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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민족을 구할 강력한 지도자를 국민은 간절히 바라고 있다스크랩된 좋은글들 2023. 3. 2. 11:11
나라와 민족을 구할강력한 지도자를 국민은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1. 서문
1961년 5월 16일. 구국의 일념을 다진 박정희 육군 소장을 필두로 뜻있는 군인들이 모여 실행한 5.16 구국혁 명 (救國革命)은 대한민국을 국가붕괴 위기에서 구해냈음은 물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향후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분기점으로 작용하였다.
5.16 혁명이 있기 직전인 1960년-61년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국가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여 있었던 혼란의 시기였다.
4.19 혁명의 여파로 집권한 민주당 정권은 4.19로 촉발된 사회적 혼란을 조기에 수습하지 못했음은 물론, 권력을 둘러싼 내분에 휩싸인 나머지 민생고에 시달리는 국민들을 외면하기에 이르렀다. 사회적 혼란상을 타고 전국적으로 각종 시위가 난립하였으나 민주당 정권은 이에 대해 방관에 가까운 자세만을 취해 치안 유지라는 국가의 기본적인 역할도 수행하지 못하는 무능함만을 보여주었다. 이혼란의 시기 동안 남한의 좌파 세력들은 용공통일(容共統一)을 주장하며 국민들을 선동기만 하였고 북한의 김일성도 군사력을 강화하여 호시탐탐 적화통일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지만 오히려 민주당 정부는 경제 성장을 명목으로 반공의 주축이 되어야 할 국방력을 약화시키기에 이르렀다.
무너져가는 국가와 그 속에서 점점 황폐해지는 국민들을 보면서 흥국일념 (興國一念)의 결의를 다진 박정희 육군 소장. 결국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소장은 3500명의 병력을 이꿀고 교전 중인 한강 인도교를 직접 도하함으로 써 구국혁명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게 된다. 그의 결단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던 대한민국을 다시 한 번 소생시켰으며 한 발짝 더 나아가 대한민국을 융성하고 부강한 부국강병(富國彈兵)의 국가로 탈바꿈시키기에 이르렀다.
그가 1961년 5월 16일 혁명군을 이꿀고 한강 인도교를 건너던 그 때부터 1979년 10 월 26일 흉탄을 맞고 국민의 애도 속에서 18년 전 건너 왔던 다리를 다시 건너가던 그 때까지 박정희라는 인물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가져온 변혁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의 지도하에 대한민국은 하루가 다르게 부국강병의 국가로 변모해 나갔다. 도로가 닦이고, 공장이 세워졌으며, 반도체 원자력과 같은 신기술이 도입되었다. 우리의 5천년 역사 한구석에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붙어 있었던 가난과 빈곤의 굴레는 서서히 사라졌으며, ‘보릿고개’ ‘초근목피’로 대표되는 굶주림의 역사도 어느새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때는 아프리카보다도 못한 수준의 세계 최후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어느새 개발도상국의 롤 모댈이 되었으며 이제는 세계를 선도하는 일류국가로 자리매김하였다.
5.16 혁명으로 시작된 박정희 신화에 우리도 놀라고 세계도 놀랐다. 어떻게 한국전쟁의 폐허더미에서 철강 · 조선 · 자동차와 같은 고도의 중화학공업이 태동할 수 였었으며,이제는 전 셰계로 수출하기에 까지 이르렀는가? 정말 말 그대로 기적과도 같은 일들이 박정희 한 사람에 의해 일어났다. 그래서 박정희 신화는 ‘한강의 기적’이라고도 불린다. 세계적인 정치학자이자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5.16 혁명을 두고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란 어렵다. 러시아가 동시에 하려다 붕괴되지 않았나. 박정희의 판단이 옳았다. 19-20세기에 무력으로 정권을 잡아 나라를 구한 혁명이 5개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 터커의 케말 파샤, 이집트의 나세르, 페루의 벨라스코 한국의 박정희다. 이 중 경제 기적을 이룩한 혁명은 오직 5.16이다"라고 평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가 이룩한 부국강병 대한민국의 유산들은 좌파 정권을 거치며 그 의미가 지속적으로 격하 · 왜곡되기에 이르렀다. 좌파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박정희의 업적을 깎아내리기에만 몰두하였다. 여기에 더해 좌파들은 대한민국 사회를 ‘박정희’라는 이름만 언급해도 수구꼴통 친일 극우 일베로 몰아가는 사회로 만들어 놓았다. 혁명 당시의 박정희의 신분이 군인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박정희는 ‘군국주의 독재자’라는 오명을쓰게 되었다.
박정희가 군인의 신분으로 혁명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리고 그가 혁명을 통해 진정으로 성취하고자 한 부국강병의 목표에 대한 이해는 어느새 ‘독재 옹호’와 ‘친일’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채 사회적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친북 주사파 세력을 비롯한 좌파들은 박정희의 명백한 업적인 ‘한강의 기적’을 비롯하여 박정희 신화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5.16 혁명을 부정하고 왜곡하고 펌하하는 선동을 끊임없이 계속하고있다.
좌파 정권의 정책 역시 박정희의 유산을 철저히 지우는 것으로 점철되어 왔다. 반미 친북으로 대표되는 굴종과 고립의 외교 자유 시장 경제를 파탄내고 있는 반 기업 친 노조 정책 무지와 몰상식으로부터 비롯된 탈원전 에너지 정책, 전교조 합법화로 대표되는 교육의 좌경화 좌파 일당독재를 위한 언론과 사법의 장악 내로남불로 대표되는 위선과 부패. 이 모든 것이 박정희가 이룩한 부국강병의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을 또다시 5,16 직전의 풍전등화의 위기로 몰고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수 없다.
제대로 평가도 받지 못한 채 국민의 오해를 사고 묻혀버린 비운의 위인 박정희. 그가 일군 부국강병 대한민국의 신화를 모독하고 펌하하는 것은 곧 온갖 역경 속에서 피땀 흘려가며 지금의 위대한 자유 대한민국을 일구어 낸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업적을 욕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러한 인식 하에 본인은 5,16 혁명으로부터 시작된 위대한 부국강병 대한민국의 발자취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진정성 있게 되돌아보고자 이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근 4년 동안 대한민국에 붙어 닥친 문재인 좌파 정권이라는 광풍(狂風)이 그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의 성과를 무참히 도륙하는 이 시점에서 부국강병 대한민국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본인에게 있어서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문 2-1은 5,16 혁명의 필연성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정희 부국강병 정신이 성취되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출발점이 되었던 5,16 혁명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2-1을 통해 왜 5,16 혁명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필수불가결한 혁명이었는지 당시 대한민국이 처했던 상황을 토대로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으며, 5,16 혁명이 좌파 혁명과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를 밝힘으로써 좌파에 의해 ‘쿠데타’니 ‘반란’이니 하는 용어로 펌하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본문 2-2를 통해서는 부국강병 대한민국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그 과정을 ‘부국강병’이라는 단어에 대한 박정희의 인식을 토대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부국이 있어야 강병이 있다는 박정희의 믿음이 5,16 혁명과 이를 계승하는 그의 대통령 재임기간 중에는 어떻게 반영 되었는지 구체적인 사례와 그 성과를 밝힘으로써 산업화의 과정을 통해 부국과 강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고자 한 박정희의 천재성을 되돌아보고자 하였다.
2. 본문
2-1. 박정희 부국강병의 출발점 5.16 혁명의 필연성
5.16 혁명이 일어난 지 2년이 되는 1963년 8월 30일 강원도 철원의 제5군단 비행장, 6.25 전쟁의 격전지이자 마지막으로 지휘봉을 잡은 그 곳에서만 46세의 박정희 대장은 “친애하는 60만 전우 여러분"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자신의 전역사를 직접 낭독하였다. “친애하는 60만 전우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이신 내외 귀빈 애국시민 여러분 지난날 수십만 전우들의 선혈로써 겨레를 지켜온 조국의 전선, 초연 은 사라지고 오늘은 초목에 싸인 채 원한의 넋이 잠들은 이 산야, 이 전선에 본인은 군을 떠나는 마지막 고별의 인사를 드리려 찾아왔습니다. 여기 저 능선과 이 계곡에서 미처 피기도 전에 사라져간 전우들의 영전에 삼가 머리를 숙이고 십여 년을 포연의 전지에서 조국방위를 위하여 젊은 청춘을 바쳤 던 그날을 회상하면서 오늘 본인은 나의 무상한 반생을 함께 지녀온 군복을 벗을까합니다"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숙원이며 이 나라 군인의 최상의 영예가 될 빼앗긴 강토를 다시 찾기 위한 통일의 전열에 서지 못한 채 군인의 길로서는 진정 불우한 중절을 맞는 오늘 본인의 심경은 무한한 감회를 금할 길이 없습니다"
‘군인의 길로서는 진정 불우한 중절.’ 그렇다. 전선에서 나라를 지키고 빼앗긴 국토를 수복하는 것이야말로 군인에 있어서는 최고의 의무이자 영예이며, 이는 혁명을 결심하기 이전까지 군인으로서의 박정희가 추구하던 목표 이기도 하였다. 과연 그가 군인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포기하면서까지 혁명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국가가 가치구현이라는 문제 이전으로 돌아가 그 자체가 파멸에 직면했을 경우 를 상도할 때 거기에 혁명의 불가피성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5.16 군사혁명의 불가피성은 바로 우리가 직면했던 혁명 직전의 국가 위기에서 인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박정희전역사中
5.16 혁명이 있기 1년 전인 1960년. 대한민국은 4.19 혁명의 여파로 인한 극심한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새롭게 수립된 허정 과도정부는 이러한 혼란을 해결할 능력을 전혀 갖추고 있지 못했다. 오히려 4.19의 여파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제에서 내각제로의 권력구조 개편을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정치 – 사회적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기만 하였다.
무능한 허정 과도정부에 뒤이어 1960년 7.29 총선을 통해 민주당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국민들은 새롭게 집권한 민주당 정권이 4.19로 촉발된 사회적 혼란을 하루빨리 해결하고 국가를 다시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려주기를 내심 기대하였다. 그러냐 민주당 정권에게서는 이러한 국민적 기대에 부응하려 는 의지를 전혀 찾아 볼수 없없다
오히려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정부의 최고위직 자리를 누가 차지할 것인지를 두고 내부적으로 신파와 구파 등 각종 계파들로 나뉘어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정권 9개월 동안 개각이 3번이나 단행될 정도로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 다툼에만 골몰하는 실망스러운 모습만을 연출할 뿐이었다.
“그날 국정은 문란을 거듭하였고 우리가 부르짖던 자유민주주의는 한낱 장식에만 그쳤고 도의의 타락과 사회의 혼란은 극심한 위에 부정부패 독재는 민주주의 형해나마 그 존립을 위태롭게 하였습니다. 정년학도들에 의해 민족정기를 평정하려던 4.19의 숭고한 뜻과 국민의 기대는 무짙던}거| 배신되고 공산 간접 침략 앞에 국군은 존망의 위기에 함입되었던 것입니다" 박정희 전역사 中
정치가들이 국정의 원활한 운영이라는 자신들의 본분마저 망각한 채 권력 다툼에만 골몰하게 되면서 국가의 기본적인 역할인 치안 유지의 기능마저도 흔들리게 되었다. 4.19를 계기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 사회 각계각층의 다양한 목소리는 전국 방방곳곳에서 법의 통제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표출되기에까지 이르렀으며 그 수준이 가두시위 약 2000여 건에 그 참가자만 약 100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시위대들이 국회의사당과 경찰서를 점령하여 국가 질서를 문란케 하는가 하면 좌파 세력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중 선동을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분위기는 단순한 사회 혼란을 넘어서 대한민국을 무질서(Disorder)와 무정부(Anarchy)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민주당의 무능은 사회 혼란을 촉발시키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정치의 무능은 곧 경제의 무능으로도 이어졌다. 이미 남한은 6.25의 후유증으로 인해 경제의 상당부분을 미국을 비롯한 자유 우방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였으며, 안 그래도 어려운 경제 사정은 정책의 컨트롤 타워가 되어야 할 민주당 정권의 리더십 부재로 인해 더욱 악화되고 말았다. 4.19 혁명 이후 약 일 년 간 사회적 혼란기를 거치며 국가 채무는 2천 700억 환으로 늘어났고, 무역적자는 2억 6천만 달러를 기록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국민의 대다수는 기아와 문맹의 악순환으로 고통 받고 있었으며 실업자도 약 250만 명에 달해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1960년에는 158달러였던 1인당 GDP는 1961년에 93달러를 기록하면서 오히려 후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주당 정부의 장면 총리는 경제 개발에 투입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국군의 병력을 감축한다는 매우 비상식적인 제안을 내놓기에 까지 이른다. 이 제안이 나온 시점에 이미 김일성은 군수공업에 대한 자원의 공격적인 집중으로 군사력을 남한에 비해 7-10배 우세하게 확보했다는 점에서, 과연 공산세력의 적화통일 야욕으로 인한 6.25 전쟁이라는 뼈아픈 비극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정권에 진정으로 반공의 의지가 있었는가를 되묻게 만든다. 만약 5.16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6.25 전쟁에서의 수많은 희생을 통해 지켜낸 자유 대한민국이 사회적 혼란과 북괴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인해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무너졌으리라.
“본인은 평소 한 용감한 무명의 병사가 적탄에 맞아 신음하면서 그의 충성과 정춘과 꿈을 안은 채 애처롭게 숨을 거두는 죽음에 관해 생ζ}해보았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고 고귀한 것이며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보람 있고 행복한 생을 항유할 권리가 부여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존의 권리가 국가라는 생활권 속에서 보장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생명의 성스러운 희생이 요정되는 것입니다. 군인의 길은 바로 여기에 귀일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생과 사의 극한에서 감히 사를 초극하는 군인의 죽음은 정의와 진리를 위해 소아를 초개같이 버리는 희생정신의 극치로서 군인만이 가지는 영광되고 신성한 길인 것입니다 이 거룩한 죽음 위에 존립할 수 있는 국가란 오직 정의와 진리 속에 인간의 제 권리가 보장될 때에만 가치로서 긍정되는 것입니다" -박정희전역사中
군인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만약 국가가 사라진다면 군인으로서는 지킬 대상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공산주의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대한 민국과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이미 수많은 병사들이 희생되었다. 이들의 헌신을 밑바탕으로 현재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며 자유민주주의 역시 유지될 수 있었다. 그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박정희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군인으로서 국가 붕괴의 위기를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가?’ 박정희는 속으로 고뇌했다. 그러나 그는 곧 결정했다. 타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무명의 병사처럼, 인간 박정희는 군인으로서의 영예를 포기하고 ‘사를 초극’ 자신을 비롯하여 가족의 목숨마저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던 혁명이라는 거사의 중심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유를 위해, 대한 민국을 지키기 위해.
"14개월간에 네 차례의 정권교체를 보아야했던 우리 한민족의 번뇌와 진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양심의 순리를 묵수한 도의의 대가는 천시와 빈곤이고 권모에 능한 불의의 응보가 치부와 영달이었던 그 사회 썩은 관록과 허망한 권위주의, 진부한 파벌의식, 비굴한 사대근성이 모든 봉건잔재의 전근대적 제요소를 송두리째 분해 정산 하고 새로운 민주광장에서 민족적 주체세력을 형성해야 할 것입니다" -박정희전역사中
비단 박정희만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군 내부에 만연해 있던 무능과 부패, 더 나아가 끊임없는 정쟁과 문란한 국정운영으로 나라를 절망과 패배의 늪에 빠지게 한 민주당 정권에 좌절과 분노를 느낀 돗 있는 군인들도 혁명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다. 이들은 단순한 군인이 아니었다. 외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으면서 당시의 그 누구보다도 선진 문물을 가장 먼저 접한 이들은 끊임없이 속으로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왜 한국은 빈곤과 절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이들 사이에서는 나라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있었으며, 한 발 더 나아가 국가 변혁을 이끄는 주체가 되고 싶은 열망도 있었다. 결국 박정희의 구국을 위한 결단에 공감한 이들은 5월 16일 거사의 선봉장이 되어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사멸에 가까운 생명이 회생되기 위하여 가혹한 수술이 불가피하였기에 내 평생과 이 민족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못할 1961 년 5월 16일 비분과 눈물을 머금고 겨레가 피로에 지친 새벽의 수도에 혁명의 총부리를 돌려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5.16이었던 것이며 오늘 본인이 군복을 벗어야할 연유는 또한 여기에 깃들였던 것입니다" -박정희전역사中
1961년 5월 15일 11시 밤 박정희 소장은 직접 혁명군 3500명을 이꿀고 한강교를 도하하기 시작하였다. 도하 과정에서 혁명군과 헌병대 간의 교전이 있었으나 다행히 사망자는 일체 발생하지 않았다.5월 16일 새벽 3시 경 혁명군은 성공적으로 육군본부를 포위하였고, 새벽 4시 30분에 박정희 소장은 KBS 라디오 방송국으로 이동, 5시 정각에 라디오를 통해 국민들에게 혁명이 발생한 사실을 알리고 혁명군이 목표로 하는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
• 혁명공약
1.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UN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이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돼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 정기를 바로 잡기 위해 정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 을경주한다.
5.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 중한다.
6. 이와 같은 우리들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 하고 우리는 본연의 임무로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민주당 정권의 무능과 혼란한 사회상에 지쳐있던 국민들은 누란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는 군사혁명의 대의에 적극 공감하였다. 4.19 혁명의 주역이었던 서울대 학생회와고려대 학생회는 5.16 혁명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하였고 당시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장준하도 권두언이라는 가명으로 〈사상계〉를 통해 “4.19 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라고 군사혁명을 긍정 평가하였다.
“혁명공약이 암암리에 천명하고 있듯이, 무능하고 고식적인 집권당과 정부가 수행하지못한 4.19 혁명의 과업을 새로운 혁명세력이 수행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5.16 혁명의 적극적 의의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권두언(장준하)의 〈사상계) 기고문 中
이 렇듯 5.16 혁명은 박정 희를 비롯한 뜻 있는 군인들이 국가의 안정과 변혁을 바라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여 감행한 구국의 결단이었다. 그러나 좌파들은 단지 박정희를 비롯한 현명의 주역들이 군인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5.16 혁명을 ‘군부에 의한 쿠데타’ 내지는 ‘무력에 의한 권력 찬탈’로 비하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혁명’은 과연 어떠한가? 공산 좌파의 시초 마르크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구호로 노동자의 해방과 투쟁을 촉구하며 대중을 선동하였고 러시아 혁명과 중공 혁명이라는 대표적인 좌파 혁명도 사회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로 나누어 서로의 갈등을 조장하고는 지배계급으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으면서 민중을 선동하고 봉기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들은 혁명의 과정에서 적백내전과 국공내전으로 대표되는 피비린내 나는 내전과 이로 인한 무질서(Disorder) , 무정부(Anarchy) 상태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치열한 내전 끝에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사회주의 독재의 출현과 공산당이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의 등장이었다. 과연 이를 진정으로 그들이 부르짖던 ‘해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는 좌파들이 혁명의 궁극적인 목표랍시고 내걸던 ‘무산대중의 해방’이 단순히 대중을 기만하기 위한 입놀림에 불과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무질서를 불러온 좌파 혁명과는 달리, 박정희의 무혈혁명은 ‘제 2공화국이라는 무질서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5.16 혁명공약 3조는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혁명공약 3조에 입각하여 혁명군이 질서 유지 활동에 전념한 결과 4.19 이후로 전국적으로 만연해 있던 무질서와 방종을 성공적으로 잠재울 수 있었으며, 여기에 더해 정치깡패와 부정부패 사범 그리고 용공분자의 척결 등 국민적 요구에 부응하는 활동도 실시하였다.
“그러는 동안 국민경제는 황폐화하고 대중의 물질생활은 더 한층 악화되고 사회적 부는 소수자의 수중으로만 집중하였다. 그 결과로 절망, 사치, 퇴폐, 패배주의의 풍조가 이 강산을 풍미하고 있었으며 이를 틈타서 북한의 공산도당들은 내부적 혼란의 조성과 붕괴를 백방으로 획책하여왔다. 절정에 달한 국정의 문란, 고질화한 부패, 마비상태에 빠진 사회적 기강 등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 군사혁명이다" 권두언(장준하)의 〈사상계〉 기고문 中
박정희의 5.16 혁명은 국가 붕괴라는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던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국가를 다시 정상궤도로 되돌려 놓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5.16 혁명은 민주당 정권의 부패와 무능으로 촉발된 무질서와 무정부 상태를 해결하는 국가의 기본적 역할 복원부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는 김일성 공산주의 적회통일의 야욕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수호하는 부국강병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애국적 민족적 발자취였다는 점에서 ‘쿠데타’가 아닌 진정한 ‘혁명’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2-2. 부국이 있어야 강병도 있다. 조국근대화의 과정에 담긴 박정희 부국강병 정신
부국강병(富國强兵)은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강한 군대를 양성함을 뜻한다. 왜 강병부국(强兵富國)이 아니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인가? 강병(强兵)이 부국(富國)보다 우선할 수는 없는가? 관포지교(管 鮑之交)의 고사성어로 유명한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관중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바 있다.
“국토를 수비하는 바탕은 성(城)이고, 성을 지키는 바탕은 병력이고, 병력을 보유하는 바탕은 인간이고, 인간을 보전하는 바탕은 곡식이다. 땅이 제대로 개간되지 않아 곡식 생산이 부진하면 국토 수비의 바탕인 성도 결코 건고할 수 없다"
<관자>(권수〉 中
그렇다. 강병의 시작은 부국으로부터 비롯된다. 유랍 정복을 목전에 두고 있던 나폴레옹의 막강한 군세를 굴복시키고 변방의 섬나라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든 일등 공신인 레드 코트(Red Coat) 전열보병. 그 신화의 밑바탕에도 영국의 막강한 경제력이 있었다. 영국은 17세기부터 세계 각지에서의 무역과 식민지 확장 그리고 자국에서 촉발된 산업 혁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비싼 화약과 부삿돌의 가격으로 인해 당시의 다른 유럽 국가들은 엄두도 못 내던 전열보병의 실탄 사격 훈련을 매해 실시할 수 있었다. 실탄 사격 훈련의 효과는 확실했다. 총 한번 쏴보지도 못하고 전투에 투입되기 일쑤였던 타국 보병들과는 달리, 실탄 훈련으로 숙달된 영국군은 빠른 재장전 속도와 정확한 명중률을 통해 전투 에서 적을 압도할 수 있었다.
부국 없이는 강병도 없다.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그것을 양성하고 유지하고 발전시킬 경제적 밑바탕이 없다면 금세 무력해지기 마련이었다. ‘스파르타 교육’으로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의 군사강국 스파르타는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메세니아 영토를 상실하게 되면서 중장보병의 양성 및 유지에 차질을 빚게 되었으며 결국 고대 패권국의 지위를 잃고 로마의 지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한때는 무적을 자랑하던 고대 로마제국의 중장보병 군대도 무역 적자와 인플레이션을 비롯한 경제적 파탄으로 병사에게 줄 봉급이 부족해지게 되면서 그 막강했던 군사력이 급속도로 약화되기 시작하였고,결국 이민족 게르만족의 침략을 이겨내지 못하고 서기 476년에 멸망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5.16 혁명공약 제 1조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로 규정되어 있다. 이는 이미 한 차례 공산주의 마수로부터의 침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제 2공화국 민주당 정권이 외치던 반공은 어떠한 실질적인 움직임으로 이어지지 않고 공허한 메아리로만 남아있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반공의 기초가 되는 국군은 5.16 혁명 직전까지 60만 명에 육박하는 결코 적지 않은 규모의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그 60만의 대부분은 2차 대전이나 6.25 전쟁에서 우방국이 시용하던 M1 개런드 소총이나 M4A3E8 셔먼 전차와 같은 구식 무기들로 겨우 무장되어 있을 뿐이었다. 주요 경제 지표가 악화되는 등 극심한 경제적 혼란을 겪고 있던 민주당 정부는 남한 국방예산의 대부분을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그마저도 대부분 인력 유지비로 지출되기 마련이여서 신형 무기 구입과 제계적인 훈련을 통한 군사력 강화는 꿈도 못 꾸고 있던 실정이었다.
비단 장비만 문제였는가? 공산주의 침략에 맞서 자유 대한민국을 기꺼이 도와준 우방국. 적회통일 이라는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구사일생으로 살려준 이들은 분명히 은인과도 같은 고마운 존재였다. 그러나 여전히 국방력의 많은 부분을 우방국이라는 타인의 원조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박정희를 비롯한 많은 군인들에게 패배감과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이 나라는 우리의 힘으로 지쳐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우리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심과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 이 부족할 때는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남이
돕는 것은 어디까지 도움이라고 생각해야지 남이 우리를 대신해서 지쳐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것을 국방의
주체성이라고 말합니다. 남이 우리를 도와주는 것도 우리에게 국방의 주체성이 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자기 나라는 자기 스스로 지키겠다는 결심이 없는 국민을 남이 와서 도와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 박정희.1968년 2월 26일 서울대학교 졸업식 연설 中
현명하게도 5.16 거사 당시의 박정희 소장은 2천 년 전 관중이 말한 부국강병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부국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강병이라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을 혁명의 과정에 과감히 투영할 수 있었다. 그의 이 러한 믿음은 5.16 당시 발표된 혁명공약에도 잘 드러나 있다. 혁명공약 5조는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박정희는 이 ‘실력의 배양’ 즉 ‘강병’을 위한 선결 조건으로 혁명공약 4조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즉 산업화를 통한 경제적 자립 ‘부국’이 우선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하였다. 산업화를 통한 경제적 자립을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산업화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기간산업에 대한 체계적인 개발 및 육성이 절실했다. 해방직후 남한의 기간산업은상대적으로공업이 발달한북한지역에 비해보잘 것 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며 그마저도 6.25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는 등 매우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 산업화의 기반부터 철저하게 망가진 이 상황에서 외국으로부터의 투자를 받을 가능성은 거의 전무했으며, 설상가상으로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방국의 경제 원조도 점차 줄어가고 있었기에 기존의 원조 경제라는 의존적인 체제에서 벗어나 자립 경제 체제를 세우는 것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우선 5,16 혁명이 진행 중이던 1961년에 경제기획원이 설치되었다. 그동안 건설부와 재무부 등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있던 경제기획 기능을 일원화한 경제기획원은 제 2공화국 시기동안 후퇴한 경제를 재건하고 향후 경제 발전을 위한 계획을 효율적으로 수립하는 것에 그 설립 목적이 있었다. 경제기획원은 설치 직후 곧바로 경제 성장 계획 수립에 착수 1년 뒤인 1962년에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1차 5개년 계획은 향후 자립 경제 체제 달성을 위한 기반 구축을 목표로 하였다. 이는 기간산업부터가 미비한 현 상황에서 처음부터 자립 경제 체제를 확립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전력과 석탄 등 산업 발전에 필수적인 에너지의 공급원을 확대하고 화학비료 산업의 육성을 통하여 기초화학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시멘트 산업의 육성을 통해 앞으로 계속될 경제개발 과정에서 급증할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수요에 대응코자 하였다.
“빈곤의 악순환 속에 시달려온 민족이 새로운 정치풍토를 조성하여 경제적 자립을 이룩할 비약의 단계로 이행코자하는 이 대업은 군사혁명 과정에만 주어진 과제가 아닐진대 다음 민정에도 기필코 계승되어야 할 것입니다" -박정희전역사中
5대 대통령 선거로 선출되어 제 3공화국 민정의 시작을 알린 박정희 대통령. 그의 재임기 중인 1966년에 완료된 1차 5개년 계획의 성과는 눈부신 것이었다. 당초 목표치를 초과 달성한 경제 성장률 그리고 5년 동안 획기적으로 증가한 1인당 국민 총생산 지수(GNP)는 절망감에 빠져있던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기에 충분했다. 박정희의 5,16 혁명은 단순히 군사혁명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5,16 혁명으로 촉발된 기간산업에 대한 공격적인 개발 및 투자의 기조를 민정에서도 계속 이어가고자 하였다. 따라서 1차 5개년 계획을 통해 얻은 희망을 원동력으로 1년 후인 1967년에 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 철강 화학 · 기계공업 등 중화학 공업 육성을 위한 기간산업의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게된다.
좌파 일각에서는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두고 제 2공화국의 장면 정부에서 먼저 세운 계획을 박정희가 무단 표절했다는 식으로 펌하하고 있다. 당시 야당 유력 정치인으로 박정희의 정책을 노골적으로 반대했던 김대중. 그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군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민주 당 정부의 개발 계획을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우선 각 계획이 추구한 방향성부터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물론 장면 정권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구상한 적은 있다. 그러나 박정희의 재임 기간 동안 장장 4차례에 걸쳐서 진행된 5개년 계획이 중화학 공업 육성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것과는 달리 장면의 5개 년 계획은 주로 농업 · 임업 · 탄광업 등 1차 산업 육성 위주로 구성되었을 뿐이었다.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육성에는 조국 근대화의 과정을 통해 경제 성장은 물론 국방력 강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는 ‘일면국방 일면건설(一 面國防 一面建設)’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중화학 공업은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자립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을 지킬 방위의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가령 중화학 공업 중 하나인 기계 산업의 경우, 평시에는 산업 발전을 위한 자동차나 농기계를 제작하다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전차와 장갑차 같은 군수 물자를 생산하도록 전환이 가능하였다. 화학 산업 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에는 비료를 생산하다가 전시의 경우에는 화약을 만들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공장 하나에서 모두 가능했기에 민간 산업용 공장과 군수용 공장을 따로 지을 필요도 없었다. 박정희는 바로 이런 중화학공업이 가지고 있던 경제성과유연성에 주목했던 것이었다.
그가 5개년 계획을 통해 육성하고자 한 중공업 특히 그 기초가 되는 철강 산업의 육성은 ‘부국’과 ‘강병’의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산업의 쌀’으로도 불리는 철(鐵) . 건물을 지을 때 사용되는 철골부터 자동차 제조에 활용되는 강판까지 현대 산업의 모든 것은 ‘철’로 이루어져 있다. 비단 산업뿐인가? 현대 전쟁의 모든 것도 철로 구성되어 있다. 병사들이 쓰는 철모 사격할 때 쓰는 소총 공지전의 핵심인 전차와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철’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철의 자립’ 없이는 산업의 자립을 논할 수 없었으며 더 나아가 국방의 자립도 이룰 수 없었다. 한때는 군인이었으며 동시에 1차 5개년 계획을 통해 산업화의 과정을 직접 진두지휘한 경험이 있었던 박정희는 철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2차 5개년 계획이 한창이던 1970년 4월에 국가 기간산업으로서 포항제철 착공을 시작, 각고의 노력 끝에 착공 3년만인 1973년 6월 9일 포항제철 제 1 고로에서 첫 횟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마침내 ‘철의 자립’을 선언할 수 있었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지난날 우리의 오전년 역사는 영예와 오욕으로 점칠된 것이었으며, 특히 우리의 현대사는 수난과 비운의 연속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5.16혁명을 기점으로 우리는 민족의 위대한 자아를 되찾기 위한 보람찬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온갖 시련과 도전을 이겨내면서, 국력배앙에 일로 매진해왔습니다. 우리는 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서 공업 입국의 터전을 튼튼히 닦아 놀았으며, 이제 바야흐로 중화학 공업시대의 막을 열었습니다" - 박정희,8대 대통령 취임사 中
포항제철의 설립으로 이제 산업 발전에 필요한 원자재인 철을 국내에서 자체 조달 할 수 있게 되어 더 이상 외국으로부터의 수입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원자재 수입이 줄어들어 국제수지가 개선되었음은 물론 이다. 이렇게 두 번의 5개년 계획을 통해 일군 철강을 비롯한 각종 기간 산업의 성장은 3차 및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동안 제철 · 전자 · 기계 · 조선 · 자동차 · 석유화학 · 원자력과 같은 중화학 공업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뤄내는 밑바탕이 되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에 우리 사회에는 엄정난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상전벽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한 민족의 대행진은 지금 이 순간에도 힘차게 계속되고 있습니다.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전통적인 농경 사회였던 우리나라가 이제 중화학 공업국가로부터 다시 고도 산업 사회로 이행해 가고 있습니다. 일상 생활용품까지 우방의 원조에만 의존하던 우리 경제가 이제 거의 자립 단계로 도달했고, 소총 한 자루 우리 손으로 만들지 못하던 우리나라 방위 산업이 이제 국산장거리 유도탄 시대의 막을 열게 되었습니다" - 박정희,9대 대통령 취임사 中
불과 십 수 년 만에 급격하게 이루어진 중화학 공업의 발전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 경제의 초고속 성장을 불러오게 되었다. 1961년부터 1979년까지 박정희 시대 18년 동안 총 4번의 5개년 계획을 거치면서 1인 당 국민소득은 85 달러에서 1,709 달러로 20배 넘게 급증했고, 24억 달러에 불과했던 국내총생산은 669억 달러로 30배 가까이 늘어났으며, 교역규모는 3억 6천만 달러에서 354억 달러로 100배 가까이 증가하기에 이르렀다. 말 그대로 기적에 가까운 경제 성장을 이룩해 낸 것이었다. 경제 성장은 군사력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로 이어졌다. 5.16 혁명 직전까지 우방국의 원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치던 남한의 국방비는 5.16 혁명과 5개년 계획의 시행을 기점으로 자연스럽게 성장세를 타기 시작하였다. 1960년에 약 2억 8천 달러에 불과하던 국방비는 1980년에 어느새 39억 8천 달러로 증가해 있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한창이던 1976년에는 처음으로 북한을 역전할 수 있었다. 부국이 곧 강병으로 이어진다는 박정희의 믿음이 옳았던 것이었다.
박정희는 일면국방 일면건설(一面國防 一面建設)의 전략을 취함으로 산업화를 통한 조국 근대화의 과업에 열중하는 한편 호시탐탐 적회통일의 기회만 을 노리는 김일성에 대한 견제를 절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산업화의 과정을 통해 얻은 역량을 ‘반공을 위한 자주국방의 실현’이라는 보다 실질적인 행동으로 도출해내는 것에 성공하였다. 중공업 육성 과정에서 터득한 기술과 노하우는 자주국방 실현의 초석이 되었다, 1973년 부산 국방부 조병창에서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든 국산 M161호 소총의 탄생을 시작으로, 1978년에는 그동안 축적된 자동차 산업 등 기계공업을 바탕으로 M48 패튼 전차의 개조 및 양산에 돌입하게 되면서 자유 진영에서 9번째로 전차를 자체 생산하는 국가로 발돋움하기에 이르렀다. 중공업을 향한 길이 곧 방위산업을 향한 길이라는 그의 혜안이 빛을 발하던 순간이었다, 5,16 이전의 절망과 패배감은 어느새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되어있었다. ‘일면국방 일면건설’의 이념은 비단 중화학 공업의 육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 시대 산업화의 대표적 유산인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에 있어서도 이 ‘일면국방 일면건설’의 이념이 담겨져 있었다. “싸우면서 건설하자I"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박정희 식(式) 근대화 모토. ‘김신조 사건’으로 잘 알려진 1.21 사태 이후 치러진 1968년 2월 1일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에서 제시된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경제가 성장하고 대한민국의 건설이 빨리 이루어지고 대한민국의 국제적 인 지위가 나날이 향상됨으로써 가장 위협을 느끼고 질투를 하고 배가 아파하는 자들이 이북에 있는 김일성 도당들입니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북한 공산당은 입으로는 평화통일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들의 목표와 전략은 해방되던 그 당시부터 지금 까지 추호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기본 전략이 무엇이냐 하면 전쟁 준비를 해서 무력으로 대한민국을 침략해서 적화통일을 하자는 것입니다, (중략) 우리는 현재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이 건설 사업을 조금도 늦추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야말로 우리 국민들은 한쪽으로는 공산주의자들과 투쟁을 하면서 한쪽으로는 건설을 추진해 나가는 ‘싸우면서 건설해 나가는 그런 국민’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 박정희 대통령의 경부고속도로 기공식 연설문 중
미국의 34대 대통령 드와이드 아이젠하워, 2차 세계대전당시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그는 독일 영내 전투를 진두지휘하는 과정에서 독일 전역에 걸쳐있던 아우토반 시스템을 목도하게 된다. 아우토반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국가 균형 발전을 위한 고속도로 시스템을 구상하게 되었고, 재임 중인 1956년 부터 ‘주간고속도로’로 잘 알려진 일련의 교통 네트워크를 미국 전역에 걸쳐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박정희 역시 1964년 서독 방문을 계기로 독일의 아우토반 시스템을 목도하고는, 한국이 근대화 자립 경제를 이룩하려면 고속도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강력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결국 이는 경부보속도로 건설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와 아이젠하워가 고속도로를 단지 경제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고 건설한 것은 아니었다. 현대전은 기동전이었다.2차 대전에서 독일이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6주 만에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고, 미국의 명장 패튼이 벌지 전투에서 포위당한 미군을 신속히 구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차량과 전차를 이용한 기동전에 있었다. 군 지휘관 출신으로 기동전의 효용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아이젠하워. 그는 주간 고속도로의 건설을 통해 미국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여 두 지역 간의 경제적 격차를 줄여나가는 한편,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 세력이 미국 본토를 침공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신속히 국내 병력을 전국 각지로 이동시킬 수 있는 수단을 마련코자 하였다.
아이젠하워와 마찬가지로 군 지휘관 출신이 었던 박정희 역시 고속도로의 군사적 유용성을 잘 알고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전까지 박정희는 변변찮 은 군사용 도로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두고 항상 아쉬워했다고 한다. 게다가 1.21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북괴의 도발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 수위가 날로 심해져만 가고 있었으며, 따라서 언제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는 북괴의 도발 행위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1.21 사태 직후 있었던 향토예비군의 창설도 북괴 도발 행위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을 통해 경 제성장의 한 축을 담당하던 물류산업의 대동맥을 뚫어주고자 하였으며, 동시에 고속도로로 하여금 유사시 전국 각지로 군대를 신속히 배치할 수 있는 교통망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야말로 경제 발전과 국가 방위 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고자 한 것이었다.
“5월 혁명은 단순한 변혁도 외형적 질서정비도 새로운 계층형성도 아닙니다. 상극과 파쟁, 낭비와 혼란, 무위와 부실의 유산을 조상과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우리들 불운의 세대가 이 오염된 민족사에 종지부를 찍고 자주와 자립으로 번영된 내일의 조국을 건설하려는 것이 우리 혁명의 궁극적인 지표인 것입니다- 박정희 전역사 中
박정희의 천재성은 조국 근대화의 과업을 통해 급격한 경제 성장과 군사력배양을 동시에 해냄은 물론 그 과정에서 국민성의 변화도 함께 이끌어냈다는 것에 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근면 · 자조 · 협동의 새마을 운동이있었다. 한민족 5천년 동안 농촌은 바람만 불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쇠락한 초가집으로 대표되는 가난의 상징, 춘궁기만 되면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이 굶어 죽어가는 배고픔의 상징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박정희는 그 누구보다도 농촌이 겪는 아픔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5.16 혁명을 통해 국가 질서를 회복한 직후 가장 먼저 시행한 사업도 농어촌 고리채 정리였을 정도였다.
안 그래도 피폐한 농촌의 상황은 급격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도시로 인구가 몰리는 이촌향도 현상이 발생하게 되면서 더욱 악화되어만 갔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70년 시작된 새마을 운동. 박정희는 새마을 운동을 단순히 시골 동네에 고랑 파주고 도로 닦아주는 것만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국민들에게 내 나라는 내가 만들어 간다는 자부심, 하면 된다는 진취적인 기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새마을 운동은 철저하게 농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성과가 있는 마을에만 지원을 집중하는 차별화 정책을 통해 농민들로 하여금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내 손으로 직접 성과를 일구었다는 자립의 정신을 심어주고자 하였다. 그렇게 우리 민족이 5천년 동안 가지고 있었던 의존의 DNA 는 점차 자립의 DNA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불도저처럼 한 방향으로 일관되게 부국강병에 대한 자신의 굳건한 신념을 관철시켰으며,5천년 유구한 역사 가운데 유일하게 대한민국의 국민성을 완전히 바꿔 놓은 인물 박정희. ‘한강의 기적’으로 대표되는 박정희 부국강병 신화는 단순히 경제 성장과 군사력 강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5천년 동안 한민족에게 끈질기게 붙어 있던 패배와 종속의 역사, 그리고 가난의 굴레를 벗어던졌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처음으로 북한을 능가하고 중국을 넘어서던 시기가 박정희 시대였다. 이제 한국은 더 이상 춘궁기만 되면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이 굶어죽는 나라 내 나라를 지킬 돈과 무기가 없어 남에게 의존하는 국가가 아니었다. 어느덧 남에게 도움을 받던 국가에서 도움을 제공하는 국가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폴폴 무장된 국가로 탈바꿈해 있었다.
3. 맺음말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신 지 어느덧 4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대한민국은 인간 박정희를 그 어느 때보다도 몹시 그리워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추락해가던 1960년대 초의 그 혼돈 속에서 나라를 살려낸 혁명가 박정희. 근면 · 자조 · 협동의 새마을 정신과 잘 살아 보자는 일념 하나만으로 삼천리 방방곳곳은 물론 국민성까지 한순간에 탈바꿈시킨 선구자 박정희. 하면 된다는 불굴의 도전정신에서 나오는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으로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을 부국강병의 일류국가로 발전시킨 대통령 박정희.
지금 다시 돌이켜 봐도 박정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있어서 하나의 대단한 도전이자 모험이었으며 말 그대로 한 국가를 완전히 탈바꿈시킨 최고의 아웃풋(Output)이었다. 빈곤과 가난을 완전히 몰아 내었으며, 보릿고개라는 단어를 사어(死語)로 만들어버린 인물. 5천년 동안 농경에 뿌리를 두고 있던 사회를 불과 몇 십 년 만에 중화학 공업 중심 경제로 탈바꿈시켰으며, 다른 나라들이 몇 백 년의 과정을 걸쳐서 해낸 산업화를 불과 몇 십년만에 이룩해낸 인물이 바로 박정희였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시장경제라는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나라의 기반을 다진 분이 이승만 대통령이라면, 그 기반 위에서 대한민국을 지금의 위대한 나라로 성장시킨 분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가 다져 놓은 산업적 기반과 방향성을 토대로 대한민국은 계속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그가 열심히 밭을 일구고 뿌려놓았던 씨앗은 어느덧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그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다. 신뢰의 이름인 메이드 인 코리아는 전 세계로 뻗어나갔으며, 이름마저도 생소한 변방의 소국에 불과하였던 코리아가 세계인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우리는 박정희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독재자라 힐난하기에 바쨌지만 지금 와서 보니 오히려 그가 뿌려준 씨앗이 있었기에 지금의 한국산 스마트폰과 자동차가 탄생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현재의 케이-팝과 한류 열풍도 기능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박정희는 서거 이후에도 계속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어찌하여 오늘날에는 박정희와 같이 강력한 지도력과 결단력을 가지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 것인가. 이 글은 안타까움이자 일종의 절규이다. 본인이 박정희를 되돌아보는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조국 근대화 과정을 통해 드러난 그의 위대함과 천재성 그리고 국민을 위한 헌신에 주목하고자 함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공들여 일군 대한민국이 ‘문재인’이라는 광풍에 의해 철저히 부정되고 파괴되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능과 부패, 위선과 거짓으로 얼룩진 좌파 집권기를 거치면서 어느덧 우리 사회는 상당 부분 좌경화되었고, 자유 대한민국 체제의 붕괴가 눈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나라와 민족을 구할 강력한 지도자를 국민은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추신: 이글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공모글 최종열님의 우수작 입니다. 책을 보면서 타자했기에 오자가 있울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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