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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의 오물 치우면서도 믿었다, 내 안의 강인한 아름다움을"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4. 10. 26. 08:22
    1943년생 최순화씨는 노동자로, 주부로 살아오며 한국 사회를 지탱해온 주역이다. 75세에 꿈꾸던 직업을 처음 가졌고, 여든에 세계 최대 미인대회에 나갔다. 그가 1930년부터 80여년간 운영됐던 서울 옛 당인리 화력발전소 자리에 조성한 마포새빛문화숲에 선 모습.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키 170센티미터에 체중 51킬로그램. 핫팬츠와 하이힐 차림의 그가 셔츠 자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걸었다. 턱을 치켜들고 도발적인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다, 각도를 약간 틀어 포즈를 바꿨다. 서울 홍대 앞이 런웨이로 변했다.

    남녀노소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입을 딱 벌렸다. “미스코리아야, 모델이야?” “워매~ 너무 멋있다. 인생은 저렇게 살어야 돼.”

    백발 숏컷의 최순화(81)씨는 거침이 없었다. 여든 평생 사랑과 박수만 받은 것처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그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눈앞의 목표와 미래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어쩌면 늙는다는 건, 지난 일을 자꾸 되돌아보기 때문에, 이미 많이 겪어봤다는 착각 때문에 일어나는 일일지도 모른다.

     

    최씨는 7년 차 프로 패션모델이다. 올가을 목표는 지구 반대편 멕시코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미인 대회인 2024 미스 유니버스에 한국 대표로 서는 것이었다. 지난달 미스 유니버스 코리아를 뽑는 본선에 진출한 32명 안에 들었다. 멕시코행 티켓은 못 쥐었지만 ‘베스트 드레서(best dresser·옷을 가장 멋지게 입은 사람) 상’을 받았다.

    지난 9월30일 서울 강남에서 열린 2024 미스 유니버스 코리아 선발대회에서 최씨가 32명의 본선 진출자 중 '베스트 드레서' 상을 받는 모습. 손녀뻘 참가자들과 겨뤘다. /AP 연합뉴스

    한국 할머니의 美를 세계에

    그는 지구촌 통틀어 역대 최고령 참가자였다. 1952년 시작된 미스 유니버스는 28세 이상과 혼인·출산 경험자 출전 금지 규정을 72년 만인 올해 처음 없앴다. 각국 본선에 60~70대 여성이 나와 화제가 됐지만, 한국처럼 80대가 나온 나라는 없다. 세계 언론과 소셜미디어에서 최씨는 한국의 20대 우승자보다 주목받았다.

    -젊은 참가자들과 경쟁해 보니 어떻던가요?

    “경쟁하는 마음은 아니었어요. 팔십 할머니가 젊고 예쁜 애들을 어떻게 이겨요. 손주뻘 친구들이 ‘아, 대단한 할머니!’ ‘저도 이렇게 늙고 싶어요’ 하며 왕언니로 대해 줬어요. 내 삶에 이런 순간이 오다니, 벅차고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전 세계 언론이 ‘한국 81세 도전자’를 집중 보도했습니다.

    “아유, 다른 참가자들한테 미안할 정도죠. 저는 나이에 상관없이 꿈꾸고 도전하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미스 유니버스에 나갔어요. 그 목표를 초과 달성한 것 같아요.”

    81세 최순화씨의 미스 유니버스 도전은 세계적 화제가 됐다. 이달 초 영국 BBC가 '이분이 한국에서 제일 멋진 할머니일까? 미스 유니버스 심사위원은 그렇게 생각한다' 제하의 기사로 보도한 최씨 스토리. /BBC
     

    -베스트 드레서로 뽑혔지요.

    “드레스 심사에서 중고 웨딩 드레스를 받았어요. 낡고 품이 작아 의상 표현이 어렵더군요. 그래도 최대한 우아하게, 내 옷처럼 밀착해 보여줬어요. 그런 옷을 할머니가 입었다는 점에서 상을 준 게 아닐까요.”

    대회 당시 최씨가 포부를 밝히는 연설에서 기립 박수가 나왔다. “저는 건강한 80세 한국의 그랜드마더 최순화입니다. 일제 시대에 태어나 6·25를 겪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세대입니다. 한국 여성의 강인한 정신력과 정직한 도덕성은 가난한 대한민국을 부강한 나라로 새롭게 탄생시켰습니다. 이제 제가 세계에 한국 여성의 진정한 미를 전파하겠습니다” 하는 내용이었다.

    최순화씨가 미스 유니버스 코리아 선발대회에서 포부를 밝히는 모습. “한국 여성의 강인한 정신력과 정직한 도덕성은 가난한 대한민국을 부강한 나라로 새롭게 탄생시켰다”고 했다. 자신의 81년 인생을 압축한 이 연설에 기립 박수가 터졌다. /AP 연합뉴스
     

    -미인 대회에서 종전에는 들을 수 없던 연설이군요.

    “우리 세대는 너무 가난하고 힘들었어요. 절박하게 가정을 일구고 나라를 일으켰지요. 그런 이들이 젊었을 때 못 해본 일에 도전하며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할 때라고 봐요.”

    -젊은 시절 미인 대회에 나갔다면 어땠을까요?

    “젊을 땐 몸매가 좀 더 풍만했어요. 동네 여자들이 목욕탕에서 날 보곤 ‘미스코리아 나가보라’ 했죠. 그럴 형편도 안 됐지만, 얼굴에 자신이 없었어요. 내가 전통적 미인상은 아니거든. 그런데 갈수록 내 외모가 나아 보여요. 개성 시대잖아요. 또 나이가 들어 우아미를 갖추면 타고난 결점도 가릴 수 있지요.”

    -예전엔 아담하고 복스러워야 미인으로 쳤지요.

    “그 시절 여자치곤 키가 아주 컸어요. 성격도 활달했고요. 어른들이 ‘아이고 저 꺽다리, 머스마 같아 어쩌노’ 혀를 찼죠.”

    최순화씨가 이달 초 영국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젊은 시절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여성으로선 키가 커 '꺽다리, 머스마'로 불렸다고 한다. 그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선 "시대를 좀 잘못 타고 난 것 같다"고 웃으며 "나이 들어 우아미가 더해지니 지금의 내가 더 아름다운 같다"고 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건강과 미모의 비결은 단순함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퍼스트레이디 애너 엘리너 루스벨트는 “아름다운 젊음은 우연한 자연 현상이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 작품”이라고 했다. 아름다움도 경륜이라는 얘기다.

    -건강을 어떻게 유지합니까.

    “특별한 비결은 없어요. 아침엔 사과·당근·계란, 점심은 된장찌개나 순두부, 생선 등 한식을 먹죠. 저녁엔 닭 살코기와 야채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어요. 주 3회 40분씩 걷고 매일 스트레칭 합니다. 술·담배는 평생 해본 적 없어요. 커피는 아침에 한 잔만 마시고, 밀가루 음식은 안 먹습니다. 모델 하기 전엔 빵을 달고 살았는데 그것 때문에 나잇살이 찌더군요. 영양제도 딱히 안 먹어요.”

    -피부 관리는요?

    “토너, 로션, 영양크림, 비비 크림 4단계로 끝내요. 아무리 좋은 화장품도 많이 바르면 얼굴이 무거워지니까.”

    -미인 대회에 성형 미인이 많다던데요.

    “조금이라도 손대지 않은 사람 찾기 어려워요. 성형이 워낙 대중화됐으니, 그중에서 미인 대회 나오는 건 봐줘야죠.”

    -성형한 적 있습니까?

    “없어요. 옛날엔 쌍꺼풀 만들고 코 높였다가 사나운 인상으로 바뀌는 사람이 많았어요. (보톡스나 필러도요?) 한 번도 안 맞아봤어요. 여기 주름 안 보여요?”

    최씨가 미스 유니버스 출전 뒤 방송 인터뷰에 나가기 전 분장실에서 메이크업 받는 모습. 실제 화장품은 최소한으로 바른다고 한다. 60대 남성인 그의 매니저는 "최 선생님 화장대에 화장품이 나보다도 적더라"고 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옷 잘 입는 법은 뭔가요.

    “비싼 옷이 좋은 옷은 아니에요. 전 동대문이나 고속터미널에서 옷 사요. 여러 스타일을 입어보고 사진 찍어보면 나에게 어울리는 걸 찾을 수 있죠. 전체적으로 심플하되, 어느 포인트를 잡아 과감하고 패셔너블하게 연출해요. 야단스러운 건 금물이에요.”

    -아름다움은 타고나는 겁니까, 계발할 수 있습니까?

    “나이 들수록 후천적인 게 많다고 생각해요. 아름다움은 내면과 외면이 어우러져야 하거든. 속이 엉망진창이면 어떻게든 드러나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제일 중요해요. 남의 말 잘 들어주는 좋은 사람은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느끼지요.”

    우리 시대는 ‘미인박복’이었다

    최씨가 시니어 모델로 이름을 알린 건 75세다. 75세에 꽃을 피우기까지, 인생은 신산(辛酸)했다. 소녀 적부터 방직 공장 봉제사, 간호 보조원으로 일했다. 주부로 살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하고 홀로 남매를 키우며 억척스럽게 돈을 벌어야 했다. 50대부터는 20여 년 간병인으로 일했다.

    평생 가난과 고된 노동으로 단련된 이와 마주 앉아 아름다움을 논하기는 생경한 일이었다. 중간중간 말문이 막혔다. 그때마다 최씨는 먼지를 털어내듯 씩 웃었다. “다 지난 일”이라면서.

    -첫 직업이 뭐였습니까.

    “1943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어요. 공무원이던 아버지가 병에 걸려 7남매가 생활 전선에 나서야 했죠.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방직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12시간씩 2교대로 양털에서 실을 뽑는, 무척 힘든 일이었어요. 월급 1만원인 그곳에 취직하려면 뒷돈 5000원을 줘야 했고요. 1950~60년대는 그 정도로 나라가 가난하고 일자리가 부족했지요.”

    최씨의 20대 시절. 고교 중퇴 후 마산의 방직공작에서 일하다 정부의 파독 광부·간호사 양성 교육을 받았다. /최순화씨 제공

    -여성이 할 수 있는 일도 적었죠.

    “전 영화와 잡지에 나오는 외국 영화배우와 모델을 동경했고 예쁜 옷에 관심이 많았어요.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못 했지만…. 스무살에 상경해 간호 보조 일을 배워 한일병원 소아과에서 일했어요. 그러다 1970년대 파독 간호사와 보조원 1기생으로 뽑혀 정부 교육을 받았습니다. 서독 가면 최소 5년 근무해야 하는데, 연애하던 남자가 결혼하자고 졸라 포기했어요.”

    -결혼 생활은 어땠나요?

    “시집 가보니 남편이 한량이야. 나는 청소하고 요리하고 재봉질하고 아이들 키우는 것이 좋아서 열심히 했어요. 남편은 결국 딴 여자와 살림 차려 집을 나갔어요. 큰애 막 중학교 보냈을 때죠. 7~8년 별거하다 쉰 살에 이혼했어요.”

     

    -미인은 편하게 산다고 하지 않나요.

    “무슨! 우리 때는 ‘미인박복’이라고 했어요. 여자가 예쁘고 잘나면 눈이 높아져 남편한테 숙이고 살지 못한다는 거예요. 좀 못나야 겸손하게 가정에만 충실할 수 있고, 그게 여자의 행복이라고 믿었죠.”

    -그런 기성 세대를 보고 자란 여성들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기도 하지요.

    “저는 결혼은 꼭 하고 아이도 낳아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젠 여자라서 손해 보는 일 없어요. 그 나이에 오는 행복은 다 찾아 누려야죠.”

    -아이들을 어떻게 혼자 키웠습니까.

    “남편이 양육비를 주지 않아 교회 전도사 일을 했어요. 집집이 돌며 교회 다니라고 하는 건데 월급이 턱없이 적었어요. 버스비 350원인가 할 때라, 중·고등학교 다니는 애들에게 하루 용돈 1000원씩 줘야 했어요. 아침에 지갑 열어보면 200원, 500원밖에 없어요. ‘하나님, 내일은 꼭 2000원 들어 있게 해주소서’ 기도했어요. 신기하게도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수고한다고 몇 푼씩 쥐여줘요.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갈 수 있어 복이라 여겼지요.”

    최순화씨가 서울 홍대 앞의 한 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평생 가난과 고된 노동에 단련된 이와 아름다움을 논한다는 건 생경한 일이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삶의 밑바닥에서 꿈을 꾼다는 것

    -그러다 간병 일을 하게 됐나요?

    “아이들 대학 보내니 목돈이 필요했어요. 간호 보조원 해봤으니 간병도 하겠다 싶었지요. 쉰두 살, IMF 막 터졌을 때였죠. 일당 4만~5만원이었어요. 경찰병원에서 일하다 가정 입주 간병도 8년을 했어요.”

    -무척 고된 일로 압니다만.

    “종일 일으켰다 눕혔다, 대소변 받아내는 일이죠. 한밤에도 환자가 부스럭거리면 바로 일어나요. 제가 지금도 하루 4시간밖에 못 자요. 아픈 사람은 짜증을 내기 마련이죠. 보호자도 예민해지고요. 그때만 해도 간병인을 함부로 대했어요. 친지들은 창백한 저를 보고 ‘네가 병상에 올라가야 할 판이다’ 했어요.”

    -자존감을 지키기 힘들었을 텐데요.

    “간병인들 모이면 신세 한탄이 끝나질 않아요. 오물 치우는 나는 돈 받는 오물 취급을 받죠. 그때마다 ‘그래, 지금 난 오물이다, 오물 아래로 더 내려가 보자’ 생각해 버렸어요. 남들 시선으로 나를 보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짬짬이 책 읽으며 마음을 다스렸고요.”

    -그 일 몇 년 하셨습니까.

    “돈이 좀 모여 그만뒀다가, 69세에 간병을 다시 시작했어요. 큰 빚을 졌거든요. 입주 간병 했던 집 소개로 어떤 사람에게 1억2000만원을 빌려줬다가 그만…. 살던 빌라를 담보 잡고 적금·보험까지 깨서 만든 전 재산이었어요.”

    -투자한 건가요?

    “투자라기보다… 제가 사기꾼인 줄 모르고 속았죠. 이 핑계 저 핑계 돈을 안 갚더군요. 집안이 풍비박산 났어요. 아들 집에 얹혀살며 자식들 볼 면목이 없었어요. 다시 일하러 나갔죠.”

    최씨가 서울의 단골 맞춤복 집을 찾은 모습. 그는 "옷을 맞춰입기도 하고, 동대문이나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저렴한 옷도 산다"고 했다. 방직공장 봉제사 출신인 그는 요즘도 남는 시간엔 집에서 혼자 바느질을 한다고 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어떻게 모델 될 생각을 했습니까.

    “제가 71세 때, 허리 다친 여성 환자를 돌보게 됐어요. 유니폼 차림에 로션도 못 바르고 일하는 저를 어느 날 그분이 물끄러미 보더니, ‘모델 한번 해보세요’ 하는 거예요. ‘네? 저요? 이 나이에요?’ 했더니 ‘실버 모델이란 게 있대요’ 해요. 소싯적 꿈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니, 전기 통하듯 가슴이 찌릿했어요.”

    -망설이지는 않았나요?

    “아직 빚이 많으니 주저하게 되더군요. 남몰래 실버 모델 학원 알아보는 데만 몇 달 걸렸어요. 월 10만원짜리 학원을 주 1회 가게 됐는데, 그날 저를 대신해 일할 사람을 구하느라 또 한참 걸렸어요. 일주일에 하루만 돈 벌겠다는 간병인은 없으니까요.”

    -간병과 모델 준비를 병행한 겁니까.

    “4년을요. 24시간 일하며 환자가 잠든 새벽 1~2시쯤 병원 로비나 앞뜰에서 워킹 연습을 했어요. 소리 안 나는 운동화 신고.”

    -지치지 않던가요?

    “아뇨.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이 있다는 게 살아가는 힘이 됐어요. 밤낮 일하면서 학원 가는 수요일을 기다렸지요.”

    최순화씨가 2019년 시니어 모델 학원에서 워킹 연습을 하는 모습. 2018년 서울패션위크로 정식 데뷔한 그는 국내 시니어 모델의 지평을 넓힌 '1세대'로 불린다. /AFP 연합뉴스
     

    -남의 오물을 치우는 것과 화려한 무대에 서는 것, 극과 극이네요.

    “병원에선 모델 공부하는 게 비밀, 모델 학원에선 제 직업이 비밀이었죠. 실버 모델 지망생은 유복하게 전업주부로 지내다 취미 삼아 나온 분이 대부분이었어요. 차림도 고급스럽고, 나이도 50~60대로 저보다 어렸고요. 처음엔 주눅들었지만 표 안 내고 열심히 배웠습니다.”

    -자신감의 비결이라면요.

    “나는 긍정적인 사람입니다. 원망과 분노, 후회… 저보다 더한 사람 있을까요. 하지만 형편없는 처지였어도 마음 깊숙한 곳에선 내 안의 나를 믿었어요. 눈앞의 목표에만 집중했어요. 과거를 자꾸 곱씹는 건 안 좋은 습관이에요.”

    -현재에 집중한다는 게 말처럼 쉽나요.

    “안 해서 그렇지 한번 해보세요, 다 돼요.”

    81세 프로 모델 최순화씨는 네 시간에 걸친 인터뷰와 사진 촬영 내내 흐트러짐 없이 쾌활하게 응했다. 또 자신이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생각이 분명했다. 그는 “인스타그램도 직접 배워 국내외 팬들과 소통한다”고 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노인들이여, 주저앉지 말라

    한국은 저출산·고령화가 세계 최고 속도로 진행되는 나라다.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율이 20%에 육박해 초고령 사회에 진입했고, 이 숫자는 2050년 40%가 될 전망이다. 그런데 노인 삶의 질은 매우 낮다. 한국 노인의 빈곤율과 자살률은 OECD 선진국 중 압도적 1위다.

    -비슷한 연배의 주변 분들 삶은 어떤가요.

    “여기저기 아프고 기운 없고 찾아오는 사람 없어 쓸쓸해하죠. ‘이 나이에 뭘 하겠나’ ‘늙어 눈치 보이니 나서지 말아야지’ 위축되고요. 뭔가를 바꾸기도 시작하기도 두려워해요. 저도 나만의 일을 찾지 않았다면 그랬을 거예요.”

    -아프면 밖에 나가기 어렵지 않습니까.

    “아파서 사회생활 못 하는 게 아니라, 사회생활을 못해 아픈 거 아닐까요? 나가서 씩씩하게 뭐든 배워보고 활동하면 건강이 따라올 수 있어요.”

    -선진국에 비해 한국 노인은 행동 반경이 좁죠.

    “저도 복지관 가서 장구 배워본 적 있어요. 거기 노인들 자기 집 이야기만 하다 집에 가요. 별 의미가 없죠. 전 은퇴하면 (이전) 직업에 얽매이지 말고 직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매일 사람 만나 어울리고, 적은 액수라도 돈을 버는 곳 말예요.”

    81세인 최씨는 "남은 삶이 짧다면 짧지만, 현재에 집중하며 하던 일을 쭉 해나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홍대앞 카페 거리의 그라피티가 그려진 벽 앞에 선 모습.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노년의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자식과 손주에게 효도받는 게 노년의 행복이라고들 생각하죠. 하지만 진짜 행복은 내 일, 내 삶을 갖는 거예요. 자식 키우는 행복과 그 이후 내 행복은 달라요. 자식만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게 아니라, 부모도 자식한테서 독립해야 해요. 내가 나를 다스리며 용감하게 살아야 자식도 편안한 겁니다. 저는 모델이 된 뒤에도 2020년까지 주말마다 간병 일을 병행했어요. 자식에게 손 벌리지 않으려고요.”

    -재혼은 안 하셨고… 애인은요?

    “하하, 없어요. 한 번 해봤으면 됐지, 또 남자한테 기댈 필요 있나.”

    -2018년 75세에 서울패션위크로 데뷔해 6년간 각종 패션쇼에 서고 운동복·맥주 등 광고도 수십 편 찍으셨죠. 다시 젊어진 기분이 듭니까?

    “내 나이를 충분히 즐기는 느낌이 들어요. 제 롤모델은 (미국)카르멘 델로피체예요. 93세 세계 최고령 현역 모델. ‘진정한 아름다움엔 나이가 없다’고 하는 분이에요.”

    세계 최고령 현역 모델인 1931년생 카르멘 델로피체(미국). 최순화씨는 "12살 많은 델로피체를 롤모델 삼아 용기와 영감을 얻는다"고 했다. /인스타그램

    -앞으로 꿈은 뭔가요.

    “전 먹고살기 바빠 해외여행도 못 가봤어요. 모델 일로 일본에 한 번 초청받은 게 전부죠. 뉴욕·파리의 런웨이에 외국 모델들과 함께 서는 게 꿈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나선다면 한국에 대한 세계의 이해도 깊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까?

    “내 남매 여섯 중 다섯이 떠났어요. 남은 시간이 짧다면 짧죠. 그때가 언제 올지 모르지만 미리 움츠러들 거 있나요. 현재에 충실히 살아나가면 되지요.”

    -언제 가장 행복했습니까.

    “바로 지금! 지금의 내가 팔십 평생 가장 아름답고, 강하고, 행복해요.”

     

    2024년 10월 26일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시니어 모델 최순화 인터뷰_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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