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시절 촌에서 자란 나는 가정 형편상 서울로 진학할 형편이 못되었다 . 시골에서 복음 중학교에 들어갔다 . 그 학교는 서울 성서대학 창시자인 강태국 목사님이 아담의 에 덴 동산을 꿈 꾸며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야산을 이용하여 농도원 ( 農道園 ) 을 개척하고 , 이런 철학과 선교를 위해 복음중학교를 설립했지만 문교부로부터 정식인가는 받지 못한 학교였다 .
그곳에서 처음으로 성경시간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함이니라 ( 요한복음 3:16).‘ 는 복음을 들었다 . 또한 ’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는 말씀을 들은 것도 그 시절이었다 . 그러나 범사에 감사하기는커녕 학교에서 작업 시간이면 공부하러 왔지 일하러 왔냐고 불평을 했고 기도는 외면하고 있다가도 무슨 다급한 일이 있으면 그때만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라는 마태복음 7 장 7 절을 떠올리며 열 심히 기도 했다 .
그 학교 졸업할 즈음 서울에 정보통신요원을 양성하는 국립 체신고가 있는데 그 학교만 들어 가면 장학금을 받으며 고등학교를 다닐수 있다며 형님이 1958 년 2 월 중학교 졸업장도 없는 나를 무조건 서울로 데리고 갔다 . 졸업장이 없어 걱정이 되어 그것을 해결해달라고 기도했다 .
서울 가는 도중에 버스에서 중학생 60 명 모집에 한명도 없다는 중학교가 있다는 D 일보 신문기사를 봤다 . 그 기사를 보며 형님은 그 학교에 가서 사정하면 중학교 졸업장을 만들수도 있을 것이라 했다 . 정말로 그 학교 찾아가 졸업장을 만들어왔다 . 그렇게 하여 국립 체신고에 들어가 3 년간 국비생으로 장학금을 받으며 졸업했다 . 그것이 첫 번째 기도 응답이었다 .
다음 기도의 응답은 일은 회사 들어갔을 때 일어난 일이다 . 고등학교를 장학금 받고 졸업했기에 의무적으로 정보통신부 산하 기관에 근무해야했다 . 그래서 그 기간에 낮에는 직장 , 밤에는 대학생활을 하는 주경야독 생활로 의무기간을 때웠다 . 의무기간을 마친 후 한전으로 전직하려고 입사원서를 제출했다 . 하루는 걱정이 되어 기도하고 입사 시험 예상 문제집을 구하러 서점에 갔더니 꼭 시험에 날 것 같은 문제집을 발견하고 사와서 공부했다 . 시험장에 가보니 신기하게도 내가 집중적으로 봤던 문제가 그대로 출제되었다 . 그 덕분에 대졸공채로 당당히 입사했다 .
1998 년 국제 외환위기가 닥쳐 내가 맡고 있었던 전산업무가 외부로 넘어가 퇴직을 했다 . 퇴직한 후 마음속으로 잠시 방황하기도 했지만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니 감사하기도 했다 . 감사한 마음을 일부라도 사회에 환원한다는 생각으로 자원봉사를 하려고 결심했다 .
2002 년 11 월 한국 국제 협력단 해외자원 봉사요원으로 선발되었다 . 환갑을 넘긴 최고령자 로 선발되어 매스콤에 보도되었고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도 만나 봤다 . 그해 연말 특집방송 으로 KBS 방송에 나의 봉사 활동이 소개되었다 . 그렇게 스리랑카에서 현지인을 대상으로 2 년간 컴퓨터 강사로 자원 봉사를 하고 2004 년 말 귀국했다 .
2017 년에 대한민국 봉사대상 선발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원봉사센터에 찾아가 2002 년 11 월부터 2 년간 한국국제협력단원으로 스리랑카 해외봉사와 귀국 후 2005 년 10 월부터 그 때까지의 봉사활동 했던 내용을 첨부하여 신청했더니 2017 년 12 월 대한민국 자원봉사 대 상에 선발되어 국무총리 상을 받았다
2000 년 12 월 우연이 뚱 뚱보 독일 외무장관인 요시카 피셔의 달리기 자서전을 읽었다 . 그 는 달리기로 112Kg 체중을 일년 안에 37Kg 이나 감량했고 독일에서 유명한 아마추어 마라톤 선수가 되었다는 기사를 감명 있게 읽었다 . 50 대 후반이 되도록 조깅에는 한번도 경험이 없었던 내 자신에게 마라톤 도전장을 던졌다 .
2001 년 1 월 1 일부터 마라톤 전문용 시계를 가지고 하루도 빠짐없이 lKm 부터 연습을 하면서 거리를 조금씩 늘여나갔다 . 그 시계는 조깅할 때 맥박수를 범위를 정해 놓 을 수 있었다 . 빨리 뛰면 맥박수가 증가하는데 너무 빨리 힘들게 뛰면 천천히 뛰라고 경고음을 내보내고 너무 천천히 뛰면 빨리 뛰라고 경고음을 내주었다 . 3 월 4 일 서울 마라톤 클럽에서 주관하는 마라톤대회 10Km 코스에 처음 참가한 이후 I 10 월 21 일 조선일보 춘천마라톤대회 풀코스를 완주했고 그해 11 월 11 일 63.5Km 울트라 마라톤을 완주했고 2009 년 4 월 에는 미국 보스톤 마라톤대회에도 참가하여 완주했다 .
다음으로 도보 국토종단에 도전했다 . 2012 년 봄 , 지도를 구입해 해남 땅끝 마을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적선을 그었다 . 갈 수 있는 도로와 숙박 가능한 곳에 동그라미 쳤다 . 해남 땅끝 마을부터 광주 , 순창 , 진안 , 무주 , 문경 , 제천 , 평창 , 인제를 거쳐 통 일전망대에 도착하는 도보 국토종단을 계획했다 . 혼자 하는 게 무리라 생각했지만 성공을 장담할 수 없어 아무에게도 권하지 못했다 . 우리 교회 지인이 이 소식을 듣고 같이 따라나섰다 .
5 월 1 일 , 해남 땅끝 마을에 도착하여 그날로부터 걷기를 시작했다 . 출발은 순조로웠다 . 그런데 순창에 닿을 때였다 . 숙소를 찾았지만 공교롭게 지역 행사 때문에 모두 사전 예약돼 있어 잘 곳을 구할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다가 교회를 발견하고 찾아가 염치 불고하고 목사님께 ’ 재워 주십쇼 !’ 했다 . 목사님은 흔쾌히 받아 주었다 .
기필코 완주하겠다던 동행자는 보은에서 두손을 들었다 . 할수없이 혼자 걸어야했다 . 대신 주말이면 집사람이 내려와 함께 걸어 주었다 . 도보 여행이 처음인 아내의 발은 날이 갈수록 물집과 상처로 가득했다 . 무척 미안했지만 고맙단 말조차 못했다 . 아내가 돌아가면 다시 혼자 걸었다 . 힘들어 포기하고픈 유혹도 있었으나 그때 마다 포기하지 않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 마침내 21 일 만에 통 일전망대에 도착하니 , 옛 회사 사우들이 나와서 응원해주었다 . 해냈다는 성취감에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 하나님이하십니다 . 하나님 감사합니다 .
이번에는 전국자전거일주에 도전했다 . 서올 집에서 출발하여 강원도 고성 최 북단마을인 명파 초등학교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동해안 차도를 따라 포항 , 그리고 부산까지 , 다시 남해안 도로를 따라 해남 땅끝 마을까지 , 그러고 서해안 도로를 따라 인천까지 와서 아라뱃길 자전거 도로를 따라 서올 집으로 오는 코스를 잡았다 .
만약의 사고에 대비해 전국자전거일주 패찰을 만들어 집사람의 전화번호를 적어놓았다 . 결 국 10 월 7 일 9 시에 집을 떠나 29 일 오후 8 시에 집에 도착했다 . 자전거 일주를 하면서 인 상 깊었던 일은 순천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을 찾아가면서 수 퍼 마케트에 들어가 길을 물으니 친 절하게 가르쳐 주면서 팔고 있는 물건을 공짜로 안겨주었다 . 보령에서는 식사하면서 숙박할 모텔을 물으니 식사하던 모텔사장이 ” 어르신이 고생한다 " 며 무료로 방을 제공해겠다고 했고 , 그 이야기를 들은 식당주인도 식사비를 받지 않았다 .
지금은 다 지난 추억이긴 하지만 지난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께 감사함을 느낀다. 이제 남은 삶도 매사에 감사며 기도하며 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