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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탄개발 책임자 이경서박사 인터뷰카테고리 없음 2024. 2. 12. 07:55
1969년 7월 ‘닉슨 독트린’이 나온 직후 “나라의 명운(命運)이 걸린 문제라며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즉각 유도탄(誘導彈) 개발에 착수하라!”고 밀명(密命)을 내렸다.
국산 무기라고는 소총(小銃) 한 자루도 못 만드는 나라에서, 무슨 수로 유도탄을 만들수있는가? 그러나 이 불가능한 일을 수년간의 불철주야(不撤晝夜) 분투를 통해 가능으로 바꿔낸 사람들이 있다. 이 중 한 명이 유도탄 개발의 총책임자 이경서(李景瑞·85) 박사다.
인테넷으로 이경서 박사를 검색하여 올려놓는다. 유도탄 개발의 아버지 이경서 박사의 인터뷰내용이다.
- 박정희 대통령이 유도탄을 꼭 만들어야 한다고 단호히 명령한 배경은 뭡니까.
“그 당시에 상호주의 원칙, 비례폭격 비례대응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북이 도발해서 소총 한 발 쏘면 우리도 소총 한 발만 쏜다는 원칙이죠. 예를 들어, 저쪽에서 포 한 발 쏘면 우리도 포 똑같은 것으로 한 발 쏜다는 1대 1 개념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소련제 프로그(Frog)라는 사정거리(射程距離) 70km인 로켓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로켓을 휴전선 인근에서 쏘면 서울에 떨어질 수 있었죠. 박 대통령은 대응 수단이 꼭 필요하다고 본 듯합니다.”
- 북한이 서울을 향해 쏘면 우리도 평양을 향해 쏜다는 개념이군요.
“그렇습니다. ‘서울이 맞으면 평양을 때린다’가 상호주의에 의한 비례대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비행기를 보낼 수는 없죠. 그건 에스컬레이션(Escalation), 즉 상황 확대니까 그건 안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도 로켓, 즉 유도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겁니다.”
- 사거리를 200km로 늘려 잡은 이유는 뭡니까.
“서울에서 평양까지가 약 170km거든요. 대통령이 원한 미사일은 바로 이 용도로 유사시 직접 평양을 때릴 수 있는 지대지(地對地) 유도탄이었습니다.”
- 당시는 소총 한 자루도 제대로 못 만들던 시절인데, 아무리 대통령 지시라고 해도 단기간에 개발이 가능했나요?
“불가능했지만, 국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 포기할 수는 없었죠. 보고서를 낼 때 ‘국가적으로 달려들면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꼬박 6년이 걸렸지만 결국은 해냈습니다.”
지금은 대한민국이 세계 유수의 방위산업 선진국이지만, 시작은 미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방위산업 육성이 자주국방(自主國防)의 첫걸음이자 긴급히 필요한 사업이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세워 무기 생산 연구를 지시했다. 당시 북한은 탱크까지 자체 생산하던 수준이었다.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이상, 무기 생산에 관한 남북 격차를 하루라도 빨리, 무조건 줄여야 했다.
‘번개사업’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제일 먼저 한 과제가 ‘번개사업’입니다. 3개월 안에 기관총, 소총 등 시제품(試製品)을 만들어보라고 지시했죠. 역설계(逆設計)를 하든, 카피하든 일단 비슷하게 만들어라. 단, 생산시설을 새로 만들지 말고 현재 국내의 인력과 장비를 활용하라. 성능이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겉은 비슷한 소총과 기관총 시제품을 3개월 안에 만들어냈습니다.”
- 3개월 가지고 될 일입니까.
“불가능하죠. 하지만 당시는 대통령뿐 아니라 일반 국민, 과학자 모두 국가 위기를 피부로 느끼고 있을 때였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손 놓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어요. 박 대통령께서 당시 우리 기술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봅니다.”
기관총 부품은 1/10,000mm 수준의 정밀도를 가져야 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1/100mm 정밀도 부품도 생산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장난감(?) 수준의 모조품 무기였지만, 시연회(試演會)가 끝나자 자신감이 생겼다. 크고 작은 사고는 있었지만, 어쨌거나 총알은 발사되었다. 표적도 비슷하게 맞히는 데 성공했다. 제대로 된 무기를 양산(量産)하는 수준까지 가려면 갈 길이 멀었지만, 노력하면 우리 능력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그 한계의 경계가 늘어난 것이었다.
“번개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미국의 협조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기술지원단이 와서 도와주기 시작했어요. 기술 도면 등 자료도 주고, 그래서 우리나라 무기 제조 기술이 갑자기 확 올라갔습니다.”
미국은 한국의 무기 개발 계획이 이 수준에서 멈추길 바랐을 터이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국익(國益)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는 지도자였다. 번개사업 직후, 장거리 유도탄을 개발할 능력이 있는지 검토해서 보고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내려왔다. 다들 번개사업에 정신이 없을 때였다. 그래서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ADD로 막 옮겨온 이경서 박사에게 ‘책임지고 보고서 만드는’ 역할이 주어졌다.
“유도탄 만들 수 있느냐고 하는데 ‘만들 수 없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KIST에 있는 교수 두 분한테 연락을 했죠. 조그만 여관방 하나 빌려서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나라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을 늘 의식하며 살아”
이경서 박사는 MIT에서 석·박사를 하고 미국 BBN사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던 중 국가의 부름을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해외 과학자 유치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 월남(越南)은 언제 한 겁니까.
“해방된 다음 해 1946년에 했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혼자서 월남하셨고, 나머지 가족이 부친의 연락을 받고 38선을 걸어서 넘었습니다.”
1·4 후퇴 때 대구와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부산에서 ‘천막학교’에 다니다 바뀐 제도에 따라 제1차 국가시험을 봤고, 경기중학교에 합격했다. 경기중고에서 각별히 친했던 동기동창으로는 훗날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내는 정근모(鄭根模)가 있다.
- 고교 졸업 후 서울 공대로 진학했는데, 공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저희 집안 분들이 대부분 상과(商科)를 나오셨습니다. 아버님도, 형도, 큰아버님도 사촌들도 대부분 금융계로 가셨어요. 저는 다른 길을 가고 싶어서 기계과를 선택했습니다.”
이경서는 대학 2학년을 마치고 유학길에 오른다. MIT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했으니 상당한 인정을 받은 셈이다. MIT는 학문적 혼종교배(混種交配)를 지향해 자교(自校) 출신 석·박사 진학률을 20% 내외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억지로 좇아갔는데 운이 좋았죠. 4학년 때 지도교수께서 실험을 시켰는데, 제가 이론적 해결책이 떠올라서 혼자 도서관에서 자료 찾고 공부해 정해진 일정을 확 앞당겨 마무리했습니다. 제 이름으로 논문을 내자고 하시기에 교수님을 주요 저자로 하고, 저를 제1저자로 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기계공학의 제일 권위 있는 저널에 논문이 실렸고, 그분 덕분에 대학원에 들어가게 됐죠.”
미국 생활을 같이 했던 인사로는 친구 정근모 외에 배수훈 전 대우전자 사장, 이태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 등이 있다.
결혼은 미국에서 했다. 교회에서 만난 유학생 아가씨다. 유학생 하나가 약혼을 하자, 처녀 총각들 마음에 불이 붙어 수많은 커플이 결혼에 이르렀다. MIT에서 박사를 마치고, 3년 동안 연구소에서 일했다. 하버드대, MIT 교수들이 공동으로 세운 연구소였다. 귀국 제의를 받고 미련 없이 짐을 쌌다. 1969년, 도미(渡美) 10년 만이었다. 군말 없이 뜻에 따라준 아내에게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늘이 도와서 성공한 프로젝트’
귀국 후 첫 프로젝트는 ‘기계공업 육성 방향’ 수립. 우리나라 여건에 맞는 리더 인더스트리(leader industry) 딱 하나만 중점 육성해야 한다는 안(案)을 마련했다. 산업 기반이 총체적으로 부실한 상황에서 여러 산업을 동시에 육성한다는 것은 욕심이 지나쳐 성과를 내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당시 기계공업 육성 방향은 첫째, 국산 무기 개발, 둘째 중후장대(重厚長大)한 산업을 만들어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자는 것이었다. 이 국가적 프로젝트에 매달려 있는데 갑자기 국내외 안보 상황이 급변한 사정은 전술(前述)한 바와 같다. 이제는 유도탄 개발에 일생을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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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내고 한 달쯤 있다가 상세한 계획서를 내라고 지시를 받았습니다. ‘유도탄 개발 계획’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 ‘항공공업’이라는 위장 명칭을 썼죠. 아파트 하나 빌려서 군(軍)에 계신 박사분들 몇 분하고 3개월 동안 작업했습니다.
대통령이 사인하자 일 처리에 탄력이 붙었다. 연구비가 나오고, 대전에 유도탄연구소도 만들었다. 미국에서 어느 정도 눈감아준 면도 있다.
- ‘200km 사정거리 유도탄을 개발한다’, 이것이 말은 간단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첩첩산중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사실 아이디어도 없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운이 좋아서, 하늘이 도와서 성공한 프로젝트입니다. 저희 기술이 좋아서 성공한 것이 아니에요.”
- 그때 낸 아이디어 가운데 하나가 ‘나이키 미사일 개조 프로젝트’였다고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보다는 우리 상황과 여건을 살피고 시작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잖아요. 사정거리 200km 유도탄을 개발한다 하면 미국이 주목할 것이고, 우리 군(軍)이 보유한 나이키 미사일을 유지·보수하는 것처럼 하면 감시망이 헐거워질 거라 생각했죠. 또한 나이키는 당시 미국에서 거의 퇴역(退役)한 상태였어요. 우리가 나이키 관련 정보를 달라는 명분도 확실했습니다. 나이키는 지대공(地對空) 유도탄이지만, 지대지로서도 한 140km는 날아갑니다. 이걸 개조하면 사정거리 200km 유도탄이 충분히 나오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美, 유도탄은 용인, 核은 不容”
- 미사일 사거리에 미국이 자꾸 제한을 두고 뭐 여기까지는 해도 되고 이거는 안 되고 뭐 이렇게 제동을 거는 이유는 뭡니까.
“군비증강(軍備增强)을 원하지 않는 거지요. 남북이 서로 경쟁하면 군사적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커지니까요. 또 우리 무기 성능이 좋아지면, 미국은 한국이 자기들의 바운더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 혹시 비거리(飛距離)를 늘려주면 우리 미사일이 핵탄두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봐서 그런 거는 아닐까요.
“당시 미국의 기본 정책은 노 에스컬레이션(No Escalation)이었어요. 지금은 우리가 700km까지 사정거리를 늘렸지만, 여러 과정을 거쳐서 늘어난 겁니다. 한 번에 쉽게 된 것이 아니에요.”
- 그렇다면 한국의 핵 개발은 실제로 추진이 됐습니까.
“저는 그렇게 봅니다. 하지만 제가 조금 아는 바에 의하면, 그때 프랑스에서 재처리시설 들여오는 프로젝트가 실패한 후에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없었어요. 처음엔 박정희 대통령의 궁극적인 목표는 핵 개발이었죠. 하지만 중간에 하도 미국이 감시하고 견제하니까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겁니다. ‘원자탄 제조 기술이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온다’ ‘간단한 실험장비로도 얼마든지 제조 가능하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핵무기는 국가적 노력이 투입되어야 만들 수 있습니다. 미국은 프랑스가 우리나라에 재처리시설을 팔았을 때 생기는 이익을 물어주면서까지 한국의 핵 개발을 막았습니다.”
- 미사일과 핵에 대한 미국의 대응 수준 자체가 달랐다, 그런 말씀이시네요.
“그렇죠. 재래식 유도탄 개발은 어느 정도 인정한 겁니다.”
처음부터 고체 연료 개발
- 미사일 개발 당시 가장 어려웠던 기술적 난제(難題)는 뭐였습니까.
“유도탄은 추진기관과 유도장치가 제일 기본적입니다. 자동차로 비유하면 추진기관은 엔진이고 유도장치는 조종(操縱)입니다. 목표물을 정확하게 타격하는 장치죠.”
- 그 두 가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사실 막연했어요. 하지만 ‘선진국 기술이 뭐 하늘에서 떨어진 건 아니지 않으냐, 이건 우리로서는 꼭 해야 하는 일이다’ 하는 막무가내 정신과 사명감으로 밀고 나갔습니다.”
1차적인 문제는 추진체였다. 우리에겐 기술이 전혀 없으니, 외국에서 도입하는 길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추진제는 액체와 고체가 있는데, 액체는 비교적 쉬워요. 고체는 어렵죠. 가루로 만드는 거니까. 북한도 최근에서야 고체 추진체를 씁니다. 그 전에는 전부 액체를 썼어요. 액체는 쉽지만 안정성이 떨어집니다. 안정성뿐만 아니라 군 장비로서의 효율도 떨어지죠. 왜 그런가? 액체 추진체는 발사하기 24시간 전에 충전(充塡)해야 한다든지,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다음에 24시간 지난 후에나 쏠 수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 그래서 우리 유도탄은 처음부터 어려운 줄 알면서도 고체로 간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액체 연료는 처음부터 생각도 안 했어요.”
기술 팔 곳을 찾아 사방으로 돌아다니는데 다행히 프랑스에서 기술을 팔겠다는 연락이 왔다.
- 미국 회사들은 연락이 없었습니까.
“팔려면 팔 수도 있는데, 미 국무부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미국 회사들은 ‘얼마든지 팔겠다’고 그러는데 국무부에서는 절대 불가라고 했죠. 프랑스 회사는 미국과 상관없이 기술을 팔겠다고 했는데, 여전히 문제가 있었습니다.”
- 뭡니까.
“추진체 재료들을 섞는 거대한 믹서가 있어요. 여러 가지 물질을 아주 균질하게 섞어주는 정밀 기계입니다. 사정거리 200km용 추진체를 만들려면 크기가 300갤런 정도 되는 믹서가 필요하죠. 프랑스에서 파는 건 50갤런 정도였어요.”
- 50갤런짜리를 여섯 번 돌리면 안 됩니까.
“그건 최후의 도박인데, 성공률이 떨어집니다. 균일성(均一性)이 미세하게 떨어져도 실패 확률은 확 올라갑니다. 유도탄은 한 번 발사에 막대한 비용이 들고, 실패는 폭발로도 이어져 큰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 적은 용량 믹서를 여러 번 돌린다고 될 일이 아니네요.
“그렇지요. 추진체는 금속 재료들을 아주 균질하게 섞어서 만듭니다. 많은 양을, 정말 분가루 같은 것을 잘 섞어야 하는 거죠. 조그만 것은 쉬운데 용량이 크면 클수록 굉장히 더 어려워집니다. 그걸 다 정말 골고루 섞어야 하니까. 그게 사실 제일 어려운 노하우인데 미국에선 그걸 못 주겠다는 거였죠.”
이 러한 어려운 문제도 기적적으로 해결했다. 폐기 직전의 공장설비를 시세의 10분의 1 가격으로 사 올 수 있었다. 도저히 방법이 없으니 일단 프랑스에서 50갤런짜리 믹서를 들여오고 나중에 우리가 개발하든지 그때 가서 해결하자고 생각했다. 위험하더라도 대안이 없었다. 50갤런짜리 믹서 계약을 하러 프랑스로 한 팀이 출장을 떠났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저는 미국에 다른 일로 출장 중이었어요. 비행장에서 추진체 원료를 취급하는 회사 사장을 만났죠. 원료 구입이 목적이었는데, 이분이 눈이 번쩍 뜨이는 얘기를 하더군요.”
- 뭐였나요.
“추진제를 만드는 회사가 수요가 없어 공장을 몇 년째 놀리고 있다. 그래서 설비를 처분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경기가 나빠서 급하게 팔려고 하니, 잘하면 싸게 살 수도 있다고 해요. 비행장에서 바로 공장으로 찾아갔습니다. 가서 그 회사 부사장을 만났는데, 공장엔 사람 하나 없고 그냥 시설만 있었어요. 완전히 버려둔 지 2년 정도 지났다고 하더군요. 얼마에 팔겠냐고 하니까 200만 달러면 오케이래요. 국무부 허가 얘기도 했더니 그건 자기들이 해결하겠다고 했어요. 그거, 제대로 사려면 2000만 달러 주고도 못 사는 겁니다.”
- 횡재하셨네요.
“그렇지요. 바로 프랑스로 전화해서 계약하는 거 조금 미루라고 하고 프랑스로 갔습니다. 미국에서 설비 들여오게 된 이야기는 안 하고, ‘1단계, 2단계, 3단계로 나눠서 계약하자’고 했죠. 처음에 5갤런짜리 믹서로 추진제 만드는 기술 배우고, 다음에 50갤런짜리로 기술 전수하고, 뭐 이렇게 몇 단계로 나눠서 계약했습니다.”
- 이 기술도 상당히 싸게 도입하신 거네요.
“그렇죠. 쌍방 중에 한쪽만 거부해도 단계별 계약을 자동 해지(解止)하는 것으로 서류를 만들었으니까요. 프랑스에서 우리 핵심 인력이 기술을 배우는 동안 다른 팀은 미국에 가서 낡은 공장을 통으로 뜯어왔습니다. 5개월 걸렸어요. 300갤런짜리 믹서기를 들여오고 설치하던 날의 그 감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 공장 설비를 들여오는 데도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그쪽에서 기술을 안 주려고 그랬는데, 우리 팀들이 가서 싸우다시피 매뉴얼 등을 다 들고 왔습니다. 대통령이 현장 점검을 나와 300갤런 믹서기 앞에서 딱 멈춰 섰다. ‘이거 돌려 봐!’ 믹서가 제대로 돌아가는 걸 본 대통령은 흡족한 얼굴을 하며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