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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지명인 ‘Seoul’ 알파벳으로 처음 표기한 지도예요스크랩된 좋은글들 2022. 6. 9. 07:27
충남 당진시의 솔뫼성지에서 지난달 초부터 ‘김대건, 조선을 그리다’ 전시가 열리고 있다고 해요. 김대건(1821~1846·세례명 안드레아) 신부가 만든 지도인 ‘조선전도’를 주제로 한 전시인데요. 솔뫼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가톨릭) 사제(司祭·주교와 신부를 함께 이르는 말)였고 지난해 탄생 200주년을 맞은 김대건 신부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또 그가 제작했다는 조선전도는 과연 어떤 지도였을까요?
◇영양실조 소년, 조선인 첫 사제가 되다
“어허, 저렇게 허약한 아이가 어찌 그 먼 곳에 가서.” 1836년(헌종 2년), 중국으로 떠나는 조선 소년들을 보며 주변의 천주교인들이 혀를 찼어요. 이 세 소년은 최양업과 최방제, 그리고 김대건이었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피에르 모방 신부가 뽑은 조선 최초의 신학생이었죠. 모방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뒤 신학교를 설립하려 했지만 당시는 천주교 박해가 심할 때여서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에 이들을 보내 신학 교육을 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천주교는 1784년(정조 8년)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전래됩니다. 중국에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이 귀국해 천주교 공동체를 설립했던 것이죠. 이는 김대건이 태어나기 37년 전의 일이었어요. 김대건은 증조부 때부터 독실한 신도였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은 박해를 피해 경기 용인으로 이주했고, 가난한 탓에 김대건은 어려서부터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힘들어했대요. 그래서 유학을 떠날 때도 허약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세 명 중 최방제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마카오에서 소요(騷擾·여러 사람이 폭행이나 파괴를 통해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가 일어나 잠시 필리핀으로 피신하는 상황에서도 김대건은 학업에 정진했어요. 그는 선교사들로부터 신학·라틴어·프랑스어·서양철학을 배웠습니다. 마침내 24세 때인 1845년 8월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주교가 사제·부제를 임명하는 일)을 받았습니다. 조선인으로선 최초의 사제였죠.
◇조선 땅 독도를 서양에 알리다
김대건은 사제 서품을 받기 전부터 국내에 몇 차례 잠입했어요. 조선교구장인 페레올 주교가 “선교사가 몰래 입국할 길을 개척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죠. 1845년 10월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김대건은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 활발한 전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면서 곰곰이 생각했죠. ‘육로보다는 바닷길이 입국하기에 낫지 않을까?’
이 무렵 그는 새로운 정보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 해안 근처까지 오는 중국 어선들이 있다고? 그렇다면 그들을 통해 이것을 전달할 수 있겠군!” ‘이것’이란 편지와 조선 입국을 위한 지도였는데, 이 지도가 바로 조선전도였습니다.
김대건이 그린 조선전도는 현재 원본과 사본을 포함해 모두 5장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등에 소장돼 있습니다. 이 지도는 한반도의 지리는 물론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사실을 서구에 알린 지도로 평가받습니다. 조금 자세히 알아볼까요?
1860년대 조선의 지리학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를 포함해 당시의 지도는 실제 측량에 의한 실측도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축적된 방대한 지리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했고, 한반도 모양을 실제와 가깝게 그릴 정도로 수준 높은 것이었습니다. 실학자 정상기(1678~1752)가 김정호 이전의 대표적인 지리학자였는데, 그가 제작한 ‘동국지도’ 등이 김대건의 조선전도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죠.
조선전도의 특징은 조선의 각 지명을 로마자로 표기했다는 점이죠. 서울의 로마자 표기인 ‘Seoul’은 이 지도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울릉도(Oulnengto) 동쪽에 섬을 그리고 ‘우산(Ousan)’이라는 독도의 옛 이름도 명기했습니다. 독도를 조선 땅으로 표기한 첫 서양 지도는 1735년 프랑스인 당빌의 ‘조선왕국도’였지만, 그 지명을 중국식 발음으로 적었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조선전도야말로 ‘조선 땅 우산도(독도)’를 서양 세계에 제대로 소개한 지도였던 셈이죠.
◇평등 사상과 박애주의 실천
김대건이 그린 조선전도는 1846년 프랑스 교회 측에 전달됐습니다. 그러나 김대건은 황해도에서 바다를 통한 선교사의 조선 입국 방법을 찾던 중 그해 6월에 체포되고 말았어요. 한양으로 압송된 김대건에게는 ‘사악한 교리(천주교)에 물들어 나라에 반항한 죄’가 씌워졌죠. 천주교는 당시 나라에서 금지하는 종교였는데, 사제까지 됐으니 조정에서 보기엔 일급 범죄자였겠죠. 당시 “당신이 천주교인이오?”라는 관리의 물음과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는 김대건의 당당한 답변은 유명한 문답입니다.
그런데 김대건이 체포된 시점(1846년 6월)과 순교(1846년 9월) 사이에 3개월이 걸렸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어·프랑스어·라틴어·중국어·스페인어 등 5개 언어를 구사할 뿐 아니라 지리학·조선학·측량학 등 다양한 학문을 습득한 김대건의 재능을 조정에서 눈여겨봤다는 것이죠. 훌륭한 인재임을 깨달은 조정에서 ‘천주교를 버리기만 하면 벼슬을 주겠다’고 회유했으나 김대건이 거절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 프랑스 함대가 한반도에 접근해 기해박해(1839년) 때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형된 것에 대해 항의했는데, 이는 김대건의 처형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846년 9월 16일, 김대건은 25세 나이로 새남터에서 순교했습니다. 다른 천주교 신자들도 함께 희생된 이 사건을 ‘병오박해’라고 불러요. 김대건은 순교 직전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1984년 성인(聖人)으로 선포된 그는 지난해엔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됐습니다. 짧은 삶을 살았지만 평등사상과 박애주의를 실천하고 조선전도를 통해 조선을 유럽 사회에 알렸다는 등의 이유였습니다.
[두 번째 사제 최양업]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나머지 두 학생 중 병오박해 뒤에도 살아남아 활동한 인물이 최양업(1821~1861·세례명 토마스)입니다. 김대건보다는 늦었지만, 1849년 서품을 받아 조선인 두 번째로 천주교 사제가 됐죠. 첫 번째 사제 김대건의 활동 기간이 1년 남짓이었던 데 비해, 최양업은 1850년부터 10년 넘게, 순교한 김대건 몫까지 사목(사제가 신도를 지도하는 일) 활동을 맡아 했습니다.
김대건을 ‘피의 순교자’, 최양업을 ‘땀의 순교자’라고도 하는데요. 최양업은 삼남(충청·전라·경상도) 지방의 공소(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예배소나 그 구역) 127곳을 모두 걸어서 다니는 등 온 힘을 다해 조선 천주교회 재건에 힘썼습니다. 끝내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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