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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김구선생은 평생 조국의 독립과 자주 평화 통일에 모두 바친 민족의 지도자이며 겨레의 큰 스승이다.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에서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교육을 받았으며 1893년 동학에 입도하였고 1894년 팔봉접주(八峰接主)로 임명되었다. 황해도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했다. 동학농민운동 후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안태훈의 집에 머물면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에게 유학을 배웠으며 만주지역을 시찰하다 의병활동에 가담했다.
1896년에 치하포에서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일본 육군중위 시치다를 처단하고 체포되어 인천 감리서에 투옥되었다. 선생은 옥중에서 신서적을 읽고 개화사상을 키웠으며 탈옥후 승려생활을 하기도 했다. 1899년 환속한후에는 황해도 각지에 학교설립하는등 신교육운동에 노력했다. 또한 1906년 을사조약무효투쟁을 버리는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임시정부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을 역임하면서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도 임시정부를 지키며 활성화에 진력했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1932년의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일으켜 내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선생은일제의 추격을 피해 피신생활을 하면서 한인청년들을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시켜 군사훈련을 받게 하는등 다가올 독립전쟁에 대비했다. 1940년 중칭에 정착한 선생은 임시정부 주석으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군사활동을 전개했으며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이루었고 연합국으로부터 전후한국의 독립을 보장받는 등 항일운동의 최선봉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1945년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선생은 모스코바 3국 외상회의에서 결정된 미국과 쏘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했고 민족 스스로 통일 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하며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1948년에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 소위원회의 결의에 반대하며 남북간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의했고 평양에서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 단체 대표자 체 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이후 선생은 민족통일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다가 1949년 6월 26일 통일운동을 저해하려던 친일. 반통일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김구선생 연보
1876년 7월 11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基洞)(현재 백성군 운산면 오담리 파산동)에서
김순영(金淳永)의 외아들로 태어남. 아명은 창암(昌嚴) .
1880년 집안이 강령(康翎) 삼거리로 이사함.
1884년 조부상(祖父喪)을 당함. 국문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 함.
1887년 집에 서당을 만들고 이 생원(李生員)을 초빙하여 한문공부를함.
1889년 통감(通鑑), (사략(史略)) 등의 병서를 읽음.
1890년 학골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당시(唐詩)” “대학(大學), 과문(科文)”등을 배움
1892년 과거에 웅시했다가 낙방하고 매관매직의 타락한 과거에 실망함.
그 후 풍수와 관상 공부 등을 했고, 병서 (兵書)를 탐독함.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창수(昌洙)라 개명함.
1893년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崔時亨) 대수주를 만남
1894년 팔봉접주(八峰接主)로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 을공략했으나 실패함.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 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했고, 그의 아들 소년 안중근(安重根)을 만남.
당시에 명망이 높은 해서(海西) 거유(巨備) 고능선(高能善)의 지도를 받음.
압록강을 건너가 김이언(金利彦)이 지휘하는 의병대에참가함.
1896년 2월,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군사 간첩 토전양량(土田壞亮)을 죽여 국모의 원한을 풂.
5월 2일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인천 감영에 투옥됨.
감옥에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 (世界地誌)” 등을 읽고 신학문에눈뜸.
1897년 7월에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명으로 사형직전에 특사령이 내려짐.
1898년 3월 9일 밤 탈옥, 전국을 방랑하다가 공주 마곡사의 중이 됨.
1899년 환속(還俗)하여 고향에 돌아옴.
1900년 김두래(金斗來)란 이름으로 변명(變名)하고 다시 방랑길에 오름.
1902년 장연 친척집에서 여옥(如玉)이라는 처녀와 약혼함.
1903년 여옥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기독교에 입교함.
안창호(安昌浩)의 영애 신호(信浩)와 약혼했으나 또 파혼됨.
1904년 신천 사평동 최준례(崔遺禮)와 결혼함.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준, 이동령등과 함께 구국운동에 앞장
1906년 해서 교육회 총감이 되어 학교 설립을 적극 추진함.
1907년 장녀 화경 (化敬) 출생함.
1908년 신민회를 통하여 구국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안악에 양산학교 (陽山學校)를 세움.
1909년 전국의 강습소를 순회하였고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의 교장이 됨 .
10월 안중근 의사 사건에 연좌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됨.
1910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신민회 비밀 회의에 참석함.
1911년 1월 5일 사내총독(寺內總督)을 암살하려 했다는 안명근(安明根) 사건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언도 받음.
1913년 옥중에서 이름을 구(九), 호를 백범(白凡)이라 함.
1914년 감형으로 7년의 형기를 끝내고 7월에 가출옥함.
1916년 출옥 후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東山坪) 농장 관리인으로 있으면서 농촌 계몽운동에 힘씀.
1917년 장남 인(仁) 출생함.
1919년 3 ·1 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이 됨.
1922년 차남 신(信)이 상해에서 태어남.
1923년 임시정부 내무국장에 취임함.
1924년 1월 1일 상해에서 부인 최준례 여사 폐렴으로 세상을 떠남.
1926년 12월 임시정부의 원수인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함.
1927년 헌법을 개정하여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쳐 국무위원에 취임함.
1928년 자서전 《백범일지》 상권의 집필을 시작함.
3월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함.
1929년 5월 자서전 《백범일지》 탈고함. 재중(在中) 거류민단장을 겸임함.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그 단장이 되어 독립 투사를 양성함.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일황(日皇) 저격에 실패함.
4월 25일 윤봉길 의사로 하여금 홍구(紅口)공원에서 폭탄을 던지게함.
1933년 윤 의사 의거 후 신변이 위험해지자 강소성 가홍(嘉興)으로 피신.
가흥에서 주애보라는 여 사공에게 몸을 의탁함.
중국의 장개석 장군을 만나 친교를 맺고,
낙양 군관학교를 광복군 무관 양성소로 할것을결정함.
1934년 다시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함.
1935년 11월 가흥에서 임시의정원 비상회의를 열어 기구를 강화함.
1936년 이동녕 등의 동지들과 한국국민당을 창당함.
1937년 임시정부를 진강(鎭江)에서 장사(長沙)로 옮김.
1938년 민족주의 3당 통합 문제를 논의하던 남목청 (南木廳) 에서
조선혁명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아 1개월 동안 입원가료함.
1940년 장사가 위험해지자 광주(廣州)로 갔다가 장개석 주석의 도움으로
다시 중경(重慶)으로 감. 다시 임시 수석에 취임함.
5월 혁명 투쟁 각 단체를 통합 한국독립당에 집중케 하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함. 군사특파단을 섬 서성 서안(俠西省 西安)에 상주케 하여
무장부대편성에 노력함.
1941년 12월 9일 임시정부가 일본에 선전 포고함.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 정부 사이에 광복군에 대한 정식 협정이 체결공포됨.
광복군은 중국 각지에서 연합군과 공동 작전에 진력하게됨.
1944년 2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주석으로 재선됨.
섬서성서안과 안휘성 부양(安徵省 뿔陽)에 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고
미국의 원조로 본토 상륙을 위한 군사 기술 훈련을 적극 추진 지휘함.
1945년 2월 임시정부는 일본군과 독일에 정식으로 선전 포고함.
장남 인(仁) 호흡기병으로 세상을 떠남.
11월 2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개인 자격으로 환국함.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의 결정을 보고 12월 28일 이후
반탁(反託) 국민운동을 적극 추진 함.
1946년 2월 비심L국무회의가조직되어 그총리에 취임함.
인천, 마곡사 등 전국을 순회.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3명의 의사의 유골을효창공원에 봉안함.
1947년 1월 비싱국민회의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어 그 부주 석에 취임함
1947년 1월 비싱 국민회의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어 그 부주석으로 취임함
2차 미 · 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반탁 투쟁위원회의 활동을 이승만과 함께 추진함.
11월유엔 감시하의 남북 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 결의안 을 지지함.
그의 정치 이념을 표현한 〈나의 소원〉을 발표함
1948년 2월 2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位告)함〉을 발표 함.
4월 19일 남북 협상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에 감.
5 ·10 선거 후에는 건국실천원양성소에 힘을 기울임.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함.
7월 5일 거족적인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영면함.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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