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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둠의 시대에 기본을 생각하며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2. 12. 24. 05:03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안반데기 위로 펼쳐진 은하수./김영근 기자

    오직 사람만이 시간을 분별(分別)한다.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을 세밑과 새해로 나누어 의미를 부여한다. 새해의 결의는 모든 것을 마멸시키는 시간의 풍화작용에 맞서는 안간힘이다. 그런데 새해가 다가와도 긍정의 언어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각자도생이 한국인의 생존 문법이 되어가고 있다. 민생고와 진영 대결의 소용돌이가 희망을 삼켜버렸다. 희망을 잃어버리는 순간 진짜 재앙이 시작된다. 재난(disaster)은 별(aster)이 없는(dis) 암흑의 상태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별이 사라져버린 어둠의 시대가 우리를 엄습하고 있다.

     

    출구가 막힌 현실은 우리가 월드컵 축구에 열광한 이유를 보여준다. 어릴 때 성장 장애로 고통받던 메시(L. Messi)가 온갖 어려움을 뚫고 우승컵과 함께 환호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땀과 헌신이 만든 극적인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드컵에서 우승했어도 아르헨티나 민생의 해피엔딩은 요원하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연말 아르헨티나 인플레이션율은 100%를 넘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 우리도 잔치는 끝났고 신산한 현실이 남았다. 쓰라린 삶의 고통에 직면하는 자세가 인간의 용기를 입증한다.

     

    대한민국은 계량적 잣대로는 이미 선진국이다. 그러나 성공의 뒤안길엔 르상티망(ressentiment·약자와 패자가 강자와 승자에게 품는 질투와 원망)이 가득하다. 한국 사회의 불공정과 저신뢰가 만들어 낸 르상티망의 감정이 기쁨을 앗아가 버렸다. 전쟁이 되어버린 정치와 디지털 포퓰리즘이 무한 증식시킨 원한(怨恨)과 분노가 한국인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자신이 서있는 곳에서 자족하고 자긍(自矜)하는 마음자리의 기본은 우리 사회에서 희귀한 자질이 되어 버렸다.

     

    한국 사회에서 언어의 객관성과 신뢰성은 붕괴 직전이다. 옳고 그름을 토론하고 사실과 거짓을 판별하는 공론 영역이 마비 상태다. 진영과 당파에 따라 흑이 백으로, 백이 흑으로 순식간에 표변하지만 보수·진보 그 누구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주고받는 말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면 진정한 정치의 가능성도 소멸한다. 총체적 아노미 상태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인 삶의 기본이 무너져가고 있는 것이다.

     

    진영과 당파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치적 신념과 소속감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연대 의식을 북돋아줄 수 있다. 하지만 주관적 신념이 객관적 사실과 이성을 압살하면 망상과 파멸을 부른다.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가 한 땅을 두고 정면에서 부딪친 십자군 전쟁이 생생한 사례다. 우리 신념이 옳다며 다른 신념을 물리적으로 말살하려 들면 그게 바로 역사의 반동이다. 21세기 한국의 좌·우 진영 대립에도 중세 암흑기의 족쇄가 뚜렷하다. 조선 성리학자들이 경쟁 당파를 사문난적(斯文亂賊·진리를 어지럽히는 도적)으로 몰아 숙청했을 때 중세 한반도에 어둠이 짙게 깔렸다.

    민주 다원 사회에선 다른 신념들이 정면충돌할 때 토론과 검증이 우선이다. 사실성과 합리성의 잣대로 신념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우리 진영의 확신과 다를지라도 전문가 공동체가 합의한 객관적 검증 결과는 인정하는 게 과학적 태도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선 양심을 내세워 명명백백한 사실을 유린하곤 한다. 세월호 참사와 천안함 폭침, 코로나 사태나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논의가 소모적 음모론으로 비화하는 이유다. 현대 과학은 절대적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과학과 민주주의의 위대함은 다른 생각을 경청하고 나의 오류를 인정하는 개방성에서 나온다. 결국 현대인의 삶에서 기본 중 기본은 사실성과 합리성이다. 우리는 사실과 합리성이 창출하는 양식(良識)으로 중세의 어둠을 부수고 현대 시민으로 승격한다. 사실의 준엄함을 부인하면서 의인(義人)을 자처하는 사람은 중세의 포로다.

     

    축구 선수 손흥민과 메시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삶의 교훈을 증명한다. 화려한 개인기보다 중요한 것은 협업이고 팀플레이다. 작은 것들에 성실할 때 기본이 닦이고 큰 것이 이루어진다. 역지사지가 창조하는 사회적 신뢰와 관용이 르상티망을 치유한다. 사실과 합리성을 나침반 삼아 창공의 별을 바라볼 때 잃어버린 기쁨이 회복된다. 증오와 절망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모든 살아남은 자의 의무다. 인간은 언제나 도상(途上)에서 고투(苦鬪)하는 존재다. 희망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지금 그리고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 있다.

     

    2022년 12월 24일  조선일보 윤평중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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