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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각의 감옥’에 갇히면서 과학을 적(敵) 만들었다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3. 7. 19. 06:30

    이기고 싶은 것이지 진실 알고 싶은 게 아냐  과학 증거보다 정치 진영이 의견 지배
    사대강 관련 입장 알면 광우병·오염수도 짐작 가능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지난 7일 저녁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와 관련한 IAEA 보고서 내용을 한국에 설명하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김포공항에 들어왔다가 시민단체의 항의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 뉴스1
     

    2011년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 이후 한동안 태평양으로 유출됐던 방사성 물질은 현재 저장 탱크 보관량과 비교해 핵종(核種)별로 적게는 600배, 많게는 3만 배 정도 된다. 그렇지만 한국 바닷물과 수산물에 특이 영향은 없었다. 따라서 그 600분의 1, 3만분의 1만큼을 향후 30년 동안 나눠 방류할 경우 우리에게 미칠 영향은 따질 필요조차 없는 의미 없는 수준일 것이다. 그런데도 특정 정치 진영 사람들은 방류수가 위해를 갖다줄 수 있다는 생각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이들 생각의 움직임을 포착하려면 사회심리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미국 학자 레온 페스팅거가 1954년 세상의 종말이 닥쳐온다고 믿는 광신도 사교 집단 속으로 들어가 잠입 관찰을 시도했다. 심판의 날이라던 그해 12월 21일이 됐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도들은 한동안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교주가 나서 “여러분의 굳건한 믿음으로 세상이 구원받았다”고 하자 신도들은 자부심을 갖고 더 열심히 포교에 나서더라는 것이다. 페스팅거는 그 관찰을 토대로 ‘인지 부조화’ 이론을 구축했다. 기존 믿음에 배치되는 증거에 부딪히더라도 생각을 바꾸기보다 증거를 뒤틀어 기존 생각에 맞추는 방법으로 심리적 평화를 얻는다는 것이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과학적 설명이 제공된다면 생각을 고쳐먹어 올바른 판단을 갖게 되지 않을까. 미국 예일대 댄 카한 교수는 그런 기대를 갖지 말라는 연구들을 발표해왔다. 집단 정체성에 관련된 신념은 과학적 정보, 객관적 증거를 갖다 줘도 교정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카한 교수는 1100명을 상대로 화장품의 효과를 소재로 살짝 까다롭게 꼬아 놓은 통계 해석 문제를 냈다. 그랬더니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정답 비율이 높았다. 다음엔 총기 규제의 효과와 관련된 같은 구조의 문제를 제시했다. 미국에서 총기 규제는 정치 진영 간 대립이 날카로운 사안이다. 이번엔 수학적 추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자기 정치 성향에 맞는 쪽으로 오답(誤答)을 냈다. 사실상의 수학 문제를 푸는 데도 집단 동조 압력이 작용한 것이다. 카한 교수는 기후변화, 원자력 등 사안에서도 같은 경향을 확인했다. 지력(知力)은 옳은 답을 찾는 게 아니라 기존 신념을 강화하는 도구로 쓰였다.

     

    카한 교수는 “사람들은 논쟁에서 이기고 싶은 것이지 진실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이걸 ‘정체성 방어 인식’이라고 했다. 며칠 전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이 후쿠시마 오염수와 관련한 신문 기고에서, 미국 민주당원은 94%가 기후변화를 심각한 위협이라고 보는 반면 공화당원은 19%만 그렇게 생각한다는 여론조사를 소개했다. ‘생각의 감옥’에 갇히면 진영의 믿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보와 자료를 모으고 논리에 살을 붙여간다.

     

    이런 상상을 한번 해보자. 김어준씨가 토크쇼에서 “후쿠시마 방류는 우리완 아무 상관 없다”고 얘기했다. 진영 사람들은 처음엔 농담으로 생각하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김어준이 거듭해서 오염수를 방류해도 한국 바닷물의 삼중수소 농도는 10만분의 1 높아질 뿐이라는 분석을 인용하며 안전하다고 주장했다고 치자. 지지 집단에선 차츰 그의 유튜브를 멀리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더 계속되면 그는 진영에서 배척당한다. 김어준은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다.

     

    화제가 저출산, 대학입시 같은 거면 점잖게 토론이 가능하다. 의견이 달라도 정서적 갈등을 겪지 않는다. 반면 4대강, 광우병, 오염수처럼 정치화된 쟁점이라면 대립 견해를 표출하면서 친밀 관계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소속 진영의 지배적 관점에서 이탈했다가는 외톨이가 될 수 있다. 그걸 잘 아는 사람들은 진영의 견해에 주파수를 맞춰간다. 집단의 믿음과 배치되는 정보는 배제하고 일치하는 증거들을 선택적으로 수집하게 된다. 독자 판단을 갖기 힘든 복잡한 사안이라면, 굳이 스스로 정보를 수집하기보다 진영 리더의 설명을 추종하면 된다. 상대방 주장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다.

     

    4대강, 광우병, 오염수는 완전히 독립적 이슈다. 논리적 연관성이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의 4대강에 대한 입장을 알면 그가 광우병, 오염수엔 어떤 견해일지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과학적 증거와 논리보다 정치 진영이 의견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진영의 신념이 ‘생각의 감옥’이 되는 것이다. 국회 1당이 총력을 기울여 정치 쟁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 방류수 문제는 과학 영역을 떠나 버렸다. 진영 간 어지러운 싸움일 뿐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영국 원로 과학자를 향해 “돌팔이”라고 했다. 민주당은 IAEA 보고서를 “깡통 보고서”라고 했고 지지자들은 IAEA 대표에게 “100만유로 받았냐”고 고함쳤다. 그들에게 과학은 적(敵)이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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