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와 함께 신화가 된 노무현. 또하나의 신화 꿈꾼 ‘문재인입니다’
퇴임 목전서 만든 5부작 다큐 역시 사과 한마디 없이 시종 자화자찬
성찰하지 않는 권력이 대한민국 역사를 퇴보시켰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로 시작하는 노래 ‘상록수’는 70년대 인천의 한 공장에 취업한 서울대생 김민기가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에서 부를 축가로 만들었다가 금지된 곡이다.
이후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불리던 이 노래가 국민가요로 등극한 건 1998년이다. US 여자 오픈에서 연못에 빠진 공을 포기하지 않고 맨발로 들어가 샷을 날리는 투혼으로 기어이 우승을 거머쥔 박세리가 IMF 외환 위기로 절망에 빠진 국민들을 위로하는 공익광고에 배경음악으로 흐른 것이 계기가 됐다.
그리고 얼마 후, 이 노래는 정치의 장으로 나온다. 2002년 대선 홍보 영상에서 노무현 후보는 직접 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부른다. 봉하마을에서의 극적인 서거 후 서울 광화문 노제에서 다시 울려 퍼진 이 노래는 명문(名文)으로 남은 그의 유서와 함께 노무현을 신화로 만들었다. 이 모든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노무현입니다’는 2017년 185만 관객을 동원하며 노무현 신화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그에 비하면 후속작 ‘문재인입니다’는 졸작이 됐다. ‘노무현입니다’에 이어 ‘문재인입니다’를 만든 이창재 감독은 지난달 29일 전주국제영화제 무대에 올라 “이가 두 개나 빠질 정도로 힘든 작업이었다”고 토로했다. 2시간 분량의 다큐를 보니 그 ‘고충’이 이해됐다. ‘문재인표 전원일기’라는 평이 나올 만큼 평산마을 사저에서 삽을 들고 텃밭과 정원을 일구는 모습이 지루할 정도로 이어진다. 감독의 말마따라 ‘주연’인 문 전 대통령이 비협조적인 탓도 있었겠지만, 전작(前作)의 주연인 노무현 만큼 ‘드라마’가 없는 탓이 컸다.
눈물이 핑 돈 장면이 있긴 했다. 북한 김정은이 선물한 풍산개 ‘곰이’와 ‘송강’이가 쇠창살에 갇혀 평산마을을 떠나는 대목이다. 다큐에서 문재인은 “6개월 동안 아무런 근거 규정 없이 제가 대통령 기록물을 계속 관리하는 중이기 때문에 위법 시비가 있을 수 있다”고 해명했으나, 정치에 이용되고 버려진 개 두 마리의 운명은 허망하고 애처로웠다.
제작진은 “문재인이라는 한 인간을 탐구했을 뿐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은 뺐다”고 했다. 그러나 문 정부 인사들의 입을 빌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과 탄두 중량 협상 과정 등 몇몇 난제를 극복한 대통령 리더십을 극찬한다. 임종석 전 비서실장은 “모든 스트레스를 그저 참아내던 사람”이라며 인내의 리더십을, 강경화 전 장관은 “문재인은 잘 듣는 사람”이라며 경청의 리더십을 칭송한다. 문 대통령은 재임 시절 박근혜 대통령만큼이나 불통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재인을 드높이려는 노력은 퇴임을 목전에 두고 이미 한차례 이뤄졌다. KTV가 제작한 ‘문재인 정부 5년의 기록’이다. 무려 5부작(특별편 포함)으로 이뤄진 다큐는 남북 평화, K방역의 성공, 경제 위기 극복 등 시종일관 문 정부의 업적을 소개한다. 여기서도 참모들은 대통령을 찬양하기 바쁘다. 소방관과 장애인, 위안부 피해자 등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대통령의 모습은 뭉클했지만, “언제나 배불뚝이 서류 가방을 들고 다닌 일벌레” “24시간 일하며 직업인으로서 대통령직을 수행한 첫 대통령”이란 평가는 아연했다.
압권은 “(문재인 시대는) 코리아 르네상스 시기였다”는 노영민 전 비서실장의 자찬이다. 그 덕에 문재인 정부 5년간 대한민국은 그렇게 아수라장이었던 걸까.
성찰하지 않는 권력은 역사를 퇴보시킨다. 문 대통령이 그토록 사랑했던 서민들을 주거 벼랑으로 몰아세운 부동산 참사와 나라를 두 쪽으로 분열시킨 조국 사태, 에너지 대란을 초래한 원전 정책에 대해 단 한마디의 사과라도 있었다면 이토록 씁쓸하진 않았을 것이다.
영화가 끝난 뒤 심야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 책 한 권으로 노무현 신화에 균열을 낸 이인규 전 중수부장을 생각했다. “검사로서 넘어야 할 거대한 성벽이었던 노무현 대통령과 진검 승부를 펼치고 싶었다”는 이 천생 검사는 수사 중 대통령의 죽음으로 졸지에 살인자이자 도망자가 됐다.
노무현을 저주하다시피 한 진보 진영이 서거 후 돌변해 그를 우상화하는 것을 보고 집필을 결심했다는 그는, 5년간 수사 자료를 모으고 관련자 증언을 녹취하며 그야말로 칼을 갈았다.
놀라운 건, 이인규 주장에 대한 일체의 반론이 없었다는 점이다. 일개 시민도 모욕죄로 고소하던 문재인 대통령 측은 물론 노무현재단과 민주당 역시 단 한 줄의 반박 자료도 내지 못했다. 진보 언론이 침묵했음은 물론이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버스의 차창으로 빗방울이 부딪쳤다. 이어폰을 꽂고 ‘상록수’를 들었다. 양희은도, 노무현도 아닌 원곡자 김민기의 탁주 같은 음성으로. 첼로로 낮게 깔리는 전주(前奏)에 눈물이 툭 떨어졌다. ‘바보 노무현’ 신화는 내게서도 그렇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