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억: 도전의 즐거움낙서장 2023. 7. 21. 18:54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니 많은 어려운 일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감사하다. 시골 촌놈이 시골에서 어렵게 중학교 시절올 보냈지만 고등학교는 3년간을 나라에서 주는관비 장학금으로 졸업을 했다. 이것이 발판이 되어 1969년 2월초 한전에 대졸공채로 입사하여 1998년말까지 30년을 항상 회사 성장이 나의 성장이란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고 그 덕분에 처장으로 퇴직했다.
퇴직후 잠시 갈등도 있긴 했으나 감사한 마음으로 지금까지 한번도 안 해봤던 것에 도전해보려 했다. 그중에서 마라톤, 도보 국토종주, 전국 자전거일주를 했던 것이 기억에 남고 나름대로 성취감도 느낀다.
첫째 마라톤 도전 이야기다. 마라톤은 띔박질이 기본이며 이것은 나의 건강에 도움이 될뿐만 아니라 자회사로 간 직원들에게 격려도 될수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라톤을 하기위해 2000년12월에 심박수 측정 기능이 있는 마라톤전문용 시계를 구입하여 그 다음해 1월1일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1키로부터 연습올 하면서 거리를 늘여나갔다.
그렇게 하여 2001년 3월 초 서울 마라톤 클럽에서 주관하는 마라톤대회에 10키로 부분에 참가한 이후, 5월 21일 인천공항개항기념 하프마라톤, 6월 잠실운동장에서 관광협회 주관 하프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후, 조선일보 춘천마라톤대회에 참가신청을 하고 본격적으로 연습했다. 결국 10월 21일 춘천마라톤대회에 참가하여 4시간 9분에 완주하였다.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 추억은 것은 마라톤선수대열이 선두와 후미와의 거리는 길게 장사진을 이루었는데 선두에서 아~ 하는 함성을 지르면 그것을 다음 사람률이 이어받아 계속 뒤로 전달하고 다시 후미에서는 선두로 그리고 선두에서는 다시 후미로 전달하는 함성의 메아리 소리는 매우 참 감동적이었다.
그뒤 11월 11일 여의도에서 63.5키로 Km 울트라 마라톤 대회에가 있는 것을 알고 그 대회에도 참가하였다.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 것은 새벽 5시에 출발시켰다는 것과 화장실을 다녀오고 나면 보다 뒤에서 달려오든 사람들이 앞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그들도 역시 화장실에 갔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가면서 실례를 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후부터는 나도 달리는 중에는 화장실을 가지 않았다. 2003년 자원봉사한다고 스리랑카에 있을 때 그곳에서 얼리는 단축마라톤에 참가했다. 그대회는 일종의 Fun Run 대회였다. 장년부로 참가신청을 했다. 그곳에서 우승올 했다. 상금은 받았으나 상장은 없었다. 왜 상장이 없느냐고 했더니 그나라 문화란다.
마라톤연습은 그곳 날씨가 더워 새벽에 일어나 연습했다. 연습코스는 신작로를 따라 연습했다. 신작로옆 마올에는 밤에 도둑을 막는다고 개를 풀어놓는다. 연습중 뜻하지않게 개들의 습격을 받은 후에는 개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몽둥이를 들고 연습했다.
마라톤행사당일 행사장에 갔다. 날이 몹시 더웠지만 6Km로 단거리이기에 한번 뒤로 처지면 딸아 잡을 수가 없을 것 같아 처음부터 힘을 내여 맨 앞에서 1위를 지키며 경찰 선도차를 따라갔다. 갑자기 선도차가 멈췄다. 이상하다 앞을 보니 기차 횡단철도인데 공교롭게 그 시간에 가차가 오고 있었다. 나는 선도차를 추월해서 기차가 지나가는 시간에 혼자 뛰어 갔다.
같이 뛰어도 내가 선두로 왔는데 기차가 막아 주었느니 우승은 당연하지 않은가? 난생 처음으로 우승을 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마라톤선수가 선도차를 뒤에 뒤고 뛴 선수는 아마도 나뿐이라 생각한다.
그후 마라톤우승하면 생각나는 것은 2009년 11월 29일 잠실운동장에서 열리는 손기정 마라톤 대회에 32키로부분에 참가하여 연령대(60대)에서 우승을 했다.
보스톤 마라톤에 도전하고 싶었다. 관심을 갖고 보스톤 마라톤 홈페지를 검색해봤다. 그 마라톤대회에 참가신청하려면 그들이 원하는 완주기록이 있어야했다. 그 기록은 참가신청 전 2년내의 국제대회기록이어야했다. 그기록은 참가선수의 나이에 따라 다른데 나에게는 4시간 15분기록을 요구했다.
그래서 2008년 3월 16일 서울 국제마라톤참가해서 얻은 3시간 51분09초의 기록을 첨부하여 참가신청을 했다. 2009년 4월 20일에 개최되는 제 113회 보스톤마라톤대회에 참가하여 4시간 11분 35초로 완주했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것은 연도 변에는 거의 빈틈없이 전 구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과 함께 나와서 열띤 응원하는 모습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잘 뛰지못할 것 같은 뚱뜽한 사람도 잘 뛰었고 간간히 자기 동네를 뛰어가는지 그곳에 응원하던 사람들이 서로 이름을 불러가며 반갑게 인사하며 포용을 하고 다시 달리는 모습이 회상되었다.
하프지점 근처에는 힐러리가 다녔다는 웨슬레이 대학생들이 연변에 나와 응원하는 것이 전통처럼 되어있는 지역이다. 그곳에 도착하니 소문들은 대로 학생들이 Kiss me 라는 프랑카드를 들고 나와서 응원을 하기에 나도 용기를 내어 처음으로 낯모르는 사람과 키스를 했다.
두 번째 자전거 전국일주 도전이다.
일주코스를 서울 집에서 자전거로 출발하여 강원도 고성 최북단 마을인 명파 초등학교에 도착 한후 그곳에서 부터 동해안 차도를 따라 포항을 지나 부산까지, 그리고 그곳에서 남해안 도로를 따라 해남 땅끝 마을까지, 그리고 서해안 도로를 따라 인천까지 와서 아라 뱃길 자전거 도로를 타고 서울 집으로 오는 코스를 잡았다.
그렇게 잡은 이유는 명파 초등학교는 우리나라 최북단 초등학교이고, 호미곶은 육지에서 가장 동쪽 포항의 한 곳이며 땅끝 마을은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 마을이고 진주 촉성루는 논개의 애국충절의 의미를 생각했다. 여수공항 근처에 있는 손양원목사님 기념관은 손양원 목사님이 아들이 625전쟁때 살해되었는데 아들의 살인자를 용서하고 자기의 양자로 삼았기에 용서란 입장에서 볼 때 손양원 목사님이 대표적 인물로 생각해 그곳을 방문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인천으로 가는 길에 평택이 서해안 해상의 허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그곳을 방문지로 넣었고 인천으로 올라오면서 인천 수복의 영웅인 맥아더장군 동상을 참배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혼자서 위험한 차도를 자전거로 여행을 계획했기에 만약의 사고에 대비해서 전국자전거 일주 패찰을 만들어 그안에 비상연락망으로 저의 집사람의 전화번호를 적어놓았다.
2014년 10월 7일 서울올 출발하여 9일 명파초등학교에 도착. 부산에는 10월 16일, 진주 촉성루는 17일, 또한 10월 19일은 손양원 기념관에 도착했다. 21일 땅끝 마을에 가서 땅끝이란 표지석과 전망대를 봤다.
이제 동해안과 남해안을 돌았으니 서해안을 따라 인천으로 방향을 잡고 올라갔다. 이순신장군의 승전한 곳인 울돌목은 23일, 그곳에서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실감 했다. 28일 대부도에서 숙박하고 29일 맥아더 동상이 있는 인천 자유공원을 찾아 갔다. 그리고 아라뱃길 터미널을 찾아 갔고 그곳에서 자전거 길을 따라 서울로 돌아왔다. 결국 10월 7일 9시에 집을 떠나 29일 오후 8시에 집에 도착했다 .
그 기간을 돌아보면 혼자이기에 길을 잃어 고생도 했고 13일 포항에 있었을 때는 태풍의 영향권으로 비바람 때문에 하루를 묵여 있기도 했다. 해남에서 목포로 오는 도중 탈수 현상이 와서 갑자기 병원을 찾아야하는 어려움도 있긴 했지만 모텔주인의 친절함으로 잘 해결되었고 , 보령에 도착해서 식사하면서 모텔을 물으니 식당에서 식사하시던 한분이 ’어르신이 고생한다’며 모텔 사장님이 무료로 숙박을 해결해주셨다. 이야기를 들은 식당주인도 식사비를 받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니 세상은 참 아름다운 세상이라 생각 했다.
셋째 도보 국토종단 도전이다. 2012년 봄, 땅끝 마을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도보종단을 계획했다. 전국 지도를 구입해 해남 땅끝 마을에서 강원도 통일전망대까지 직선을 그었다. 갈 수 있는 도로와 숙박 가능한 곳에 동그라미 쳤다. 걸어서 해남 땅끝 마올부터 광주, 순창, 진안, 무주, 문경, 제천, 평칭,인제를 거쳐 통일전망대에 도착하는 도보 국토 종단올 계획했다.
혼자 가는게 무리라 생각했지만 성공올 장담할 수 없어 아무에게도 권하지 못했다. 한데 교회 지인이 우연찮게 소식올 듣고 따라나섰다.
4월 30일 동행자와 함께 동부뻐스 터미널에서 해남행 버스를 타고 해남에서 다시 땅끝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바로 도보 국토 종단 도전이 시작되었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그런데 순창에 닿을 때였다. ‘숙소를 찾았지만 공교롭게 지역 행사 때문에 모두 사전 예약돼 있어 잘 곳올 구활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다가 교회 문을 두드렸다. 염치 불구하고 목사님께 ’재워 주십쇼!’ 했다. 흔쾌히 받아 주어 목사님 관사에서 무사히 잠을 잘수가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다. 기필코 완주하겠다던 동행자는 체력의 한계로 보은에서 두손을 들었다. 처음 맘먹은 대로 다시 혼자 걸어야 했는데 집사람이 주말마다 내려와 함께 걸어 주었다. 도보 여행이 처옴인 아내의 발은 날이 갈수록 물집과 상처로 가득했다. 무척 미안했지만 고맙단 말조차 못했다.
아내가 돌아가면 다시 혼자 걸었다. 외롭고 마음이 약해졌지만 , 그때 마다 초심을 되새겼다. 마첨내 21일 만에 톰일전망대에 도착하니, 옛 사우들이 응원하러 와 있었다.
해냈다는 성취감보다 감사에 목이 메었다. 도와주신 분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렬 스쳐갔다. 이 종주는 나 혼자 한게 아니라 우리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이룬 성공이었다.
도전올 처음 시작할때는 성공한다는 것을 장담할수없었다. 사실을 고백한다면 어느것 하나도 제대로한 것 없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포기를 않했더니 결국 성공했다. 여러분들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라고 권하고 설다. '저 사람도 했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뭐야!’ 다만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말이다.
2023년 7월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며
'낙서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에게 얽힌 625와 1129의 의미 (0) 2023.07.27 ‘가붕개 공화국’ (0) 2023.07.24 서로 서로 배려하며 (0) 2023.07.20 이승만대통령 58주기 추모식 (0) 2023.07.19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0) 2023.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