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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목 따러" 왔다가... 목회자 되어 떠난 김신조스크랩된 좋은글들 2025. 4. 10. 14:57
1.21 청와대 습격 사건 김신조 별세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500미터까지 진격 적응에 어려움 겪다 목회자로 새 삶1968년 1월 22일 오후 7시, 서울 육군 방첩부대 회의실 테이블에 기관단총, 수류탄, 권총과 실탄이 더미로 쌓여 있었다. 검은 바지와 운동화, 회색 스웨터, 군용 작업복 상의를 입은 남자가 뒤로 손이 묶인 채 입장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잇달아 터지자 얼굴은 상기됐고, 눈동자는 연신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성명과 연령, 본적, 주소는?
“김신조, 이십칠셉니다.”
-이번 임무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가지를 떼고 수하 간부들을 총살하는 것입니다.”
일요일이었던 68년 1월 21일 밤 9시 30분, 청와대 직전 500m까지 진격한 대통령 암살조 김신조가 얼굴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암살자로 나타났다 목회자가 되어 제2의 인생을 산 김신조(개명 후 김재현) 서울성락교회 목사가 9일 새벽 별세했다. 83세.
1942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출생한 김신조는 55년 청진 청암초를 졸업한 후 기계 공장 선반공으로 일하다 61년 북한군 6사단에 입대했다. 67년 7월 정찰국 산하 대남 공작 특수부대인 124군부대로 편입, 소위가 된다. 124부대의 기지는 황해도 연산(延山). 북한 전역에서 뽑힌 전투력 좋은 군인 2400명으로 구성된 ‘죽음의 공작조’였다. 북한은 남한 전역에서 게릴라전을 일으키기 위해 치밀한 프로그램으로 요원을 키웠다. 30㎏ 군장을 메고 시속 10㎞ 이상으로 달릴 수 있도록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가혹한 훈련, 상호 감시와 사상 검증, 그리고 풍족한 식사. 사격, 지뢰 제거, 지도 읽기, 정찰법, 무선학, 권투와 유도 등 게릴라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르쳤다.
당시 김일성은 베트남 파병으로 우리 군 병력이 약화됐을 것이라 판단했고, 박정희 대통령도 그런 김일성의 속을 읽고 있었다. 당시 우리 군은 전국 군부대에 경계령을 내리고 북의 움직임을 주시했지만, ‘대통령 암살’ 시도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신조 등 31명은 1월 17일 심야에 휴전선을 넘은 후 문산, 구파발, 삼각산을 거쳐 나흘 만에 창의문(자하문) 근처에 도착했다. 불심검문에 걸려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31명 중 29명이 사살됐고, 도주자 1명과 생포자 1명이 있었다. 김신조는 22일 새벽 2시 25분, 인왕산 아래 세검정 계곡에 숨어 있다 투항했다. “자살하려고 했는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도망쳐 북으로 귀환한 박재경은 북 총정치국 부총국장까지 승진했고, 2000년 김대중 청와대를 방문해 송이버섯을 선물한 인물로 알려졌다. 이 사건으로 우리 군경 25명과 민간인 7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했다.
‘살아있는 증거’에도 북한은 언제나 그렇듯, 연관설을 부정했지만 ‘김신조 사건’은 한국의 반공 의식을 고취하는 계기가 됐다. 예비군 창설, 육군3사관학교 설립, 교련 과목 신설, 인왕산~청와대 앞길까지 민간인 통행 금지 등 보안 수위가 높아졌다.
귀순한 김신조는 1970년 3세 연하 최정화씨와 결혼하고, 정부 주선으로 건설회사에 취업했다. 하지만 적응은 쉽지 않았다. “사살된 동료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맴돌고, 72년 귀순 용사를 통해 북에 있는 부모 형제의 비보를 전해 듣고 나도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로 가슴이 찢어졌다”고 했다.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비의 자식’이라는 얘기를 듣는 것이 가슴 아파 이름을 ‘재현’으로 바꾸고 열 번 넘게 이사했지만, 소용 없었다고 했다. 회사도 관두고 술과 도박에 빠졌고, 자살 기도도 여러번 했다가 부인의 권유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1987년 당시 서울침례회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전국을 돌며 수천 번의 간증을 했고, 전도사를 거쳐 1997년 1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89년에 설립된 귀순용사선교회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2018년 본지 인터뷰에서 그는 “처음 남한에 왔을 때는 매일 데모하고 파업하니 나라가 망할 것 같았지만, 살면서 북한에서는 불가능한 ‘꿈을 선택할 자유(自由)’가 큰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고향 청진에 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꿈”이라던 그였지만, 통일에 대해서는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다. “다소 조급하고 환상적인 자세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합니다. 북한의 체제를 잘 아는 사람들은 통일이 얼마나 힘든 과제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유족은 부인과 1남 1녀. 빈소는 서울 영등포구 교원예움 서서울장례식장.
2025년 4월 10일 조선일보 박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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