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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이 그리 우스운가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1. 12. 18. 07:40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감탄고토(甘呑苦吐)’는 요즘 말로 ‘K-사자성어’다. 대부분의 사자성어와는 달리 우리 속담을 한역한 것이다. 중국 명나라 때 속담집 『이담(耳談)』에, 정약용이 우리 속담을 추가해 펴낸 『이담속찬(耳談續纂)』에 나온다. 다산은 이런 해설을 달았다. “이전에 달게 먹던 것을 지금은 쓰다고 뱉는다. 사람은 이익에 따라 교묘히 바뀐다.”

    감탄고토를 인간의 보편적 성정(性情)으로 본 것이다. 사실 그렇다. 화장실 갈 때와 올 때가 다른 게 인지상정인 거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비판도 정당하다. 인간 속성이 그렇다 해서 그런 행태에 대한 비난까지 피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이해 당사자가 많은 경우 비판 강도도 따라 커진다. 이번 수능시험 문제 오류처럼 말이다. 비교할 개체 수가 음수(陰數)가 되는 초현실적인 문제도 그렇지만, 이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태도가 더 비난받아 마땅하다.

     

    평가원은 “문항의 조건이 완벽하진 않아도 학업 성취 수준을 변별하기 위한 타당성이 유지된다”는 역시 초현실적 논리로 오류 지적을 묵살했다. 평가원은 2008년 수능 복수정답 논란 때도 오류를 인정하지 않았었는데(그것이 그들이 사는 법이었던 거다), 그때 대학교수로서 분연히 비판했던 게 이번에 사표를 쓴 강태중 평가원장이었다. “채점 전 소수의 학생이 이의제기했을 때 타당한 증거로 좀 더 일찍 검토했어야 한다”고 말이다. 13년 세월이 그렇게 만들었겠지만, 초심을 지키지 못하고 책임을 얼버무리다 불명예 퇴진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정도는 그래도 그러려니 할 수도 있다. 인지상정을 말하던 다산도 놀라 넘어질 만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우리네 여당의 대통령 후보다. 온 국민이 이해 당사자인 문제를 놓고 화장실 갈 때와 올 때가 달라도 너무 다른 까닭이다. 180도 말을 뒤집는 건 물론, 화장실을 다녀온 사실조차 부인할 때는 듣는 사람이 난감할 지경이다.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이재명 후보의 감탄고토 평가는 가히 기네스북감이다. 대구 가서 “존경하는 박근혜 대통령님”이라고 하더니, 나흘 뒤 “존경하는 대통령이랬더니 진짜 존경하는 줄 알더라”고 말을 바꿨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쿠데타와 5·18만 빼면 잘했다는 호남분들도 많다”고 말했다 곤욕을 치른 야당의 윤석열 후보를 겨냥해 “(살인강도도) 살인·강도를 했다는 사실만 빼면 좋은 사람일 수 있다는 말이냐”고 비판한 이 후보였다. 그러더니 본인이 경북에 가서는 “3저 호황을 잘 활용해 경제가 제대로 움직이게 한 것은 성과가 맞다”고 했다. “윤석열 말과 뭐가 다르냐”는 비판을 받자 이틀 뒤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자”라고 또 뒤집었다.

     

    이재명식 유연성과 실용주의라지만, 국민을 바보로 알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자기부정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뒤집힌 거라도 말은 된다. 대장동 의혹으로 넘어가면 그야말로 ‘말인지 XX인지’ 모를 상황이 돼버린다.

     

    이 후보는 “내가 사업 설계자”라고 누누이 강조해왔다. 하지만 ‘화천대유’ 관계자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단군 이래 최대의 민간개발 회수 치적’이 ‘단군 이래 최대 스캔들’로 변질돼가자, 국민의 힘 인사가 도둑 설계를 했다고 주장을 바꿨다. 최종 승인자가 자기였는데도, “노벨이 화약 만들었다고 9·11 테러를 설계한 거냐”며 언성을 높였다.

     

    자신이 성남시장 때 성남도시개발공사 개발본부장으로 있던 인물이 구속영장이 청구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데 대한 반응에도 입을 다물 수 없다. “몸통은 놔두고 엉뚱한 데를 자꾸 건드려서 이런 참혹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하는 아쉬움이 있다.”

     

    대장동 특혜 의혹의 핵심이자 이 후보의 측근으로 알려진 유동규 전 성남도개공 사장 직무대리가 구속되자, “한국전력 직원이 뇌물 받으면 대통령이 사퇴하냐”며 스스로 대통령급이 돼 빠져나갔다. 이 후보가 자기 말처럼 의혹과 무관하기만 하다면, 이런 엽기 언어들도 다 괜찮다. 오히려 정치인한테 꼭 필요한 유머 감각일 수 있다. 최근 문제가 된 아들의 불법 도박도 넘어가 줄 수 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고, 내 맘대로 안되는 게 자식이다. 그것도 인지상정인 거다. 책임질 건 성인인 아들이 책임지면 된다.

     

    치명적인 뒤집기는 공약에서 나온다. 기본소득, 국토보유세, 재난지원금 등 국가 경제를 좌우할 정책들이 한순간에 뒤집혀 버린다. “국민이 반대하면 안 한다”는 거라지만, 그렇게 쉽게 버릴 것 같으면 처음부터 꺼내지 말아야 했고 옳다고 생각한다면 끝까지 국민을 설득해 관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신의 공약에) 반대하는 것은 악성 언론과 부패정치 세력에 놀아나는 바보짓”이라고 극언하더니, 하루아침에 국민이 반대해서 안 한다면 국민이 바보라는 얘기가 아니고 뭔가. 그런 것이 바로 포퓰리즘이요, 독재의 다른 얼굴인 것이다. 공약을 바꾸는 게 그리 쉬운데, 자기 이익을 국민 뜻으로 포장하는 건 얼마나 쉽겠나 말이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고 표를 줄 수 있겠나.

     

    이재명 후보의 적은 다른 사람 아닌 이재명이다. 자신 안의 ‘또 다른 나’를 다스리지 않으면, 그래서 초점이 이중으로 겹치지 않는 선명한 이재명을 보여주지 못하면, 그렇게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면 그의 대권 꿈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할 뿐이다. 국민은 그가 생각하는 만큼 우습지 않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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