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여성 정치, 간판을 내려라
    스크랩된 좋은글들 2017. 1. 5. 08:03

                                        여성 정치, 간판을 내려라


        "우리 정치가 부패의 악순환을 되풀이한 건 남성 중심 문화 때문이다. 여성이 맑은 정치의 새판을 짜야 한다."  이 비장한 선언이 나온 건 17대 총선을 목전에 둔 2003년 겨울이다. 여성의 정치 참여를 늘리기 위해 여성계가 똘똘 뭉쳤다. '여성 100인 국회로 보내기'란 기치를 걸고 각 정당에 여성 후보 공천을 압박했다. 국회의원 후보 공천 시 비례대표 50%, 지역구 30%를 여성에게 할당하라 건의했고, 받아들여졌다. 효과는 컸다. 16대 국회에서 15명에 불과했던 여성 의원이 17대에서 39명으로 급증했다. 이들은 유림의 강력한 저항에 맞서 숙원이던 호주제 폐지를 일궈냈다. 20대 총선에선 51명으로 역대 최다 당선자를 배출했다. 3선 이상 다선(多選) 의원이 11명, 4개 정당 중 두 곳의 당대표가 여성이다. 여성 정치가 꽃피는 듯했다.

     

    그러나 2016년은 여성 정치가 꽃망울을 터뜨리기도 전에 썩어 짓밟힐 수 있다는 위기감을 몰고 왔다. 늘어나는 여성 정치인 수는 그야말로 숫자일 뿐 과연 여성 정치가 남성 정치의 폐단을 막는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게 했다. 대한민국 최초 여성 대통령은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이 여성 고유의 강점이 아니란 걸 온몸으로 보여줬다. 도덕성에서도 결코 우위에 있지 않았다. 2015년 한명숙 전 총리가 뇌물 수수로 구속된 데 이어 여성운동 산실이라는 이화여대에서 권력형 입학 비리가 터져 나왔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여성 지도자의 언행이 얼마나 천격(賤格)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줬고, 이혜훈·나경원 의원과 조윤선 장관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세간의 비아냥거림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공개 석상에서 볼썽사납게 맞부딪쳤다.

      

    앞으로 100년간 여성 대통령 나오긴 글렀다는 조롱에는 여성 단체들 침묵도 큰 몫을 했다. 굿판, 주사, 비아그라, 섹스 동영상까지 여성 혐오의 극치를 보여준 대통령 탄핵 의결 과정에서 내로라하는 총리·장관을 배출한 여성 단체들은 하나같이 침묵으로 일관했다. 처음도 아니다. 국회의원 시절 박근혜를 반라(半裸)의 여배우로 희롱한 패러디 사건, 유부남과의 밀회 운운하며 대통령을 모독한 산케이신문 보도, 입만 열면 성적(性的) 비하 욕설을 퍼붓는 북한 정권엔 유독 너그러웠던 그들이다. 진영 논리에 빠진 이들의 방임은 부메랑이 되어 후배 여성들에게 날아가 꽂힐 것이다. 앞으로 마리아 테레사급 성녀(聖女)가 아니면 최고 권력에 도전장 내밀 여성이 몇이나 될까.  

     

    이 총체적 난국은 한국의 여성 정치가 걸음마 수준이란 걸 보여준다. '유리천장'은 뚫고 난 뒤가 더 위험한 법이다. 방심하는 순간 깨진 유리 조각들이 급소를 향해 날아든다. 얄팍한 양성 평등 의식 갖고는 어림없다. 더 강하고 영리해져야 한다. 권력 의지 못지않은 실력을 갖춰야 하고 말 한마디, 몸가짐 하나도 전략이 돼야 한다. 그것이 세(勢)를 이루려면 당리당략을 넘어선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 국회에 입성했다 하면 여성 정책은 나 몰라라, 권력에 줄서기 하며 제 밥그릇 찾는 데 급급해서는 여성 정치에 희망 없다. 나 혼자 살겠다고 남성 정치인들의 얼굴마담 혹은 총알받이가 되어 소모되고 버려지려거든 '여성'이라는 간판부터 내려라.

     

                           2017년 1월 5일 조선일보김윤덕 문화부차장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