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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끼리’ 김응용 “등산 덕에 지금도 팔팔”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3. 10. 30. 07:58
    김응용 감독은 예전에 비해 훨씬 날씬해졌다. 꾸준한 걷기와 골프로 몸무게를 30kg 가까이 줄인 그는 “허리가 잘 돌아간다”고 말했다. 김응용 감독 제공

    ‘타이거즈 타임’이라는 게 있다.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자리에 나오는 것이다. 정확히 몇 분 전에 도착해야 한다고 명시된 건 없다. 다만 눈치껏 충분히 약속 장소에 도착해야 한다.

    한국시리즈 10회 우승에 빛나는 ‘코끼리’ 김응용 전 해태 타이거즈 감독(83)과 약속을 잡았으니 당연히 ‘타이거즈 타임’을 생각했다. 일찌감치 집을 나서 약속시간보다 20분 정도 먼저 도착했다. 식당에 들어서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천만의 말씀. 김 감독과 일행은 이미 식당 한쪽에 자리를 잡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참석자 중 제일 막내였던 기자는 “늦어서 죄송하다”며 머쓱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주위 사람들은 모두 ‘타이거즈 타임’에 익숙하다. 하지만 어느 조직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기 마련. 한국 프로야구 팀들은 대부분 구단 버스를 타고 함께 이동한다. 해태 감독 시절 선수들은 출발 30분 전에는 이미 착석을 완료하고 있었다.

     
    휴게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화장실 이용을 위해 10분 휴식이라 하면 재빨리 볼일을 보고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어느 날 한 선수가 우동인가 핫도그인가를 먹느라 출발 예정 시간에 임박해 버스에 돌아온 일이 있었다. 하지만 ‘타이거즈 타임’에 따라 구단 버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뒤에 홀로 남겨진 그 선수는 “나는 정확히 제시간에 도착했다”고 항변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그는 택시를 불러 뒤늦게 선수단에 합류해야 했다.

     

    식사 자리에서도 김 감독은 여전했다. 빠른 속도로 눈앞의 음식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80대 중반의 향해 가는 김 감독도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렸다. 예전부터 야구계에 회자되던 말이 떠올랐다. “함께 고기를 먹으면 제대로 익지도 않은 고기를 젓가락으로 싹 쓸어가 다른 사람이 먹을 게 없다”던.

    생각난 김에 “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요”하고 물었다. 그는 “있었던 이야기”라고 답했다. 그의 식욕이 남다르긴 했다. 하지만 가난하고 어렵던 당시 시절도 원인 중 하나였다. 그는 “처음 실업팀에 입단했을 때 거의 막내였다. 후배라곤 백인천(전 LG, 롯데 감독) 한 명이었다. 여관에서 합숙 훈련을 하면 선배들이 모두 먼저 다 먹은 후에 남은 밥을 먹곤 했다”며 “여관에서 밥해주는 분께 나랑 백인천이 먹게 밥 두 그릇만 따로 남겨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다. 배팅볼을 한 시간 던지면 밥 한 그릇 더 준다는 말에 남아서 배팅볼을 던지기도 했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안 익은 고기를 부리나케 입으로 가져간 것도 십분 이해가 됐다.

     

    타고 난 덩치와 지기 싫어하는 승부욕으로 그는 단번에 한국 야구 최고의 타자가 됐다. 프로야구 출범 전 실업 야구 시절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홈런 타자이자 1루수였다. 코끼리라는 별명도 그때 생겼다. 덩치가 큰 그가 1루에서 야수들이 던진 공을 받는 모습이 마치 코끼리가 사람들이 던져 준 비스킷을 코로 받아먹는 것 같아서였다.

    국가대표의 터줏대감이기도 한 그는 ‘한일전’의 영웅이기도 했다. 한국 야구 태표팀은 196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3-0으로 꺾고 우승했는데 당시 4번 타자였던 그는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1회 결승타와 8회 2점 홈런을 모두 때렸다.

    ‘감독 김응용’은 많은 사람들이 아는 바 그대로다. 실업팀 한일은행에서 9년간 감독 생활을 했던 그는 프로 출범 후 1983년 해태 감독이 됐다. 이후 2000년까지 18년간 해태를 이끌며 9차례나 한국시리즈 정상을 차지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해태는 9번 한국시리즈에 올라 9번 모두 우승했다. 2001년 삼성 라이온즈으로 옮긴 뒤에도 2002년에 우승을 차지해 ‘V10’을 달성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한국 대표팀 사령탑으로 동메달 결정전에서 일본을 꺾고 동메달을 차지하기도 했다. 2004년부터는 야구인으로는 처음으로 삼성 사장을 맡아 7년간 일했고, 2016년부터 2020년까지는 아마 야구의 수장인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을 역임했다.

     

    야구 감독은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이다. 3, 4년만 감독을 해도 머리가 하얗게 센다, 약을 달고 사는 감독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김 감독은 개성 있는 선수들이 차고 넘쳤던 해태를 18년간 지휘했고, 이후에도 삼성과 한화 감독 등을 지냈다. 먹을 걸 좋아하는 그는 한창때 몸무게가 120kg까지도 나갔다.
    그가 온갖 스트레스 속에서도 건강을 지킬 수 있었던 건 바로 ‘등산’ 덕분이었다. 젊을 때부터 산을 좋아했던 그는 틈만 나면 산을 탔다.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산 중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다. 시즌이 끝난 뒤에는 몇 날 며칠을 산을 다녔다.

    한창 바쁜 시즌 중에도 그는 머무는 도시 인근의 산을 올랐다. 대구에 가면 팔공산, 부산에 가면 금정산, 대전에 가면 계룡산을 올랐다. 그는 “프로야구는 어차피 밤에 주로 경기가 있으니 낮에 시간이 있지 않나. 아침에 일어나 한두 시간 산을 타고 내려와서 밥 먹고, 낮잠 한 시간 자고 운동장에 나가곤 했다”고 했다.

     

    특히 해태의 연고지인 광주에 있는 무등산은 마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크로스컨트리를 겸비한 무등산 등산은 그가 해태 선수들에게 종종 시키곤 하는 훈련이었다. 한 달에 한 번은 무등산을 뛰었다. 무등산을 훤히 꿰고 있던 그는 선수들이 꾀를 내어 내려오곤 하던 길목을 떡 하니 지키고 있곤 했다. 샛길로 내려오다가 걸린 선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는 “뒤돌아보면 참 재미있는 시절이었다. 언젠가 하루는 무등산에 폭설이 내렸다. 약 15km정도 코스였는데 선수들에게는 8km밖에 안된다고 속여서 훈련을 시킨 적도 있다”며 웃었다. 그는 등산과 함께 테니스도 많이 쳤다.

    요즘 그는 거의 산에 오르지 않는다. 무릎이 좋지 않아 내려올 때 무리가 가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집이 있는 경기 분당의 탄천길을 많이 걷는다. 하루에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가량을 꾸준히 걷는다.
    먹는 양도 크게 줄였다. 그는 “아내가 예전처럼 많이 안 해주더라고”라고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옆에 있던 일행은 “많이 줄였다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일행 중에서는 가장 많이 드신다”고 했다. 운동을 꾸준히 하고 먹는 양을 줄이면서 그의 몸무게는 요즘 80kg 후반대까지 내려왔다. 그는 “몸무게를 20kg 넘게 줄이니까 무릎 아픈 게 싹 가셨다”며 “골프를 칠 때 허리도 잘 돌아간다”며 웃었다.

    요즘 그는 걷기와 함께 골프로 건강을 유지한다. 등산과 테니스를 할 때는 골프를 자주 치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부쩍 재미를 들였다. 필드는 한 달에 한두 번 나가고 연습장에도 종종 간다. 그의 골프 동반자는 해태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제자인 선동열 전 국가대표팀 감독과 양승호 전 롯데 감독, 이상국 전 해태 단장 등이다. 그는 “골프는 운동 삼아 친다. 끝나고 나서 밥 맛있게 먹고, 막걸리 한 잔하는 재미에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필드에만 서면 특유의 승부사 기질이 어김없이 나온다고 한다. 제자들과의 대결에서도 그는 절대 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코어도 80대로 나이에 비해 무척 준수한 편이다. 티는 시니어 멤버들이 쓰는 옐로 티를 사용한다. 그는 “나도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화이트 티를 쓰고 싶다. 그런데 같이 치는 멤버가 옐로 티를 고집해 나도 옐로 티를 쓸 수 밖에 없다”며 웃었다.

    옛날 해태 멤버들끼리의 골프 대결은 샷뿐 아니라 말싸움의 향연이기도 하다. 멘탈 게임이라는 골프지만 워낙 편한 사이들이다 보니 상대의 샷에 대해 비난을 하기도, 칭찬을 하기도 한다. 그는 “야구를 할 때 3만 관중 앞에서도 쫄지 않았다. 골프 칠 때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한다고 해서 샷에 영향을 받거나 하진 않는다. 내기 골프를 하면 주로 이기는 쪽”이라고 했다. 양승호 전 감독은 “감독님에 대한 예우로 져주는 것일 뿐”이라고 항변했다.

     

    평생을 야구와 함께 해 온 그는 지금도 야구와 관련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선다. 작년까지 그는 손수 운전을 해 충북 진천 등의 초등학교를 찾아 재능기부를 했다. 그는 “다니면서 좋은 선수가 될 재능 있는 선수를 보면 ‘야구 한 번 해보라’고 권하곤 한다. 얼마 전에도 초등학생인데 키가 187cm인 선수를 한 명 발굴해 두어날 연습을 시켜서 야구를 하는 중학교에 진학시켰다”며 “이 나이에도 야구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시간이 제일 잘 가는 것 같다. 언제까지라도 야구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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