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2017년 대선 공약 중 가장 와 닿았던 것은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로 옮기겠다는 선언이었다. 문 대통령이 마음에 없지만 멋지게 들리는 말을 이토록 그럴듯하게 하는 줄은 모를 때였다. 그런데 이 공약을 반기는 마음 한편에선 과연 지켜지겠느냐는 의문도 들었다.
청와대 전경/조선일보 DB
한국에서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놓고 모든 사람이 크고 작은 착각을 갖고 있지만 이 자리에 대해 가장 큰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 자신이다. 필자는 이를 ‘프레지던트 해저드(함정)’라고 이름 붙인 글을 쓰기도 했지만, 그저 보통 사람이거나 조금 나을 뿐인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순간 자신이 내렸던 수많은 주요 결정이 다 옳았다는 착각에 빠진다고 한다. 역대 대통령을 옆에서 보았던 여러 사람의 증언이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갑자기 대통령을 무슨 신(神)이나 된 듯이 떠받들기 시작한다. 이런 현상은 후보가 되는 때 시작되지만 대통령이 되면 차원이 다르게 벌어진다.
그렇게 돌연 구름 위로 올라간 대통령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가 청와대라는 장소다. 청와대는 장소만이 아니라 위세까지 조선시대 왕궁이 그대로 이어진 곳이나 마찬가지다. 일반 사회와 완전히 격리돼 그 자체로 신비감을 주는 구름 위의 집, 그래서 대통령 권력을 실제 이상으로 증폭시키는 곳, 한국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잘못된 오해가 켜켜이 쌓인 권부, 공직자들에게 BH(블루 하우스)라는 암호명으로 불리며 절대 권위와 함께 두려움을 주는 곳, 공무원들이 문서는 물론 대화에서도 그 이름을 못 부르고 VIP(대통령)라고 칭하게 만드는 곳, 허락된 극소수만 들어올 수 있고 들여보내 주면 그 자체로 감사해하는 그곳에서 대통령은 왕처럼 만족스럽고 편안하다. 그래서 문 대통령이 청와대 주인이 됐을 때 ‘청와대에서 나오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정말 지키겠느냐고 반신반의했던 것이고 결국 ‘혹시 했는데 역시’가 되고 말았다.
이런 곳에 살면서 왕 같은 대접을 받으면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자신이 무언가 특수하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역대 대통령들이 그토록 무오류를 고집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을 증오했던 것은 이런 환경에선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권세의 종말은 불과 수년 안에 필연적으로 오는데도 역대 대통령들은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환상 속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니 불법도 저지른다. 결국 만신창이가 됐다. 이 역시 현실과 동떨어진 청와대라는 장소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어느 분이 한국 대통령은 법률상 행사할 수 있는 인사권의 몇 배를 휘두르고 있다고 분석해 쓴 글을 보았다. 주식시장에 공개돼 주주가 주인인 주식회사 대표 선임까지 간섭하는 지경이다. 한국은 대통령이 이렇게 왕과 같은 전제적 권력을 행사하면서 발전을 견인해야 하는 그런 단계의 나라가 이미 아니다. 국제화된 시민들이 글로벌 기업과 함께 세계와 촌각을 다투며 호흡하고 있다. 대통령을 포함한 관료는 이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뒤처졌다. 5G를 “오지”라고 부르는 대통령이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그런 사람이 국민과 기업 위에서 왕갑질을 한다.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로 몰려오는 부류는 점점 더 삼류화, 아마추어화하고 있다. 그렇다고 대통령을 뽑지 않을 수도 없다. 우리 정치의 최대 과제는 어떻게 이 ‘대통령’이란 자리를 지금의 왕에서 행정부 책임자라는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느냐일 것이다.
현실적으로 개헌은 어렵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이 스스로의 결단으로 청와대에서 나오는 방법으로 청와대를 없애는 것은 제왕적 대통령제 폐지의 매우 상징적이면서도 실질적인 첫 단계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대통령직에 대한 국민과 공직자들의 인식이 달라질 것이다. 대통령은 그 국민의 시선을 무시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경호상의 문제를 걱정한다. 대통령 경호 경험자에게 들으니 대통령 집무실을 서울 광화문 정부청사로 옮겨도 경호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고, 있다 해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가장 문제는 현재 청와대에 있는 유사시 지휘용 벙커라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의지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 뿐이다.
현재 대선 후보 중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대통령실을 광화문 정부청사로 옮기겠다고 공약했다. 윤 후보는 “제왕적 대통령의 잔재를 철저히 청소하겠다”며 임기 첫날을 청와대 아닌 정부청사에서 시작하겠다고 했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도 같은 공약을 국민에게 했으면 한다. 누가 먼저 했느냐를 따질 일이 아니다. 청와대는 대통령제처럼 수명이 다했고 이제 흉물화하고 있다.
이번엔 ‘혹시가 역시’로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문재인에게 한 번 속은 국민을 또다시 속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되든 저 청와대를 역사의 유물로 만들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우리 정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