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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을 부끄럽게 만든 죄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1. 9. 4. 06:58

    이제 정말 부끄러워지기 시작한다. 이 나라 국민이라는 사실이 그렇다. 태극기 부대가 야단법석을 부릴 때, 태극기가 쳐다보기조차 싫어지던 그때보다도 더하다. 참으로 민망하고 낯뜨거워서 고개를 들기 힘들다.

    ‘민주 유공자 예우법’이 발의됐을 때 실소가 나왔다. 386 운동권들의 셀프 특혜가 가소로웠다. “대학 때 몇 년 학생운동한 경력으로 국회의원 된 자들이 자식들에게까지 유공자 특혜를 세습하려 한다”는 비판 그대로였다.

     

    운동권 셀프특혜, 윤미향 보호  이런 몰상식법 발의 가능케 한  진영논리 정점은 ‘언론징벌법’

    모든 게 대통령 책임으로 귀결

     

    하지만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에 의해 바로잡혔다. “이러려고 민주화 운동 했냐”며 갖고 있던 유공자 지위까지 반납한 김영환 전 의원 같은 사람들이 있어 나라 꼴이 살았다. 설훈 의원을 대표로 여당 의원 73명이 발의한 법안은 철회될 수밖에 없었다.

     

    ‘5.18 역사 왜곡 처벌법’이 발의됐을 때는 설마 했다. 역사를 왜곡하는 거야 분명 잘못이지만, 역사를 달리 해석한다고 처벌하는 건 더 큰 잘못인 까닭이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며 국가보안법에 맞섰던 투쟁이 5.18 민주화운동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토록 반대하던 국가보안법과 똑같은 논리 구조로 5.18을 부인·비방하면 처벌하는 법을 만든다니 이런 난센스가 어디 있나 말이다.

     

    그런데도 결국 이 법은 통과되고 말았다. 거여(巨與)가 힘으로 밀어붙였고, 법안을 대표 발의한 양향자 의원은 “역사 왜곡은 나라의 정체성을 흔드는 정신적 내란죄”라는, 독재자나 입에 담을 만한 발언을 서슴없이 외쳤다. “내 생각과 다르면 모두 반역”이라는 말과 다름 아니다. 그런 사람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을 말하면 처벌하는 법안을 발의했던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본 욱일기를 사용하면 10년 이하 징역이나 2억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는 역사왜곡방지법안은 이에 비하면 귀엽다. 조국 전 법무장관이 죽창가를 외치며 반대자를 친일파로 몰 때마다 후렴구를 넣던 김용민 의원 작품이니 말이다.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고무하는 행위를 막겠다는 건데, 국가보안법의 찬양·고무죄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런 머리들로 국회에서 역사를 논하는 게 오히려 역사를 왜곡시킨다는 것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어이없는 건 ‘위안부 피해자법’이다.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 위안부 관련 단체에 대해 사실을 적시해 명예를 훼손하는 걸 금지하고 있다. 위안부 후원금 유용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윤미향 의원이 공동발의자로 참여한 법안이다. ‘윤미향 보호법’이란 말이 안 나올 수 있겠나. 오죽하면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까지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섰을까. 당연히 철회됐지만 이런 법안을 발의하는 의원들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하이라이트는 ‘언론중재법’이다. 생각나는 대로 조문을 뜯어고쳐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기도 어렵지만, 언론의 고의·중과실에 의한 허위 보도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피해액의 최대 5배까지 부과하는 게 주된 내용이다. 말이야 맞다. 일부러 허위 조작 보도를 해서 피해를 입혔다면 5배 아닌 50배의 손해배상을 해도 마땅할 터다. 하지만 고의·중과실의 개념이 모호한 데다, 언론 스스로 고의·중과실이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아예 기사를 볼 수 없게 만드는 열람 차단 청구권 또한 설명이 안 된다.

     

    ‘보복적’, ‘충분한’, ‘회복하기 어려운’ 등 주관적 해석의 가능성이 다분한 표현들을 보면 기가 막히다. 법안으로서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자기고백일 뿐이다. 징벌적 배상제도를 국내 최초로 언론에 도입하는 것에서는 언론 탓에 치부가 드러나는 자들의 조급함이 묻어난다.

     

    이 모든 것이 언론의 비판 보도를 봉쇄하고 언론의 권력 감시 기능을 무력화하려는 의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국제적인 언론단체들은 물론 유엔인권위원회까지 문제를 삼을 정도다. 정말 창피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 가슴 답답하다. 이 모든 탈상식과 난센스들이 대명천지 의사당에서 벌어지는 건, 이 나라가 진영논리의 늪에 깊이 빠져있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은(또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면 금방 내 발목을 붙잡게 될 무리수를 강행하는 어리석음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이 나라가 이 지경까지 된 것은 편 가르기를 심화시켜온 현 정권의 책임이 크다. 그리고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은, 그 책임은 최종적으로 오직 한 사람에게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설훈이 나서든 김용민이 총대를 메든, 그들은 그걸로 그만이다. 그 모든 책임은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이 져야 할 짐이다. 대통령에게 최종법안에 서명하게 하거나, 아니면 거부권을 행사하게 하는 이유가 다른 게 아니다. 책임을 지란 뜻이다.

     

    자기를 위한 서명이든, 자기편을 위한 서명이든 모두 대통령 자신의 책임으로 남는 것이다. 어떠한 허물도 서명으로 지워지지 않는다. 허물을 가리려 한, 그래서 더 국민을 부끄럽게 만든 또 하나의 책임만 더해질 뿐이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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