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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기 기증 유가족과 수혜자하나된 ‘생명의 소리 합창단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3. 12. 2. 11:26

    당신의 심장이 내 가슴 속에서 뜁니다… 함께 노래해요

     
     

    노래는 육체가 없다. 그러나 체온을 지닌다.

    영하(零下)의 아침, 대학 병원 로비에 작은 레드 카펫이 깔렸다. 임시 무대였다. 아픈 사람들이 찾는 곳, 휠체어와 환자용 침대가 들락거렸다. 회전문이 돌아갈 때마다 훅 냉기가 끼쳤다. 온기가 필요한 순간. 23인의 ‘생명의소리 합창단’이 입장해 세 줄로 도열했다. 장기 기증 유가족과, 장기 기증으로 살아난 이식 수혜자들로 구성된 합창단. 병원에서 가슴이 수백 번도 더 무너졌던 사람들이 이번엔 위로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지난 24일 인하대병원 측이 마련한 소규모 무료 공연에 특별 가수로 초청된 것이다. 지휘자가 손을 들어 올리자 단원들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리워 그리워 그리워 그리다가 차라리 눈을 감는다… 보고파 보고파 보고파 너를 부르다 목이 멘다….”

    ◇영원한 그리움, 새 삶을 얻다

    지난달 24일 인하대병원 공연 직후 '생명의소리 합창단' 멤버들이 모여 활짝 웃고 있다. 병원 로비에 마련된 작은 가설 무대였지만 노래의 감동은 관객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노래 ‘꿈에’가 울려 퍼졌다. 관객 몇이 눈물을 훔쳤다. 지난해 합창단에 합류한 이소현(49)씨가 작사한 올해의 합창단 주제곡. 울음이 터질까 노래하기 전에 이씨는 입술에 힘을 꾹 줬다. 뇌전증을 앓던 아들이 쓰러진 건 2021년이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뇌사 판정을 받았다. 장기 기증을 결정했다. 긴 투병,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환자 가족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열여덟 살 학준 군은 다섯 사람의 몸에 생명을 심어주고 숨을 거뒀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데, 잘 안 나와요. 그러다 작년 11월 정기 공연 날 새벽에 학준이가 꿈에 나왔어요. 객석에서 박수 치면서 웃고 있었어요. 우리 아들이 응원하고 있었구나.” 마지막 노랫말처럼 “너의 사랑이 나를 일으킨다”고 엄마는 생각했다.

     

    원년 멤버 김영희(69)씨는 노래할 때마다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2004년 심장을 이식받았다. 장기 이식 덕에 인생 후반부에 새 삶을 얻었음에도, 유가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솔직히 ‘이제 살았다’는 마음뿐이었어요. 열심히 살아야지. 합창단에 와서야 그분들 심정을 처음 알게 됐어요. 가족을 잃은 거잖아요. 너무 죄송해서 한 달간은 거의 숨어다녔어요. 그런데 오히려 다독여주셨어요. 꼭 건강하라고,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누군가가 당신을 살렸듯 내가 그분을 계속 숨 쉬게 한다고.” 김씨 역시 훗날 자신의 장기를 내어주기로 기증 서약을 했다.

    ◇목소리가 서로 돕는다… 합창이니까

    매년 한 차례 열리는 정기 공연에서 노래하는 합창단. 최연소 단원의 나이는 다섯살이다. /생명의소리 합창단
     

    모두 아마추어다. 악보도 볼 줄 모른다. 그래도 노래할 수 있다. 합창단 출범 당시부터 매 순간 동행하고 있는 장연정 지휘자는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노래를 음역대 별로 한 소절씩 불러드린 뒤 따라 부르게 하는 식으로 연습하고 있다”면서도 “합창은 같이 부르는 것이기에 서로 보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노래할수록 이들의 표정이 변화하는 것을 지휘자는 체감하고 있다. “1회 정기 공연 때는 온전히 슬픔의 감정을 토해내는 노래였어요. 그립다고, 아프다고, 서러운 노래밖에 할 수가 없었어요. 3년쯤 되니 달라졌어요. 밝은 노래도 하고 안무도 하시고요.”

     

    열정은 아마추어가 아니다. 매년 3월 시작해 상반기 월 2회, 하반기에는 매주 모여 연습한다. 공연이 잡히면 주 2회. 심지어 제주도에서도 날아온다. 일곱 사람에게 심장과 폐·간 등을 아낌없이 건네고 떠난 홍준 군의 부친 고동헌(45)씨. “3년 전 막둥이 보내고 거의 1년을 폐인처럼 지냈어요. 극단적인 생각도 머리에 맴돌고. 그러다 처음 연습실에 들어섰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이유 불문 그냥 환호해주셨거든요. 세상에서 유일하게 저를 여전히 ‘홍준이 아빠’로 불러주는 분들, 이분들 보려고 가는 겁니다. 계속 홍준이 아빠로 살아가려고요.”

     

     

    현재 합창단원은 69명이다. 유가족 33명, 수혜자 22명, 기증 희망 서약자 14명. 삼대(三代)가 함께 하는 독특한 가족도 있다. 2014년 아들을 가슴에 묻은 임귀녀(70)씨는 현재 사위와 외손녀·외손자 네 식구와 합창단에서 활동한다. 외손자 황예찬군은 다섯 살, 최연소다. 임씨는 “어려서 거창한 뜻은 몰라도 하늘나라에 먼저 간 삼촌에게 노래해주고 싶다고 하더라”면서 “아이들 목소리가 섞이니 노래가 더 순수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정기 공연 마지막 곡은 ‘우리는 하나’(윤복희)였다. 살아온 시간, 모인 이유, 기증자와 수혜자의 구분을 넘어 모두 하나라는 의미. “당신의 사랑은 너무나 넓고 크오. 그래서 나는 살아 가겠소.”

    ◇결국 노래가 이긴다

    '생명의 소리 합창단'이 처음 구성된 2015년 당시 세계 장기 기증 및 이식의 날 공연 장면. /한국장기조직기증원
     

    이 합창단은 원래 시한부였다. ‘세계 장기 기증 및 이식의 날’을 맞아 2015년 처음 국내 행사가 열리자 한국장기조직기증원 측이 준비한 일종의 이벤트 차원이었기 때문이다. 생면부지의 장기 기증자 유가족과 수혜자가 모여 몇 차례 공연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했지만, 이들의 치유 효과는 그 상징적 차원을 훌쩍 뛰어넘었다. “집 안에서 혼자 우는 것과 함께 우는 것은 다르다”고 한 단원은 말했다. “특히 자식을 잃은 부모는 밖에 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웅크리고 계속 자책하죠. 그런데 나도 모르게 아이 이야기를 그렇게나 많이 털어놓고 또 웃고 있더라는 겁니다.”

     

    해산할 수가 없었다. 단원들이 알음알음 예산을 마련해 기증원 측에 합창단 공식 출범을 역(逆)제안했다. 그렇게 ‘생명의소리 합창단’은 한 해 더 생명을 이어가게 됐으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겼다. 2016년 기증원이 공공기관으로 지정되면서, 법적으로 후원금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합창단의 존립이 불투명해지자 이번에도 단원들이 나섰다. “그럼 우리가 직접 하겠다”며 보건복지부를 찾아가 설득하고 모금 활동까지 해가며 합창단 운영 등을 위한 재단법인(한국기증자유가족지원본부)을 2018년 설립했다. 살림은 빠듯하다. 고(故) 송아신씨의 부친 송종빈(68)씨는 “사실 나라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인데 쉽지 않은 게 사실”이라면서도 “또 한 번의 상실을 겪을 수 없기에 힘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줄어드는 기증자, 늘어나는 대기자

    출근길 불의의 교통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졌던 박래영(26)씨는 지난달 자신의 장기를 기증하고 영면했다. 기증자의 가족들은 가장 어려운 선택의 순간에 가장 숭고한 결정을 내렸고, 박씨가 남긴 심장·간장·좌우 신장은 네 명의 생명을 구해냈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
     

    노래는 더 멀리 나아가고 있다. “장기 기증이 너무 엄숙하고 슬프기만 한 게 아니라는 걸, 노래처럼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기증자가 수술실에 들어갈 때 숭고한 희생을 예우하는 안내 방송이 병원 전체에 울려 퍼진다.

    ‘장기 기증 사랑 인연 맺기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기증자 가족과 수혜자가 서로의 소식을 교환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는 등 대중적 인식도 점차 나아지고 있다. 그러나 ‘망자를 두 번 죽이는 일’과 같은 왜곡된 시선도 잔존하는 게 현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에 따르면 지난해 뇌사 장기 기증자는 405명. 전년보다 37명 줄어든 숫자다. 반면 이식 대기자는 4만1706명으로 전년 대비 2445명 늘었다.

     

    그래서 계속 노래한다. 합창단은 이날 네 곡을 연달아 불렀다. 평소라면 병원에서 듣기 힘든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예전엔 병원 냄새도 싫었는데…. 더 울컥합니다.” 오는 6일은 서울 중앙대병원, 13일 의정부성모병원, 22일 서울 은평성모병원에서 올해 마무리 공연이 예정돼 있다. 마지막은 아니다. 새해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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