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이승만 대통령의 혜안: 박정희 대통령을 위기에서 두 번 구함.
    낙서장 2024. 6. 9. 18:22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오늘에 이르가 까지는 여러 지도자들이 있긴하지만 그중에서도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경제 부흥의 박정희 대통령을 꼽을 수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실로 비참하고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극적으로 등장했다. 36년간 우리민족을 깅압 통치해던 일본이 서계대전에서 패망 하면서 우리 대한민국은 조국 광복을 맞이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재탄생했지만곧 이어 터진 6·25전쟁으로 국민들은 고통과 폐허 속으로 내몰렸다. 전쟁이 중단된 이후로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로 인해 4·19혁명이 일어난후  정치의 무질서와 사회혼란은 극에 달해 있었다.

     

    이에 젊은 시절의 박정희 대통령은 전란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가난과 고통 속에 신음하는 국민과 조국의 상황을 목도하고,  죽음을 불사한 굳은 결의와 각오를 다진다. 마침내 1961516일 자신의 굳은 결의를 실행에 옮긴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구국충정과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부정부패의 잔재를 과감하게 일소하고 경제 부흥에 모든 국력을 쏟았다. 이는 최빈국이었던 우리나라를 선진국의 반열에 올려 놓는 근본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행한 새 마을 운동으로 국민들에게 자조, 자립, 협동 정신을 일깨워 우리나라 경제 부홍의 초석을 닦았다.

     

    극단적인 빈곤과 갈등으로 점철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 의 정책은 변회를 가져왔다. 강한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아무런 기초도 없었던 중화학공업을 비롯한 자동차 철강 조선 등의 기간산업 구축에 과감히 도전했고 잠시 교직에 있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 쇄신과 인재양성 등 교육에 지속적인 투자를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판단과 도전 그리고 적극적인 투자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세계적인 반열 에 우묵 선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이런 것을 성공적으로 이룬 이면에는 다음에 소개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혜안이 크게 기여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사형에서 사면

    194843일 여수반란이 일어났다. 여수반란사건은 제주도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국군 9연대가 투입되었다. 그안에는 좌익분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니 진압이 잘될리없었고 진압이  잘안되자 정부는 14연대출동시켰다. 그  14연대가 여수항에서 제주로 떠나려고 할 때 대기중인 장교와 부사관들이 여수반란을 일으켰다. 194810월 여순반란사건을 정부는 진압부대를 출동시켜 진압했다.

     

    정부는 그때 여순반란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남노당 군사총책을 맡았던 박정희 소령을 194811월 체포 했다.  박정희 소령은 일본육사 57기를 3등으로, 만주군관학교 1등으로 그리고 해방후 육사 2기를 2등으로 졸업했을 정도로 군사천재였다.

     

    재판때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고 재판정에서는 무기징역을 언도했다. 박정희 소령은 수사총책입자인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대령에게 살려달라고 간청하였고 백선엽대령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백선엽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박정희의 군사천재임을 강조하면서 사면을 요구했고 이대통령은 전향한다는 물적 증거를 가져오면 사면해주겠다고 했다,  그말을 전해들은  박정희는 곧 바로 남노당군사 조직도를 작성  제출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사형사면을 받았고,  박정희의 폭로로 군내의 좌익분자 색출 수사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두 번째  눈사태로 발생한  중대한   책임  면책

    박정희 준장이 1955년 보병 5사단장에 임명된후 19561월 눈사태가 발생했다.그당시 5사단은 강원도 양구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의 화기중대벙커 내무반이 눈 사대로 무너저 60명중 59명이 압사 발생했다.

     

    정일권 참모총장은 그책임을 물어 박정희 준장의 전역서를 가지고 이승만 대통령께 재가를 받기위해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이사고가 인재인가? 천재인가물었을 때 천재같다고 대답하자 군사적 천재를 어떻게 천재를 책임지라 하며 전역서를 반려하고 육군대학으로 발령했다.  박정희는 육군대학에서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후 6군단 부군단장으로 갔가 7사단장으로 근무한후 소장으로 진급심사할 때 광영주의 심한 반대에도 승진을 재가했다 소장 진급후에 6군구 사령관으로 근무했고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2군부사령관으로 임명된후 1961516일 군사혁명을 계획하여 성공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나라 건국대통령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과  정치적 외교력 으로 우리나라 자유대한민국을 세우는 초석을만들었고  박정희 대통령을  사형과  전역의  위기에서 건져    박대통령이 경제와 안보를 성취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을있게 한 대통령이라 생각한다.

     

     

    '낙서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불어 사는 세상  (0) 2024.06.17
    박정희 대통령 치적  (0) 2024.06.16
    소년 안중근 의사  (0) 2024.06.09
    서대문 안산 둘레길 산책  (1) 2024.06.08
    제 69회 현충일 추념식  (1) 2024.06.07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