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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인권소장 윤여상님의 인터뷰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0. 10. 5. 11:00

    최보식선임기자가  만난 북한인권소장 인터뷰

     “지금까지 北 독재정권 상대로 했는데, 이제 文정권을 상대하게 됐다”

     

     

     

     

     

     

    윤여상 소장은 “현 정부는 점점 더 세게 우리의 목을 졸랐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우리 활동은 북한 세습 독재 정권을 상대로 했는데, 이제 문재인 정권을 상대하게 됐다.”

    윤여상(53) 북한인권정보센터 소장은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요약했다.

    그가 북한 인권 실태 조사를 위해 ‘하나원’(탈북자 정착 지원 기관)에 출입하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이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뒤로 정식 위탁 계약까지 맺었다. 그렇게 해서 ‘북한 인권 백서’를 14년째 발간해왔다.

    “북한 인권 실태 조사와 기록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북한 권력자들에게 언젠가 처벌받을 수 있다는 심리적 압박을 준다. 서해상에서 해수부 공무원 총살을 지시한 사건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런데 지난 3월 문재인 정부가 계약 중단을 통보해왔다. ‘평양’의 눈치를 본 것이다.”

    3급 비밀

    ―박근혜 정부 시절 ‘북한인권법’ 통과로 통일부 산하에 북한인권기록센터가 설치되지 않았나?

    “탄핵 직전에 북한인권기록센터가 설치됐지만, 그 뒤 4년간 북한 인권 백서(白書)를 한 차례도 발간하지 않았다. 북한인권법에는 백서 발간 조항이 있는데도 무시했다. 심지어 탈북자 면담 조사 보고서조차 ‘3급 비밀’이라며 비공개로 막아놓았다.”

    ―'3급 비밀'은 국가 안보에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사안에 대해 지정하는데?

    "구체적 인권침해 사례를 적시해놓은 보고서도 아니다. 탈북자 몇 명을 조사했고 어떤 범주의 인권침해 건수가 얼마였는지 추린 현황 통계에 불과하다. 이조차 공개를 안 한다."

    ―비공개 문제를 떠나 정부 기관이 이미 조사를 맡고 있으니, 민간 단체가 똑같은 조사를 중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어떤 정권이냐에 따라 북한 인권 사안은 영향을 받는다. 지금과 같은 정권이 들어서면 정부가 자료를 독점해 서랍 속에 숨겨버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박근혜 정부 시절 통일부는 포괄적 조사를, 민간 단체는 특정 주제에 한정된 조사를 합의했다. 현 정부가 들어서자 이런 합의가 깨졌다. 그때부터 우리 목을 조여 오는 과정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어떻게 목을 조였다는 건가?

    “조사 대상 탈북자 수와 설문 항목을 대폭 줄이라고 요구했다. 현 정부가 출범한 2017년 설문이 35개에서 12개로, 2018년에는 8개로, 2019년 6개로 계속 축소됐다. 평양이 기분 나빠할 ‘해외 파견 노동자’ ‘납치·억류’ ‘핵·생물·화학무기 실험’ 같은 문항은 삭제하라고 했다. 인터뷰 대상 탈북자의 성별, 나이, 출신지 등 기본 정보조차 수집 못 하게 했다.”

    ―정부의 통보를 안 따르면?"칼자루를 정부가 쥐고 있다. 하나원 출입을 언제든지 막을 수 있다."

    ―조사 대상 수도 줄었다고 들었는데?

    “그전까지 매달 20여 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현 정권이 들어서자 10명으로 줄였다. 금년에는 3명을 더 빼라고 했다. 유엔 서울 사무소도 우리처럼 북한 인권 실태 조사를 해왔다. 유엔 쪽은 매달 3명을 인터뷰했는데 여기도 1명을 더 줄이라고 했다.”

    ―한 달 조사할 수 있는 대상이 각각 7명과 2명으로 된 건가?

    “10명에서 3명을, 3명에서 1명을 더 깎도록 지시하는 게 명색이 정부가 할 일이냐. 어린애도 이런 유치한 짓은 하지 않는다. 이게 무슨 의도냐. 결국 조사하지 말라는 것이다.”

    ―정부가 그런 의도라면 더 이상 조사할 수 없지 않은가?

    “우리는 ‘을(乙)’의 처지이다. 이렇게라도 북한 인권 실태 조사는 계속돼야 하니까. 결국 지난 3월 정부의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하지만 통일부 실무자는 ‘방침이 바뀌었다. 더 이상 위탁 사업을 할 계획이 없다’고 답변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정부가 위탁 사업을 끊어 단체의 운영도 어려워졌나?

    “정부가 지급하는 조사비는 연 2000만원이다. 이 돈은 면담 탈북자들에게 설문 사례비와 면접비로 다 지급한다. 우리 단체의 운영 재정에는 전혀 보탬이 안 된다. 내가 이렇게 고발에 나선 것은 북한 인권 실태 조사를 더 이상 못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건 아닌 것이다. 현 정권에 들어간 시민 단체 활동가들도 이런 상황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잘 알 것이다.”

    ‘공동경비구역 JSA’ 같은 현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문 정권에서는 이제 뉴스도 아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떤 계기로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나?

    “나는 전북 출신으로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다. 영남대 정치학과 졸업 후 군 생활 3년(1989~1991년)을 휴전선에서 ‘대면병’으로 근무했다. 그게 내 인생을 이쪽으로 들어오게 했다.”

    ―'대면병'이라는 보직은 처음 듣는데?

    “명칭 그대로 북한군과 대면하는 병사다. DMZ에서 서로 틀어대는 대북·대남 확성기 방송이 동시에 멈추는 시간대가 서너 번 있다. 주로 밤인데 각 30분~1시간 공백이다. 그 틈에 ‘대면병’이 마이크를 잡고 심리전을 펼치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이를 ‘적공조’라고 부른다. 우리는 사병이 담당했다. 북한은 소좌(소령)·중좌 계급의 정치 군관이 맡아 상당한 재량권을 갖고 있었다.”

     

    ―이게 신선한 뉴스 같다. 대면병은 어떻게 선발됐고 소속은?

    “전체 GP(감시 초소) 중 북한 쪽과 근접한 10곳에만 두 명씩 있었다. 내가 근무하던 시점에 전군(全軍)의 대면병 숫자는 스무 명 남짓했을 것이다. 나는 훈련소에서 선발됐다. 자대에 배치된 뒤 ‘사수’(보직 상급자)한테 혹독한 일대일 도제 교육을 받았다. 국방부 직속으로 모두 보안이었다. 나는 ‘최민수’라는 가명을 썼다. 북측과 대화한 요약문은 즉각 국방부에 전달됐다.”

    ―북측과 주로 어떤 대화를 했나?

    “매일 대화 주제를 준비했다. 우리는 국내외 뉴스, 북측은 체제 선전 내용을 위주로 했다. 북측의 질문과 답변을 가상해 미리 ‘아적(我敵) 대화록’을 만든다. 어떻게 공격하고 방어할지 전략을 짜두는 것이다. 국방부에서 ‘북측에 이런 사안을 확인하라’는 지시가 직접 내려오는 경우도 있다. 공식 남북 채널이 없던 시절에 대면병이 그런 역할을 했던 셈이다.”

    ―이념과 논리의 대결인 셈인데?

    “북측 상대는 성경과 브리태니커 사전도 거의 다 외운 것 같았다. 처음에는 저쪽 논리에 쉽게 말려들었다. 이 때문에 사수한테 기합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여섯 달쯤 지나면서 내가 상대를 압도했다.”

    ―어떻게 가능했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대학 수강 신청이나 MT 얘기를 꺼내면 상대는 ‘그게 뭐냐?’고 끌려들어 온다. 자유 체제가 갖는 강점을 그때 확실하게 알았다. 폐쇄 사회는 결코 개방된 사회를 이길 수 없다.”

    ―전역할 때까지 대화 횟수가 얼마나 됐나?

    “하루에 서너 번씩이니 1000회 이상 대화했다. 매일 그렇게 하니 그 시점의 북한 정세에 대한 감각은 가장 뛰어났을 것이다. 북측 상대와도 자연히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병헌·송강호가 출연한 ‘공동경비구역 JSA’ 영화 얘기가 실제 있었구나.

    “직접 건너가 만나지는 못해도 휴전선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노래 대결과 장기 두기를 하거나, 가족 얘기를 할 때도 있었다. 대면병으로 근무하면서 북한 사람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있었다. 어떻게 학습·통제·조종했기에 저런 인간형을 만들 수 있을까. 설령 통일된다 해도 저들과 공생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 머릿속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었다. 전역 후 대학원에 진학한 나는 북한 주민 연구 목적으로 방북이 가능한지 정부에 문의한 적도 있다.”

    ―그게 성사될 리는 없었을 테고?

    “내게는 절실한 과제였다. 결국 북한에서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만 해도 600여 명으로 수가 많지 않았다. 전국을 다니며 이들과 면담해 ‘귀순 북한 동포의 사회 정착’이라는 석사 논문을 썼다. 탈북자와 관련된 국내 최초 학위논문(1994년)이었다. 박사 논문도 이런 주제로 썼다.”

    ―북한 주민의 의식 구조에 관심을 가졌다가 어떤 계기로 북한 인권 문제로 넘어왔나?

    “당초 연구는 북한 체제에 길들여진 사람들과 과연 함께 살아갈 수 있느냐에 대해 답을 구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탈북자들은 인터뷰에 응했을 때 그쪽 체제에서 자신이 고통받고 살아온 얘기만 했다. 대부분 인권 피해 사례였다. 누군가는 이를 기록해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하나원에 입소한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하게 됐나?

    “1999년 처음으로 탈북자가 한 해 100명을 넘었다. 당시 언론에서 ‘대량 탈북’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그해 탈북자 정착 교육을 위해 ‘하나원’이 설립됐다. 내가 전공자여서 하나원 강의를 맡게 됐다. 그러면서 내부 협조를 받아 탈북자 면담을 하기 시작했다.”

    어용 지식인들

    입국 탈북자는 2002년에 한 해 1000명을 돌파했다. 4년 뒤에는 2000명으로 두 배가 됐다. 2009년에는 2927명까지 올라갔다. 2012년 김정은 등장 이후 입국 탈북자 수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국경 통제와 처벌 수위가 강화됐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1000명 선으로 떨어졌다. 코로나 여파로 이동 제약까지 겹쳐 올 상반기 탈북자는 147명까지 급감했다.

    ―과거 서독에서는 ‘잘츠기터 중앙범죄기록소’가 동독의 인권침해 사례를 기록했다. 서독에서도 사민당이나 좌파 언론과 지식인들은 ‘잘츠기터는 평화와 긴장 완화를 해치는 것’이라며 문을 닫아야 한다고 했다. 얼마전 어용 지식인 유시민씨가 김정은을 ‘계몽 군주’라고 띄우듯이, 당시 호네커 동독 서기장을 ‘친근한 이웃 아저씨 같은 지도자’로 미화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북한 인권 개선 노력은 현 정부 100대 국정 과제 중 92번째에 들어 있었다. 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다. 하지만 공개 석상에서 북한 인권에 대해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문 대통령의 약속만은 현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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