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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흙 속 연꽃… '비빔 인간'들의 시대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4. 10. 14. 04:35
     
    넷플릭스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요리사 에드워드 리가 지난 7일 서울 마포구 호텔 나루 서울 엠갤러리에서 열린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나는 비빔 인간입니다. 내가 한국 사람인가? 미국 사람인가? 정체성에 대해 많이 고민했어요.”

    장안의 화제인 넷플릭스의 요리 서바이벌 예능 ‘흑백요리사’에서 에드워드 리가 한 말이다. 우승은 못 했지만 주인공 같았던 이씨의 한마디에 한국계 미국인들이 겪은 주변인의 고충이 녹아있다. 한때 한국 문화를 의도적으로 회피했다던 이씨지만 “100% 한국인, 100% 미국인 둘 다 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고 한다.

     

    이달 말 워싱턴DC에 새로운 한식 레스토랑을 연다는 그가 최근 이렇게 말했다. “어려서는 미국인이 더 되고 싶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한국인 정체성에 가까워졌다. 이번 도전을 통해 나는 균(kyun·한국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미국 사회에서 한국계의 약진이 눈부시다. 물론 주류 편입에 한국인 딱지가 별 도움이 안 된다고 믿는 이도 여전히 많다. 올해 3월 기밀 유출·불법 보관 혐의를 받은 조 바이든 대통령을 불기소하며 “기억력이 나쁜 노인”으로 묘사해 정국을 강타한 로버트 허 전 특검이 대표적이다. 그가 현직에 있을 때부터 대형 로펌으로 이직한 최근까지 인터뷰를 하려고 갖은 공을 들였지만 매번 대리인을 통한 거절 또는 차가운 침묵만이 돌아왔다. 허 전 특검은 청문회에 출석해 “한국이 내 뿌리”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공화당원이자 잘나가는 워싱턴 주류 법조인인 그에게 한국인 정체성이 지나치게 부각되는 건 득보다 실이 더 큰일일지도 모른다.

     

    이 대척점에 이민진 작가 같은 이가 있다. 일곱 살 때 가족과 뉴욕으로 건너간 이 작가는 명문대에 진학했지만 거기서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겪었다고 한다. 그래도 자기 뿌리를 숨기려 하지 않고 더 파고들었고, 30년에 걸쳐 작업실에 앉아 우리 현대사의 파란만장함이 담긴 장편소설 ‘파친코’를 써 내려갔다. 11월 뉴저지에서 상원 입성에 도전하는 앤디 김 하원의원은 허 전 특검과 이 작가 사이 그 어딘가에 있는 인물이다. 그가 먼저 한국에 관해 목소리를 높인 적은 드물지만, 한국에 대해 물으면 거침이 없었다. 김씨는 의사당에서 쓰레기를 줍고, 비틀거리는 상대 후보를 부축한 인간적 면모로 유권자들을 감동시켰다. 첫 한국계 연방 상원의원이 돼 120년 이민사에 새로운 한 페이지를 쓸 날이 임박했다.

     

    열심히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면서도 소수 인종에게 보이지 않는 벽을 치는 미국 사회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성공을 이뤘다. 어떤 방식이 옳고 그르냐는 논쟁은 여기에 낄 틈이 없다. 한 명 한 명이 마땅히 박수 받아야 할 자랑스러운 한국계일 뿐이다. 무엇보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억척스레 일했고, 그러는 가운데서도 자식의 길잡이 역할을 놓지 않은 위 세대의 고통과 희생이 있어 진흙에서 연꽃이 필 수 있었다. 그래서 아름다우면서도 애틋한 ‘비빔 인간’들의 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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