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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1. 9. 3. 07:38

    믿던 것들이 부정당하고 합의된 가치 체계가 무너지고 있다...
    狂氣 가득 찬 시대  내가 보는 세상이 미쳤나 보는 내가 미쳤나

     

    이낙연 전 총리와 김의겸 의원이 지난달 열린민주TV에 출연해 언론징벌법 통과를 주장하고 있다.

     

    언론징벌법 파동은 권력의 광란극에 다름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괴한 장면은 기자 출신 정치인들이 총대 메고 앞장선 대목일 것이다. 동아일보 출신 이낙연 전 총리는 “현직 기자라면 이 법을 환영하고 자청했을 것”이라 했다. 한겨레신문 출신 김의겸 의원은 징벌법이 통과해야 “기자의 언론 자유가 보장되기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그들도 일선 기자 시절엔 언론 자유를 애타게 갈구했을 것이다. 거악(巨惡)을 파헤치고 양심껏 쓸 자유에 목말라 했을 이들이 이젠 권력 앞잡이가 되어 기자들 족쇄 채우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들의 돌변도 기가 막히지만 자기 변절을 합리화시키려 내세운 논리가 더 소름끼친다. 거액 손해배상을 때린다는데 이를 ‘환영’하고 ‘자청’할 기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이낙연·김의겸 같은 이들의 정신세계를 의심해야 마땅하다 생각한다. 아무리 권력 맛이 달콤해도 제정신이라면 이럴 수 없다. ‘환영’과 ‘자청’을 강요받는 현직 기자들도 돌아버릴 지경이다. ‘징벌이 곧 언론 자유’라는 무지막지한 궤변 앞에 기자로서의 신념 체계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는다. 모든 기자가 다 그런 심정일 것이다.

     

    우리에겐 국민 다수가 동의한 절대적 가치 체계가 존재했다. 민주적 절차와 법치, 정의와 공정, 법 앞의 평등 등이 그것들이다. 언론 자유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믿음이 총체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민주화 이후 차곡차곡 쌓아온 국민적 합의를 권력과 그 주변의 홍위병 그룹들이 우왁스럽게 무너트렸다.

     

    민주주의는 신종 독재에 밀려나고 있다. 민주화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운동권 정권이 ‘문(文)주주의’로 불리는 변형된 독재 체제를 탄생시켰다. 진영 가르기와 권력 독점, 다수 의석에 의한 입법 독주, 홍위병을 동원한 여론 횡포로 민주적 가치를 허물고 있다. 대통령은 법 위에 군림한다. 대통령과 참모들이 울산시장 선거, 원전 경제성 조작에 불법 개입한 의혹이 드러났다. 하나 하나가 탄핵 사유지만 이 정권은 도리어 불법을 파헤친 검찰총장·감사원장을 ‘배신자’로 찍어 몰아냈다. 우리가 알던 세상이 아니다.

     

    대통령은 신성 불가침의 숭배 대상이 됐다. 대통령을 ‘세종대왕’에 견주고 ‘문재인 보유국’ 운운하는 낯 뜨거운 아부가 쏟아진다. 군사 전문가들도 생각 못 했는데 문 대통령이 직접 청해부대에 공중 급유기를 보내는 아이디어를 냈다고도 한다. 이쯤 되면 거의 신격화 수준이다. ‘문비어천가’가 일상적으로 울려 퍼지는 나라가 됐다. 우리는 민주화와 동시에 독재는 영원히 소멸했다고 확신했다.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모두가 평등한 나라에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법 앞에 열외인 새로운 특권 신분층이 존재하고 있었다. 정권 편에 선 검찰 간부와 공무원은 범죄를 저질러도 승진 가도를 질주한다. 여당 의원과 도지사는 기소돼도 재판을 질질 끌어 임기를 다 채우고 있다. 반칙과 특혜의 상징인 조국 전 장관은 급기야 ‘예수’ 반열에 올랐다. 입시 서류 조작 등이 유죄로 판명 났는데도 여권은 그를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로 미화하고 있다. 지켜보는 국민이 실성할 지경이다.

    이 정권은 세금을 아끼는 게 나쁜 것이란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다. 거꾸로 펑펑 쓰는 게 미덕이라 한다. 선거만 다가오면 온갖 명분을 붙여 현금을 뿌리고, 경제성 없는 지역 민원을 대거 허가해주었다. 나라 빚을 5년 새 400조원 늘리고 건강보험·고용보험 적립금을 바닥냈다. 재정 건전성을 걱정하면 “곳간에 쌓아두면 썩는다”는 희한한 논리를 대며 더 펑펑 써야 한다고 한다. 나랏돈을 아껴 후대에 물려줘야 한다는 오래된 상식이 무너졌다.

     

    우리는 정부의 거짓말은 범죄라고 여겼다. 이 정권은 ‘공적(公的) 거짓말’을 뉴 노멀로 만들었다. 집값이 급등해도 “부동산은 안정”이라 하고 서민 경제가 무너져도 “정책 성과가 나타났다”고 한다. 일자리 참사를 가리려 통계에 손을 대고, 가짜 일자리를 양산해 고용 수치를 분식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숨어서 쉬쉬 하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공개적으로 가짜 뉴스를 퍼트리고 있다. 명백한 거짓말도 반복하면 사실처럼 된다는 게 나치의 선전술이었다.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옳고 그름이 뒤집힌 가치 전복(顚覆)의 현실을 맞고 있다. 당연하다고 여긴 것, 맞는다고 믿었던 것들이 부정당하고, 정상이 비정상에, 상식이 비상식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믿었던 것과 현실이 다르면 인지 부조화의 착란에 빠진다고 한다. 어떤 언론법 기사에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댓글이 달렸다. 하도 희한하게 돌아가니 어느 쪽이 실성했는지조차 헷갈릴 지경이다. 내가 보는 세상이 미쳤나, 보는 내가 미쳤나. 이 광기(狂氣) 가득 찬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국민의 심정이 이럴 것이다.

     

    2021년 9월 3일  조선일보 박정훈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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