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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를 군에 보내며스크랩된 좋은글들 2025. 3. 17. 08:31
탄핵 본질, 체제 전쟁이라지만 네가 설 휴전선이 체제 최전선 결과 승복, 국민 통합은 둘 다 軍이 안보 지킬 때 가능한 것
아들. 오늘 네가 신병 교육대에 입소하는구나. 휴전선 철책 경계를 담당하는 부대다. 육군 창설 때의 ‘메이커 사단’이자 6·25전쟁에서 ‘무적 선봉’이라는 명예로운 별칭을 가진 부대라고 들었다. 솜털 보송보송한 몸으로 아비 품을 파고들던 코흘리개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네가 벌써 푸른 제복의 사내가 됐구나.
막내야. ‘나 때는 말이야~’ 하는 시시한 말은 하지 않겠다. 너를 군에 보내며 너의 건강도 안전도 걱정되고, 네가 군에 있는 동안 휴전선에서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면 어떡하지 걱정되고, 또 선임들은 물론 분대장·소대장·중대장의 신임을 받아 스트레스 없는 군 생활을 해야 할 텐데 걱정된다. 잘 걷고, 잘 뛰고, 푸시업을 수십 번은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사격도 잘해야 할 텐데 하고 걱정한다. 아빠도 이리 밤을 뒤척이는데 너는 오죽하랴 싶다.
우리 국민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 근심스럽게 북쪽을 바라본다. 과거 동족상잔의 트라우마 때문에, 아직도 지구상 가장 호전적인 적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슨 일이 생기면 거의 본능적으로 북쪽의 동태를 살핀다. 그 북쪽 최전방에 네가 서 있게 됐다.
지금 우리는 비상 상황이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도, 그를 대신했던 권한대행 총리도 모두 ‘유고 상태’다. 더군다나 정치적 양쪽 진영이 극단으로 갈려 일촉즉발 내전이라도 벌어질 듯 살얼음이다. 네가 태어나서 처음 봤을 이런 혼란 속에서 적을 마주하러 군에 입대하는 너를 보며 아비 마음은 편치 않다.
요즘 대통령 탄핵 국면의 본질을 체제 전쟁이라고 한다. 그 말도 맞겠지. 그러나 네가 서 있게 될 곳이 진짜 체제 전쟁의 최전선이다. 북쪽 초병과 네가 맞서 있다면, 단순히 남북 병사가 맞서 있는 게 아니라 네 뒤에는 한·미·일 안보 공조와 자유 민주 진영이 있는 것이고, 북 초병 뒤에는 북·중·러 강권 독재 세력이 핵을 흔들며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선거 결과와 사법 선고에 대한 승복을 국민 통합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승복 약속은 패자가 실천해야 하는 것이지만, 통합은 진 사람이 아니라 이긴 사람이 하는 것이다. 자유 진영의 국제 연대도, 국가별 국민 통합도 승자와 강자가 주도한다. 그러나 승복과 통합의 대전제는 국가 안보이고, 그것을 지키러 오늘 네가 집을 나서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핵미사일 176기, 핵탄두 1800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1994년 그걸 포기하면서 러시아·영국 등과 ‘부다페스트 안전보장 각서’를 체결했다. 핵을 내어주는 대신 ‘독립, 주권, 국경선을 존중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각서는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면서,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완전 휴지 조각이 됐다.
아들아. 올해 입영 대상인 23만 젊은이가 ‘우크라이나의 교훈’을 새기면서 대한민국의 영속성과 국민의 생명을 지키러 입대하는데, 그들의 등 뒤에서 나라를 운영하는 기성세대가 너무 많은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다.
헌법이 곧 국가다. 헌법 정신에 바탕을 둔 ‘결과 승복’도 ‘국민 통합’도 너와 우리 군이 압도적 실력으로 안보를 지키고 있을 때 유의미한 것이다. 어떤 정치인들은 이걸 잊고 있는 것 같구나. 마음에 두지 말아라.
60여 년 전에 만든 ‘진짜 사나이’란 국민 군가는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로 시작해서 ‘부모 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로 끝난다. 이 노랫말이 너와 나의 얘기가 되는 날이 오다니 뭉클하다. 우리 막내가 철책에 서서 하얗게 밤을 새울 때 아비는 서울에서 단잠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다.
2025년 3월 17일 조선일보 태평로 김광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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