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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기념관 답사사진및 여행 2024. 4. 21. 18:59
2017년 안중근 아카데미 강좌를 수료하고 안중근 홍보대사로 있긴 하지만 항상 좀더 잘했으면 후회가 따른다. 안중근 아카데미 강좌에는 안중근 의거 사적지 답사가 포함되어 있다. 2017년 에 가보고 싶었는데 개인사정으로 못갔다.
안중근의사 사적지 답사를 못한것이 아쉬웠고 인생 8학년을 살고 있어 잘못하면 안중근 의사 사적지 답사가 어려울 것 같아 이번에 신청하여 금년수강생들과 같이 참석하였다.
집사람도 같이 가자고 권했더니 참석하겠다고 하여 동행참석했다. 인생팔학년을 살고보니 가끔은 최고령자라는 딱지가 붙을 때가 많아 후한 대접에 고맙기도 하지만 젊은 친구들에게 부담을 주는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다.
이번 4월 17일부터 20일까지 3박 4일동안 우천예보가 있긴 했지만 다행이 맑은 날씨로 잘넘어갔고 국내에 도착하니 그때서야 비가 오니 천국에 계신 안중근의사님이 봐주신것 같았다.
여행 안내는 우리말을 잘아는 현지인들이 안내했고 안중근의사 의거 해설은 중국 할빈대학 김월배 교수님께서 하여주셨다. 그 교수님은 자타가 인정하는 안중근의사에 대해서는 전문가 교수이시고 안중근의사에 대한 책도 많이 출판하셨다.
이번행사를 차질없이 성공적으로 주관한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또한 해설을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해주신 김월배 교수님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2024년 4월 21일
이번 여행 답사 순서와 정보는 안내서에 있던 내용을 정리했다.
가 . 뤼순 (1) 러 • 일전쟁의 격전지 203고지
203고지는 중국 랴오닝 성 다렌시, 뤼순커우구에 서쪽에 있는 해발 203M 에 해당되는 작은 산이다.
러일전쟁 당시I 1904년-1905년의 뤼순항 포위 때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부동항을 원하던 러시아가 뤼순만이 내려다보이는 해발 203m고지에 천혜의 요새를 구축하고 일본의 공격에 대응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호시탐탐 대륙의 진출을 노리던 일본은 러시아를 물리치고 뤼순을 점령하는 것이 급선무었다.
마침내 1904년 2월 8일 일본 해군은 뤼순항올 기습공격하고 러시아 함대를 항구 안에 고립시킨 다음 육군대장 노기마레스케가 이끄는 일본군 제3군으로 뤼순 공략에 나섰다 치밀하게 무장한 러시아군 앞에서 일본군은 러시아 참호에 4개월간 1만 1 천빌의 포탄을 퍼부으며 재래식 전술에 의존한 무모한 돌격전을 되풀이 했고, 그 결과 사상자 약 7만8천여명(사망자 1만 7천명)에 이르는 큰 피해 끝에 고지를 함락했다 일본 기록에 의하면, 러시아 군(전투인원 4만 5천, 사상자 1만 8천여명, 사망자 2-3천명), 일본군(전투원 10만여명, 사상사 6만 212명, 사망자 1만 5천 4백여명), 비록 전쟁에서 이겼으나 자신의 두 아들을 비롯해 수많은 희생자를 낸 것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메이지 왕에게 자결 허락을 구하던 노기 대장은 일왕 장례식 날 부인과 함께 목숨을 끊었다 203 고지 정상 뒷편 노기 마레스케는 이곳에서 아들을 잃고, 이산 이름의 중국 발음으로 이령산(’그대의 명혼이 깃든 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2) 뤼순 감옥(관동도독부 감옥)
안중근 의사가 의거 이후 1910년 3월 26일 순국하기 까지 약 5개월 간 수감되었던 곳이다. 1898년 러시아가 뤼순을 조차지하고, 뤼순지역에 러시아 부대가 주둔하였다. 1902년 러시아 군인 범죄자를 투옥하기 위한, 위수감옥으로 설치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뤼순을 점령하게 된 후 일본이 점령, 1907년에 확장하였다. 주로 중국인, 조선인(한국인), 러시아인 등이 수감되어 있었고, 1906-1936년 사이 수감자는 연간 약 2만여 명에 달했으며 수감자가 늘어남에 따라 1916년부터, 대큐모 확장공사가 있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와 중국의 항일지사를 체포화여 수감한 뒤 온갖 고문올 가했다. 1942년에서 1945년 사이에 약 700여 명의 수감자가 이곳에서 처형당했다고 하며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신체호도 이곳에 수감되었다가 옥사하였다.
(3) 뤼순감옥 국제항일열사기념관
2008년 뤼순감옥내,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그리고 뤼순감옥에 수감된 국제인물들이 소개되었다. 뤼순감옥에 16명의 한국인 독립운동가 수감되었다. 그중 박희광, 채셰윤, 이필현, 유상근, 최흥식, 그리고 미국인 죄수들이 소개되어 있다.
(4) 관동주법원구지터(안중근의사 재판장소)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건물은 1906년에 일본이 건축하였으며, 1927년부터 고등법원으로도 사용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뤼순에 군정서와 이듬해 민정서를 두고 일본 육해군형법, 국가형법을 빌려와 관내 주민들에게 대한 재판권을 행사 하였다. 관동주 지방법원은 일본의 대표적인 식민통치 기관으로 안중근, 신채호 등 한인 애국지사들도 재판을 받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주살한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7일부터 공판이 시작되어 2월 14일 6차 공판이라는 초고속 재판으로 사형판결을 내렸다. 당시 이 재판을 두고 영국의 ’더 그래팍’지는 ’세기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월계관을 거머쥔 채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 라고 보도하였다.
나. 하얼빈
(1 ) 하얼빈 지역의 독립운동
하얼번역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주살한 곳이다. 동청 철도와 남만주 철도가 만나는 곳이다. 러시아의 북만주 지배 거점도시로 건설된 계획 도시였다 또 20세기 전반 러시아 . 영국 . 미국 . 일본 등 제국주의 얼강의 각축전이 펼쳐진 무대이기도 하였다.
하얼빈은 안충근 하얼빈 의거를 제외하면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지로 크게 부상하지 못하였으나 1931년 이른바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한인 이주가 급증하었다. 이지역의 항일 활동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 주로 한반도 충남부 지역 출신 한인들이 대거 북만주로 이주하면서 하얼빈 부근의 취원창 지역에서 활발한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남자현, 김동삼등의 독립운동가 활동화였다 하얼번에는 안중근 하얼빈 의거지(하얼빈역), 거주지역(김성백의 집), 각오다짐 지역(조린공원), 수감지역화원소학교), 조도선 동지 합류(동흥학교/ 도리 중심 소학교), 제 1차 거사장소(차이자고우역/하얼빈역 84km) 등이 있다.
(2) 하얼빈역
하얼빈역 플랫폼-이토히로부미 사건 발생지 이다. 다시말해 이등박문을 주살한 곳이다. 하얼빈 의거는 개인 차원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풍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작전지역내에 들어온 적장을 처단한 것으로 동양평화의 파괴자에 대항하여 인간의 자유를 지키려는 정의의 옹징이었다. 또한 한국침략을 획책하고 평화를 파괴화는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고 규탄함으로써 민족독립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대한국인의 의지를 셰계에 알렸다. 2014년 1월 19일, 화얼빈역 귀빈실을 개조화여 안중근의사기념관이 개관되었다.
(3) 731부대 옛터
731부대는 일제가 세운 생물학전 연구기관 충 하나였으며 일본 관동군 산하의 생체 실험 부대였다. 세균, 독 가스등을 생성했다. 부대장이름을 따 ’이시이 부대’라고 한다. 인체를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는 부대의 속성상 부대 주변 지역을 전부 소개(해체) 하고 지역 주민을 전부 추방시킨 사례나, 부대 인근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생물학 무기를 실험한 사례 등 인근 민간인돌을 대상으로 실험한 사례도 알려져 있다 . 2015년 광복70주년을 맞이화여, 중국에서는 731부대를 대량 으로 확장증설하였다. 현재 철도 궤도, 보일러 공급시설, 독가스실, 마루타 수감 장소,쥐 배양실, 동상 실험실 등은 그대로 남아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731부대에는 한국인 6명도 순국 사실이 밝혀졌다. 731부대원은 미국에 실험자료 제공을 랫가로 죄를 감경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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