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쳐
    낙서장 2025. 5. 27. 21:33

     

    알베르트 슈바이처 Albert Schweitzer (1875.1.14.-1965.9.4.)는 독일출신으로 루터교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나 스트라스부르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파이프오르간 연주자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그럼에도 "서른 살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위해 살고, 이후부터는 인류 에 직접 봉사하는 삶을 살리라" 했던 결심을 실행, 다시 7년 간의학을 공부하여 마침내 적도 아프리카 가봉에 있는 랑바 레네로 떠나 선교 의사 활동을 펼쳤다.

     

    직접 병원을 운영하며 수많은 원주민의 생명을 구했고, 1차 세계 대전 중에는 포로수용소에서 억류 생활을 하면서도 의사로서의 사명을 다 해 많은 목숨을 구했다. 그는 인류에게 모든 살아 있는 생명 을 존중하는 '생명의 외경'이라는 윤리적 지표를 제시했으 며, 그 자신도 이를 실천하며 살았다. 그가 말하는 생명에 대한 경외""모든 생명은 소중하며, 나는 그것을 해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가 말한 '생명'은 사람뿐 아니라 동물, 식물,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포함해요. 단순히 생명을 '존중'하자는 게 아니라, 그 생명의 가치를 '경외(깊은 존경과 두려움)'로 느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벌래가집에 들어왔을 때 그냥 죽여 버리지 않고 가능한 한 죽이지 않고 박으로 내보내고 , 아픈 사람을 도울 때는 내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사람도 소중한 생명이니 도움을 줘야하고, 자연을 대할 때도 자연으로만 보지 말고 그자체로 존중받아야할 생명체로 봐야한다는 뜻이다.

     

    인류에게 바친 삶

    슈바이처가 살던 시대는 1, 2차 세계 대전으로 정신문화는 쇠퇴 하고 과학과 기술 문명이 크게 발달하면서 인류가 윤리적 빈곤기 를 맞이하고 있던 시기였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세계는 윤리적 지주를 잃은 채 물질문명의 질주에 이끌려 가고 있 었다. 슈바이처는 당시 사람들이 처한 정신적 위기에 심각한 우려를 느끼고 윤리 회복과 문화의 재건을 부르짖으며 이를 직접 시도 하고 실천한 인물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인간에게는 모든 생명이 신성하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지극히 하찮아 보이는 생명조차도 그에게는 신성한 외경의 대상이 된다. 그는 어쩔 수 없는 경우, 예를 들어 두 생명 가운데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다른 생명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경우를 빼고는 생명 사이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도 그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며, 어쩔 수 없이 희생된 생명에 대해 책임 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흑인들을 위해 새로운 수면병 치료제가 생긴 것에 감사했다. 그러나 현미경으로 수면병 균을 볼 때마다 그는 다른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이 생명을 죽여야 한다는 데 대해 가책을 느꼈다. 어느 날 그는 원주민들이 모래톱에서 잡은 어린 물수리를 그들 의 잔인한 손에서 구하기 위해 샀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그는 이놈 을 굶겨 죽일 것인지, 아니면 이놈을 살리기 위해 매일 작은 물고기 들을 몇 마리씩 죽여야 할 것인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는 물고기들을 죽이는 쪽을 택했지만, 매일 자신의 책임 아래서 하나의 생명을 위해 다른 생명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를 절실히 느꼈다.

     

    그처럼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아닌 한 그는 결코 생명을 죽이지 않았다. 언젠가 슈바이처가 병원 공사를 위해 땅을 파다가 개미집을 건드린 적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공사를 계속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개미집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개미들이 완전히 이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로소 다시 땅 을 파기 시작했다.

     

    슈바이처의 생명 외경은 인간이나 동물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한번은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가 큰 나뭇가지 사이에 막대기를 걸쳐서 흔들이 침대를 만든 일이 있었다. 슈바이처는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고 그 의사를 크게 꾸짖었다.

     

    "비록 나무가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얼마나 아프고 괴롭겠는가?" 이렇듯 슈바이처는 내가 나를 존중하는 것처럼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존중하기 위해 항상 자신을 채찍질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인간은 수많은 다른 생명의 희생 위에서만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생명 유지 이외의 욕심이나 오락을 위해 다른 생명을 괴롭히거나 해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생명에의 외경은 온 우주를 대상으로 하는 사랑의 윤리이다. 그리고 우주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사색을 통해 인간은 누구나 그와 같은 우주적 사랑에 도달할 수 있다.

     

    그는 항상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가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세상을 긍정하고 삶에 대한 의욕을 간직할 수 있었다. 생명에의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그런 의욕이다. 살려고 하는 의욕이 살려고 하는 다른 생명에 대해 외경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1,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사상 유래 없는 비극을 겪으면서 인류 의 미래에 대해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낀 세계는 슈바이처의 그와 같은 삶과 사상에 깊은 공감을 표했다. 1928년 괴테상이 수여된 것 을 시작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1951년에 그를 회원으로 추대 했으며, 1952년에는 스웨덴 한림원이 그에게 노벨 평화상을 헌정 했다.

     

    슈바이처는 노벨상 상금으로 나환자촌을 세웠다. 그리고 강연을 통해 세계 평화를 강조하고 원자력에 의한 세계 멸망의 위기에 대 해 인류가 이성을 가지고 대처해 나갈 것을 호소했다.

    1960년에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적도 아프리카의 가봉공화국 이 가봉 최고의 훈장인 적도성십자훈장을 수여함으로써 그가 흑인 에게 베푼 사랑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러는 사이 그에게 커다란 슬픔이 닥쳐왔다. 40년간 헌신적으로 그를 뒷바라지해 온 부인 헬렌이 1957년 일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슈바이처는 이 슬픔을 바쁜 병원 일과 저작 활동으 로 이겨 나갔다.

     

    그 무렵 랑바레네의 병원은 매일 수십 명의 백인 의사와 간호사 들이 수백 명의 환자를 돌보는 대규모의 병원으로 성장해 있었다. 슈바이처는 그 수많은 동료와 환자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나이를 잊은 채 진료에 몰두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프랑스에 있는 친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 자네가 다시 답장을 받기 전에 아마도 난 죽을 것 같네. 내가 죽었 다는 소식을 듣더라도 슬퍼하지 말게나. 난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불쌍한 사람들을 섬기는 사업에 60 여 년간 헌신할 수 있었고 오늘 아흔 살의 늙은 몸을 이끄는 이 순간 까지 그 일을 계속할 수 있으니 말일세. 하는 글을 적었다."

     

    그는 196594,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이룩해 놓은 랑바레 네의 병실에서 딸 레나가 연주하는 바흐의 파이프오르간 곡을 들 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세계는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어버이처럼 자애롭던 노의사를 잃은 가봉 국민들의 슬픔은 더욱 컸다. 그러나 슈바이처가 아프리 카에 뿌린 사랑의 씨앗은 그 뒤 수많은 사람의 가슴으로 전파되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으며, 그의 뜻을 잇고자 하는 수많은 의료인이 아프리카에서의 그의 사업에 지원했다.

     

    또한 '생명의 외경'이라는 그의 사상은 환경 파괴와 오염 문제 가 날로 심각해져 가고 있는 오늘날, 일찍부터 생명 존중과 자연 보호를 부르짖었던 선구적 사상으로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원시림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병원을 확장하는 것을 경계하고, 자연계의 하찮은 생물에게조차 무한한 동정심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었던 슈바이처의 정신은 오늘날의 인류가 본받아야 할 하나의 구체적인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지 금 이 시각에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인명 살상의 비극 속에서 모든 인류가 생명 존중의 마음과 이성의 힘으로 그러 한 비극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의 호소는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의 이력을 보면

    1875114일 독일(현재 프랑스 알자스 지역) 카이제르스베르크에서 출생

    1893 18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철학, 신학 공부 시작

    1899 24 철학 박사학위 취득

    1900 25 목사 안수 받음, 신학 교수 임용

    1905 30 아프리카 선교 소식을 듣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

    1905~1913 30 의학 공부 시작 의학 박사 취득

    1913 38 아내 헬레네와 함께 아프리카 가봉 랑바레네로 떠남, 첫 병원 설립

    1914~1918 39~43 1차 세계대전 독일 국적 때문에 프랑스령 가봉에서 억류됨

    1952 77 노벨 평화상 수상 생명에 대한 경외 사상으로 인정받음

    1953년 이후 78~ 반핵 운동, 세계 평화 호소

    196594 90 아프리카 가봉 랑바레네에서 생을 마침.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