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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짜 표창장을 보라… 공정한 경쟁은 無罪다
    카테고리 없음 2021. 6. 21. 07:29

    뜨거운 감자 이준석현항 공정한 경쟁,  이렇게 본다

     

    /일러스트=박상훈

    능력주의(meritocracy)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헌정사상 최초의 30대 제1야당 대표가 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능력주의와 공정한 경쟁을 앞세우고 선거 공천에 자격시험을 도입하겠다는 등의 계획을 밝혔습니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권력이 주어지는 사회를 추구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기존의 계급사회를 유지하고 기득권을 지키려고 고안된 통치 기술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뜨거운 감자가 된 능력주의를 주제로 세 필자의 긴급 지상 논쟁을 싣습니다.

     

    ①최진석(찬성): 가짜 표창장이 公正인가

    ②노정태(반대): 자칫하면 新계급사회 된다

    ③임명묵(제3의 의견): 20대에게 ‘공정한 경쟁'은 사이다일 뿐

     

     

    “공정한 경쟁”이 우리 사회의 중요 의제로 떠돌아다닌다. 경쟁이 존재의 속성이라면, 공정은 정치적 합의의 문제다.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것은 공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가난한 초등학교 선생과 키가 작은 무학(無學)의 어머니 사이의 큰아들로 태어난 것도 공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모든 인간은 각자 다른 조건에서 다른 답안지를 받고 태어난다. 이것은 내가 재벌의 아들이거나 선생의 아들이거나 노동자의 아들이거나 간에 내가 태어난 조건에서 나는 나만의 답안지를 받는다. 어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것 자체는 공정과 상관이 없다. 문제는 답안지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성숙한 사회라면, 평가 기준도 답안지의 개수만큼은 아니더라도 다양하기는 해야 한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한다. “이준석이 추구하는 경쟁 사회는 결국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좋은 교육 받고 좋은 시험 성적을 받은 사람만 성공하는 비인간적 사회 구조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비판이 정당화되면, 찢어지게 가난한 ‘비인간적’ 구조를 이겨내고 성공한 ‘우아한 형제들’의 김봉진 대표나 카카오의 김범수 의장은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공정과 상관없는 탄생 배경을 딛고 경쟁을 통과하여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우리네 사회다. 이런 경로가 잘 뚫려 있으면 ‘인간적인’ 건강한 사회, 그렇지 않으면 ‘비인간적인 사회’일 것이다.

     

    “이준석이 얻은 하버드대 졸업생이라는 학벌도, 공정한 경쟁으로 얻은 게 아니다”라는 시각도 있는 듯하다. 타고난 두뇌와 유복한 집안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하버드에 입학할 수 있었고, 그것 자체가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존재적 기원을 논리의 출발로 삼는다면, 공정한 경쟁은 지구상에 존재할 수 없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과정을 통과한 하버드대 합격생에게 너는 부모 잘 만나서 한 합격이니 공정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보다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정들을 어기고 위조된 증명서를 제출하여 합격한 것이 오히려 공정하지 않은 경쟁이다. 과학고나 자사고 폐지를 주장하면서, 자기 자식은 그런 학교에 보내는 것이 불공정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공정한 경쟁’ 자체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일보다는 공정의 원칙을 선택적으로 적용하지 않을 수 있는 행위 능력이 더 급하다. 내 공정만 공정이고, 네 공정은 공정이 아니라는 시각. 그리하여 ‘공정한 경쟁’을 부정적으로 대하면서 스스로는 오히려 공정을 파괴하는 아이러니 속으로 빠지는 일. 이런 시각과 이런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부터 길러야 한다. 마이클 샌델이나 크리스토퍼 헤이즈를 바로 갖다 대기에는 우리의 기초가 아직은 취약하다. ‘공정한 경쟁’의 정체를 따지는 일보다는 ‘선택적 공정’이 더 큰 문제다.

     

    공정을 유지하는 경쟁을 논할 때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능력주의다. 아무리 평등을 강조해도 능력은 고려 안 할 수 없다. 공산당 선언에서도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일이 우리를 낙원으로 인도하는 길로 묘사된다. “무능한 사람들이 비켜나게 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하자는 이야기”로 능력주의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태도는 지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다. 어떤 자리든지 그 자리에 가장 잘 맞는 능력의 소유자가 차지하는 것이 공정이다.

     

    다만 능력을 평가하는 장치가 시험 하나만으로는 안 된다. 더 다양하고 깊은 방식으로 능력을 평가하는 수단을 갖출 필요가 절실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능력주의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 사회에는 순환 보직이라는 것이 있다. 능력 이외에 고려할 것들이 많고, 그것들이 능력 이상으로 중요하게 다뤄지기 때문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순환 보직으로 해당 보직의 실력자를 잘 키우고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우리는 지금 능력주의를 부정하기보다는 능력주의를 제대로 정착시키는 일이 시급하다. 공정 자체의 의미를 따지는 일보다도 우선 선택적 공정에 빠지지 않을 윤리적 민감성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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