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11월 27일 부산역 앞 대화재로 주택 수천 채가 불탔고 이재민 3만명이 거리에 나앉았다. 휴전 직전 유엔군 제2군수사령관으로 부산에 도착한 리처드 위트컴(1894~1982) 장군이 그 참상을 보고 이재민을 불러 모아 음식을 나눴다. 군수물자 전용 죄목으로 워싱턴 청문회에 소환되자 이렇게 말했다.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
리처드 위트컴(Richard S. Whitcomb) 장군/위트컴희망재단
▶이후 한국에서 그의 삶은 인류애의 실현 과정이었다. 전쟁으로 환자가 넘쳐나자 AFAK(미군대한원조) 기금을 지원받아 160병상을 갖춘 3층짜리 건물을 지어 준 것이 지금의 메리놀 병원이다. 건축비가 모자라자 휘하 장병에게 ‘한국사랑기금’이란 이름으로 월급의 1%를 기부하자고 호소했다. 부산의 유엔평화기념관엔 “가장행렬을 해서라도 기금을 모으겠다”며 군복 대신 갓과 도포 차림으로 거리를 누비던 그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사람들은 위트컴 장군을 ‘파란 눈의 성자(聖者)’라 불렀다. 부산대 발전의 초석도 그가 다졌다. 1953년 종합대로 승격한 부산대가 캠퍼스를 마련하지 못해 애태우자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50만평을 무상으로 제공하도록 건의해 확보한 터가 지금의 부산대 캠퍼스다. 대학 건물 지으라며 25만 달러 원조금도 마련해 줬다. 대학 정문까지 이어지는 1.6㎞ 진입로도 그가 닦았다.
▶전역 후엔 한국에 남아 한미재단을 설립하고 전쟁고아 돌봄 사업을 시작했다. 평생 독신이었던 그가 고아들에게 줄 선물을 들고 천안의 한 보육원을 방문했다가 그곳 원장을 만나 결혼한 이가 한묘숙(1927~2017) 여사다. 별세하며 아내에게 유언 두 개를 남겼다. 하나는 “나를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것이었고, 나머지는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를 찾아 고향에 보내라”는 것이었다. 한 여사는 ‘위트컴 희망재단’을 만들어 재산과 연금까지 쏟아부으며 유해 봉환에 애쓰다가 부산 유엔기념공원의 남편 곁에 묻혔다.
▶위트컴 장군에게 지난 11일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한국 정부는 별세 40주년이 돼서야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의 한국 사랑을 기리는 조형물 건립 추진 시민위원회도 지난주 발족해 모금 운동에 나섰다. 내년 11월 11일 부산 평화공원에서 제막식을 할 계획이다. 대한민국이 전쟁 폐허를 딛고 번영을 이루기까지 우리의 피땀만 흘린 것이 아니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낯선 땅에 찾아와 인류애를 실천한 위트컴 장군 같은 이들 덕분이기도 하다. 그 숭고한 사랑과 희생의 이야기를 찾아내 기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