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주 양씨(淸州楊氏)의 시조(始祖)에 대하여종교문화 2023. 8. 22. 22:16
‘청주 양씨’시조 충헌공(忠憲公) 양기(楊起), 배종사신으로 공민왕과 노국공주와 함께 고려에 나오다
청주양씨 시조 충헌-암곡공(諱起)는 중국의 홍농 양씨가 원류이다. 중국의 홍농양씨는 동근동족이다. 홍농양씨는 중국의 수천개 성씨중 4대 문벌에 속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청주 양씨’ 시조는 호(號)가 ‘암곡(巖谷)’이고, 시호(諡號)는‘忠憲’ (충헌: 조선의 이태조로부터 받음)인 휘기(諱起) 선조(1303~1394. 7. 17)이시며 원의 수시중(首待中:정승)으로, 중국 원나라황실에서 황세손과 공주의 교육을 맡았던 분이다.
그러던 중, 魯國公主(노국공주: ?~1365: 魏王(위왕)의 公主)가 당시 원에 볼모로 심양왕(瀋陽王)으로 북경)에 머물던 고려 세자 {기(祺): 후에 고려 공민왕(1330~1374)이 됨} 와 결혼하여 1351년12월 고려로 환국할 때, 충헌공 청주양씨의 시조는 원황제 順帝(순제)의 각별한 명에 따라 이들을 배종(陪從)하여 사신(使臣)으로 고려에 나오시게 되었다.
당시 배종사신 제도는 원이 부마국인 고려를 통치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원 황실과 고려 왕실간 중요한 가교 역할을 했다. 근대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국가에 파견하는 총독의 역할과 유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고려 충렬왕忠烈王부터 시작하여 (1275), 원이 쇠망기에 접어든 공민왕까지 100년간 (1275~ 1374) 지속되어온 원의 고려에 대한 통치술의 하나였다.
충헌공 시조가 고려에 나온후(1351) 16 여년간 고려의 여러 국내외 사정을 두루 살펴보고, 그간 고려에서 매년 원에 바쳐 오던 4대 세공(歲貢) 동녀(童女) 5천명, 준마(駿馬) 3만필, 능견(綾絹織) 3만동, 저포(苧布) 6만필로 인하여 나라의 재정이 크게 피폐해지고 있음을 알았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때마침 이민족인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는 이미 쇠망기에 접어들어 풍전등화 직전 상태에 접어들었고 한족漢族인 주원장 (朱元璋) (1328.10~ 1398.6)이 세운 명나라가 일어남에, 공민왕이 이에 부응하여 반원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당시 장차 중국대륙의 판세와 형국의 추이를 예측하신 시조 ‘암곡공’께서 공민왕에게 간언하기를 “장차 중국 대륙의 신흥국인 명나라와 국교를 맺고 선린관계를 유지함이 좋을 것같다”는 취지로 진언했다.
이에 공민왕은 이를 기꺼이 수락하고, ‘암곡공’에게 그 임무를 직접 수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까지는 원나라 사람인 ‘암곡공’ 을 고려를 대표하는 공식적인 사신으로 보내기는 부적합했다. 그리하여 예의판서(禮儀判書) ‘張子溫’(장자온:?~1388)을 공식적인 사신으로 삼아, 우리 시조 ‘암곡공’을 수행하게 했다.
공민왕은 1368년 11월 (1368년 홍무洪武 원년 말)에 명태조를 예방하기를 간곡히 청하면서 “그러하면 명태조 주원장(朱元璋)를 예방하여, 고려와 국교를 개설하여 형제지국으로지낼 것과, 또한 지난 100여 동안 원나라에 바쳐오던 4대 세공으로 인하여, 고려의 재정폐해가 극심함을 상세히 고하여, 장차 명나라는 고려로부터 그와 같은 세공을 받지 말아 줄 것을 간청하여 보라”는 취지로,우리의 시조 암곡공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겼다.
이에 우리 시조 ‘암곡공’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그해 말에(홍무 원년 말), 명태조를 예방하여 이를 자세히 고하고 설득한 바, 그로부터 공민왕의 요구사항인 4대 세공(歲貢) 동녀(童女) 5천명, 준마(駿馬) 3만필, 능견(綾絹織) 3만동, 저포(苧布) 6만필의 조공폐지를 승인받아 오는 큰공을 세웠다.
이와 같이 충헌공께서 명태조를 예방하고 큰공(금후 4대 세공 탕감 및 선린국교수립)을 세우고 돌아오시자(1369년봄), 이에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얼마전 세상을 떠나, 심리적으로펀 불안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크게 기뻐하며 충헌공을 ‘벽상삼한창국공신(三韓 昌國 功臣)’과 ‘상당백(上黨伯)’이란 관직을 내려 ‘공신’과‘정승’으로극진히 예우하고, 동시에 ‘淸州, 海州, 松和’를 식읍으로 하사하고 이에 더하여 청백리로 봉하고, 또한 1369년 우리나라에서의 본관을 ‘청주淸州'로 내렸다.
이 때부터(1369년) 우리나라(당시는고려)에서는 우리 충헌공 선조의 후손들은 중국의 홍농양씨(弘農楊氏) 대신, 지금의 청주양씨(淸州楊氏)로 본관을 삼게 되고, 암곡 휘기(諱起)’선조는 우리나라 청주양씨(淸州楊氏)의 始祖가 되셨다. 이는 지금부터 약654년 전의 일이다.
우리의 선조 암곡 휘기(諱起)’선조는 슬하에 6남1녀를 두셨다. 1자는 서원백西原伯 ‘성주成柱’이고,2자는 정승공 ‘천주天柱’이고,3자는 典書公 ‘만수萬壽’이고 4자는 西平君지수(之壽)’이고,5자는 밀성군密城君 ‘근(根)’이고 6자는 당악군(당악군(唐岳君) 포(浦)’이시다.
충남 논산시 상월면 충헌사 묘정에 세워진 충헌공 신도비
추신: '월간 포천' 잡지에서 메모했던 내용을 참고해서 작성했습니다.
'종교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어탕 (1) 2023.09.23 바티칸에 갓 쓴 김대건 신부 조각상… 세계 聖人들과 나란히 (0) 2023.09.07 감사는 선불입니다. (0) 2023.08.06 교회가 사회로 부터 신뢰받으려면 (0) 2023.06.27 서울 정신여고 강당에 있는 주님의 교회는 ? (0) 2023.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