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부산 시장 보궐 선거의 핵심은 높은 투표율과 큰 격차다. “야당이 이긴 게 아니라 여당이 패배한 것” “문재인이 문재인에게 졌다”는 분석은 똑같은 결론을 향하고 있다. 한마디로 국정 노선을 확 바꾸라는 것이다. 하지만 딱 일주일 만에 그런 기대는 접어야 할 모양이다. 청와대와 민주당이 바뀔 조짐이 안 보인다. 새로 내건 “질서 있는 혁신”은 혁신하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문재인 청와대 사람들은 좀 이상하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관료나 친구들이 청와대에 들어가면 아예 휴대폰을 잘 받지 않는다. 일부러 안 받는 느낌이 들 정도다. 간신히 통화가 돼도 대개 “왜 전화하느냐”며 싸늘하다. “마음대로 쓰라, 우리는 어차피 그쪽 신문 안 읽는다”며 적대감을 감추지 않는다.
처음에는 휴대폰 도청이나 통화내역 공포증 탓이 아닐까 여겼다. 현 청와대는 툭하면 휴대폰을 털었다. 김태우 감찰반원 사건 때부터 “민정수석실이 영장도 없이 휴대폰 제출 동의서를 강요했다”는 폭로가 꼬리를 물었다. 포렌식 과정에 당사자를 참관시키지도 않았다. 이런 식으로 외교부·기획재정부·보건복지부 간부들의 휴대폰이 무더기로 털렸다. 심지어 대통령 경호처의 내부 비리가 보도되자 제보자를 색출한다며 150여명의 경호직원 휴대폰 통화내역을 조사했다. 청와대 인사들이 휴대폰 통화에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입단속은 비단 개인 차원만이 아닐 성싶다. 신현수 전 민정수석이 한 달여 만에 “들어와 보니 내가 설 공간이 없다”고 사퇴한 것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청와대 내부에 숨어있는 실세 부서는 국정상황실과 시민사회수석실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국정상황실이야 대통령을 지근 거리에서 보좌하는 만큼 당연할지 몰라도, 시민사회수석실은 좀 뜬금없다. 하지만 새로운 프로젝트가 추진되다가 시민사회수석실 쪽에서 “민주노총이 반발한다” “참여연대와 민변이 걸고넘어질 수 있다” “문파를 설득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전달되면 곧바로 엎어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이다. 좌파 단체들의 입김이 보통이 아닌 셈이다.
김상조 전 정책실장이 전세 문제로 낙마했을 때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그나마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며 간헐적으로 정무라인에 맞서 방패막이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참여연대 출신인 그는 ‘공정경제 3법’ 등을 만들 때 시민단체 반발도 희석시켜 주었다. 이런 김 실장조차 “관료들에게 포획된 게 아니냐”는 비난에 시달렸고 “내부 이견 조율이 쉽지 않다”며 힘겨워했다고 한다.
청와대가 꿈쩍도 안 하는 것에는 문 대통령의 개인적 경험도 한몫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1년을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지켜봤다. 당시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체결과 제주 해군기지 건설, 이라크 파병 등으로 지지계층이던 진보진영이 일제히 돌아서면서 청와대는 완전히 고립됐다. 끔찍한 레임덕이었다. 문 대통령은 이런 트라우마 때문에도 진보진영과 척질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대세다.
문 대통령은 보궐 선거 참패 다음 날 “낮은 자세로 국정에 임하겠다”는 입장문을 발표했지만 방점은 “국민의 절실한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은 흔들림 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데 찍혀 있다. 마이웨이 선언이나 다름없다.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는 “서울시장 선거에 져도 비포장도로로 가면 된다”며 “대선이 어려워지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저쪽 당엔 자체 후보조차 없지 않냐”고 했다. 친문 핵심들 역시 “정책 방향은 맞았는데 국민 의견 수렴이 충분하지 못했다”고 입을 모은다. 더는 국정 노선이 바뀔 것이란 기대를 접어 두는 게 좋을 듯싶다.
문파들은 궁지에 몰릴수록 결사옹위 모드에 들어가는 분위기다. 민주당 초선 의원들의 혁신 건의에 ‘초선족’이라 비아냥대며 “당에서 나가라”는 문자 테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5년간 서울 아파트값은 80% 넘게 올랐다. LH 사태도 그 본질은 부패라기보다 부동산 정책 실패에 따른 민심 악화다. 여기에다 ‘일자리 정부’에서 주 40시간 이상 일하는 양질의 전일제(풀 타임) 근로자는 195만명이나 줄었다. ‘비정규직 제로’ 선포가 무색하게 2019년 한해에만 비정규직이 역대 최고인 87만명 늘었다. 이런 객관적 지표에도 기존 노선을 고집한다면 민심은 더 싸늘해질 수밖에 없다. 유권자들은 이슈 자체보다 이슈를 다루는 태도에 더 민감하기 때문이다.
정치에서도 굽히지 않으면 꺾어지기 마련이다. 현 청와대가 자꾸 5년 전 박근혜 청와대와 닮은꼴로 가는 느낌이다. 2016년 4월 총선 직후 새누리당은 선거 민심과 거꾸로 갔다. 진박 공천 파동과 유승민 찍어내기 등이 총선 패배 요인이었지만 친박들은 이정현 의원을 당 대표에 세웠다. 기득권 사수에 목을 맨 것이다. 그 뒤 새누리당은 채 1년도 안돼 탄핵과 대선 패배로 완벽하게 몰락했다. 이번엔 5년 주기의 이런 저주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옛말에 지도자가 국민 요구에 영합만 하면 그들과 함께 망하고, 국민의 뜻을 거스르면 그들의 손에 망한다고 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