6시에 일어나 저녁 10시가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든다. 매일 점심은 누군가와 식사를 한다. “한 달 전에 약속을 다 잡아놔요. 대화를 하는 게 낙이죠.” 루틴이 철저한 게 건강의 비결이다. 또 평생 남 험담을 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어떤 직업인으로 남고 싶나요?

    “수도 없이 받은 질문이에요. 그럴 때마다 가만히 생각해봐요. 신영균 하면 영화배우지, 정치인 신영균이나 치과 의사 신영균이 아니잖아요. 내 직업은 배우고, 나머지는 다 부업이에요.”

     

    -건강 유지 비법이라면.

    “담배는 안 피웠어요. 어머니가 안 된다고 해서 따랐죠. 술은 젊을 때는 부득이하게 먹었지만 이후엔 입에 거의 안 댔고 지금은 아예 안 먹어요. 나쁜 일 있으면 금방 잊어버리고 좋은 일만 생각해요. 오래 꽁하질 않아요. 그게 건강 비결 아닐까요?”

     

    -루틴이 철저하다고요?

    “매일 사무실에 와서 앉아 있다가 점심 때는 중식당 가서 빠짐없이 사람을 만나요. 그리고 2시간 정도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고요. 걷고 가벼운 근육 운동이요. 귀가해서 저녁 먹고 자는 거죠.”

     

    -소식하나요? 피부 관리는요?

    “과식도 안 하지만 소식도 안 해요. 당뇨가 있으니까 단것은 안 먹고요. 피부 관리 같은 건 전혀 안 해요. 열심히 좋은 거 발라요(웃음).”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장면이라면.

    “글쎄요. (잠시 침묵) 항상 좋았어요. 이북에서 어머니 손 잡고 서울에 올 때도, 아버지가 없어서 어머니가 고생할 때도 힘들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그저 그대로 열심히 살았어요. 인생은 아름답죠. 죽고 싶다,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네요. 인생이 엄청 짧아요.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실수하지 않고 마무리하고 싶어요.”

     

    -나중에 관에 무엇을 넣고 싶은가요?

    “성경책 하나면 돼요. 가져갈 수도 없고. 가져가고 싶은 것도 없어요.”

     

    -영화 찍자는 제안은 이제 안 오나요?

    “하하하하하. 하나 찍을까요?”

     

    그는 2012년 서울대 동문 배우 이순재와 함께 연극 ‘하얀 중립국’으로 무대에 올랐다. 젊은 시절 열흘이면 외웠을 대사를 한 달이나 붙잡고 있었지만 행복했다. 그 무대가 마지막이 아닐 거라고 했다. “너무 좋았어요. 옛날 생각이 나면서. 무대에 다시 한번 올라갈까 생각은 하고 있는데요. 지금도 그냥 배우가 좋아요. 뭘 해서 돈을 벌면 그건 다 기부하고 싶고요.”

     

    20-23년 12월 2일 조선일보   김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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