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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명 대통령이 지운 박정희의 유산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5. 9. 10. 06:42

    물려받아야 할 유산인 '포용적 제도'는 지우고 물려받아선 안 될  '사법부 장악'은 되살리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금 나쁜 길을 가고 있다

     
    [서울=뉴시스] 조성우 기자 = 202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로빈슨 교수가 8월 25일 오후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대강당 김양현홀에서 '제도, 정치 그리고 경제성장'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2025.08.25. xconfind@newsis.com
     

    작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제임스 로빈슨 시카고대 교수는 한국에 빠져 있다. 한국 사람들에게 과거 경제 관료와의 만남을 자주 부탁한다고 한다.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공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그가 전공한 남미와 아프리카 국가의 제도를 주로 분석했다. 한국 사례는 상식 수준에서 간단히 서술했다. 그게 아쉬웠던 모양이다. 한국에 집중하는 후편을 준비하는 듯하다.

     

    로빈슨 교수와 공저자는 국가의 흥망을 제도의 관점에서 봤다. 누구에게나 성장의 동기를 제공하는 ‘포용적 제도’가 좋은 나라를, 성장의 동기를 박탈하는 ‘수탈적 제도’가 나쁜 나라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류가 상징하는 한국의 도약 역시 ‘포용적 제도’ 덕분이다. 이런 제도는 박정희 시대인 1960~70년대 토대가 마련됐다. 이것이 그의 시각이다. 하지만 로빈슨 교수는 몇 년 후 달라진 한국을, 다른 시각에서 연구해야 할지 모른다.

     

    한국의 경제 제도는 그 중심에 기업이 있다. 그는 저서에서 박 대통령에 대해 “권위주의였지만 기업을 우대하면서 성장의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제도를 설계하고 정착시켰다”고 했다. 얼마 전 본지 인터뷰의 설명에 따르면, “기업인 정주영을 중동 사막까지 이끈” 인센티브다. 한국 기업은 동기를 부여해 자본과 노동을 포용했다. 자본가는 부를 키웠다. 노동조합은 억눌렸지만, 수많은 노동자가 중산층으로 성장했다. 적지 않은 기업이 노동자에게 고등 교육을 제공했다. 심지어 자녀 교육까지 책임졌다.

     

    정부 조직도 기업을 위해 설계됐다. 산업 정책과 기업을 담당하는 상공부는 최고 인재가 모인 부서였다. 상공부 차관보가 장관과 차관, 경제수석을 뛰어넘고 대통령을 독대했다. 정치적 거래도 있었지만 은행은 기업을 위해 봉사했다. 한국은행 조사국조차 수출 산업 통계에 열을 올렸다. 청와대 뒷산에서 김신조 간첩단과 격전이 벌어진 다음 날에도 박 대통령은 경제인 90명을 불러 수출진흥확대회의를 2시간 동안 진행했다. 남미, 아프리카 행태에 익숙한 로빈슨 교수는 이런 이야기가 신기하게 들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옛날이야기다. 민주화 이후 기업과 노동, 자본의 관계는 역전됐다. 노조는 세계 최강의 전투 조직이 됐고 기업인은 배임죄와 상속세, 규제의 새장에 갇혔다.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이 되면 94개 규제가 생기고, 대기업이 되면 규제는 343개로 늘어난다고 한다. 그래도 지금까지 기업을 중심에 둔 포용적 제도의 근간까지 허물지 않았다. 노동쟁의에 대한 기업의 방어 수단을 보장하고, 대주주의 경영권 유지와 재투자를 위한 자본 축적에 관대한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재명 정부는 이 근간을 무너뜨리고 있다. 소위 ‘노란봉투법’ 통과 직후 한 기업인은 “나라의 중심이 기업에서 노조로 완전히 이동했다”고 했다. 기업의 손은 사슬로 묶고, 노조의 손엔 쇠망치를 들려줬다. 상법 개정으로 소액주주가 경영의 전면에 등장했다. 기업은 수많은 협력사 노조와 노동자, 주식 투자자와 싸우거나 타협해야 한다. 이제 에너지 정책조차 기업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정책의 잣대는 환경이다. 기후에너지부의 탄생은 박 대통령이 설계한 ‘기업을 위한 정부’가 ‘규제를 위한 정부’로 탈바꿈한 상징이 될 것이다.

    뉴시스 기뻐하는 민노총 24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에서 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노란봉투법)이 본회의를 통과하자 양경수(맨 앞줄 왼쪽에서 둘째) 민주노총 위원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뻐하고 있다. 민노총은 이날 성명을 내고 “오늘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면서 “더 큰 권리 확대를 위해 전진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포용적 제도를 강화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협력사와 비정규 노동자, 소액주주에게 새로운 동기와 유인을 제공할 수 있다고 한다. 탁상의 꿈이다. 이 변화가 기업의 인센티브를 박탈하는 가공할 파괴력을 정부는 무시한다. ‘기업이 떠나면 그때 법을 고치면 된다’는 식의 말을 정책실장이 한다. 현장에서 파업이 시작됐고, 기업인들은 경제 위기설을 말하고 있다. 변화한 제도는 기업에 수탈적이다. 소액주주와 노동자의 이익은 기업 이익을 바탕으로 한다. 이들의 이익도 지속될 수 없다. 따라서 변화한 제도는 모든 이들에게 ‘수탈적’으로 작동할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주변에서 낙관하는 소리도 들었다. “그는 실용주의자다. 나라에 손해날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86 운동권, 민노총에 큰 빚이 없다. 이념에도 포획되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어떤 자리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말은 합리적이었고 유연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해체해선 안 될 유산을 해체하고 있다. ‘포용적 제도’다. 그러면서 박정희 시대의 오점은 폭력적으로 복원하고 있다. 사법부 장악이다.

     

    대통령실은 높은 지지율이 모든 걸 정당화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나쁜 제도는 시차를 두고 반드시 보복한다. 이 대통령은 지금 나쁜 길을 가고 있다.

     

    2025년 9월 10일 조선일보 선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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