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곱셈을 아는 지도자를 보고 싶다스크랩된 좋은글들 2025. 4. 18. 07:56
두 종류의 지도자가 있다고 한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지도자와 상대방의 똑똑함을 이끌어낼 줄 아는 지도자다. 스스로 잘난 지도자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해’라는 생각으로 모든 일에 관여하고 독점하며 상대방을 위축시킨다. 반면, 후자에 속하는 지도자는 상대방이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능력을 발휘하도록 격려한다. 글로벌 리더 150여 명을 탐구한 미국의 리더십 연구가 리즈 와이즈먼은 전자를 ‘디미니셔(Diminisher)’, 후자를 ‘멀티플라이어(Multiplier)’라고 명명했다. ‘디미니셔’는 글자 그대로 쪼그라뜨리는 사람, ‘멀티플라이어’는 ‘곱셈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곱셈의 승부사들은 사람들 재능을 자석처럼 끌어모으고, 그들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이 주변 사람들이 스스로 능력을 극대화하도록 이끈다. 곱셈의 지도자들은 지능을 무기처럼 휘두르지 않고 사람들의 재능을 끌어내는 도구로 사용한다. 이 때문에 성공적인 조직을 이끌기 위해 더 적합하며 절실히 필요한 유형의 리더다.
성공하는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남에게 부탁을 잘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부탁하는 순간, 그 일은 상대방의 일로 마술처럼 바뀐다. 부탁의 수사학에는 “너의 의견은 소중하다. 너와 맺은 관계는 중요하다. 나는 너와 계속 일하고 싶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질문도 전략적으로 잘 한다. 질문을 하면 상대방과 인간적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이라는 인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 안다고 생각하니 질문도 하지 않고, 혼자 결정하고 명령하는 지도자야말로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쪼그라뜨리는 최악의 주범이다.
곱셈형 지도자의 성공 철학은 동양에도 있다. 일찍이 중국의 진시황은 천하의 인재를 받아들여 천하 통일을 이룩한 사례로 꼽힌다. “진나라가 아무리 지리적 이점과 자원의 풍부함을 끼고 있어도 외부에서 인재와 물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작은 나라의 하나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재상 이사(李斯)의 상소를 받아들인 결과다. “태산이 흙을 골라 쌓았다면, 황하가 물을 가려 받았다면, 어떻게 웅장한 규모가 가능했겠나”라는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빼어난 이들이 서로 벗할 때 공동체는 번영한다. 인재 곱하기 인재의 승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다시 그 계절이 왔다. 정해진 시간표를 벗어나 예정에도 없던 대통령 선거를 한 달 반 앞둔 어수선한 계절이다. 각 당 후보들은 등록을 마치고 선거전에 들어갔다. 일찌감치 1인 체제를 구축한 민주당에서는 무늬만 경선에 3명이 이름을 올렸다. 대통령 탄핵과 파면으로 정신없는 구 여당에서는 11명이 등록했다가 8명으로 압축됐다. 대통령 권한대행도 출마 여부를 고심 중이라고 하고 무소속 후보도 나올 수 있다.
싫든 좋든 그중에서 차기 대통령을 선택해야 하는 유권자들은 피곤하다. 후보들의 “나만 할 수 있다”는 경쟁을 보고 들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떠오르지 않는 후보부터,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지 조마조마한 후보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그 누구도 마뜩잖은데 그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유권자도 극한 직업이 아닐 수 없다.
인물의 능력이나 됨됨이, 비전과 철학보다는 어떤 무리의 이해와 욕망이 우선하는 우리 정치는 언제부터인가 인재가 메말라 가는 척박한 땅이 된 지 오래다. 재능이 모이고 능력이 곱해지는 곳이 아니라, 있던 능력도 변질되고 박탈되며 서로 난도질해 인물 기근의 피폐한 영역으로 퇴행한 느낌이다. 사회 각 분야를 보면 그래도 우수한 인재들이 적절하게 포진해 있는 곳이 적지 않다. 그러나 나라 살림을 주무르고 제도와 법을 만드는 정치권만 따로 간다. 정년도 없고, 삼진아웃제도 없으며, 변변한 자격 요건은커녕 품위나 도덕성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선거철만 되면 마땅한 사람을 눈 비비고 찾아봐야 한다. 사람을 충원하고 생존하는 방식도 특이하고, 그나마 그 안에서 서로 헐뜯고 배척해서 남아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 후보 경선을 앞둔 요즘 소위 잠재적 후보들에게서 곱셈의 리더십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야당은 아예 셈의 대상이 생기지 않도록 일찍부터 한 사람으로 주변 정리를 마친 분위기다. 셈을 할 자유와 기회조차 변변하게 마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딱하다. 유권자 입장에서 재미없고 맥 빠진다.
반면 구 여당 후보들은 그나마 숫자가 많아 서로 승수 효과를 낼 수 있는 구조이긴 하다. 문제는 그럴 준비도 의향도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누구는 검사 출신이라 안 되고, 누구는 내부 총질을 해서 안 되고, 누구는 통진당을 닮아서 안 된다고들 한다. 그 안에서 탄핵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비난하며 서로 끌어내리는 건 공멸의 길이라는 걸 그들은 아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후보가 많이 나와도 한 명이라도 0으로 공격하면, 그 곱셈은 전체가 0이 된다. 1보다 작은 숫자나 마이너스를 곱하면, 후보군 전체가 마이너스가 되거나 심하게 쪼그라든다. 자기만의 셈법으로 전체를 망하게 하는 치명적 곱셈인 것이다.
곱셈의 리더십은 선거 이후 나라를 운영하는 데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 독선적 아마추어리즘으로 이끌기에 이미 우리나라는 너무 크고 복잡하다. 고도로 전문화한 인력이 각 분야에서 일하고 있으며, 우리가 처한 국제적 상황 또한 만만하지 않다. 어찌 됐건 우리는 다시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 천하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번에는 좀 상식적이며 곱셈을 아는 지도자가 나와 인재들이 풍성하게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고 우리 삶의 영역을 확장해 주었으면 좋겠다.
2025년 4월 18일 조선일보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스크랩된 좋은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文 관련 의혹들은 왜 죄다 법망을 피해가나 (0) 2025.04.19 이재명의 '보수 영토' 점령 작전 (1) 2025.04.19 하버드대와 길들여지지 않는 대학 (0) 2025.04.18 M16 대체한 K2 소총처럼… 인공지능 자주국방을 꿈꾼다 (1) 2025.04.16 러 결국 北에 미사일 제공, 그래도 '남의 나라' 일인가 (0) 2025.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