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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병기 갑'을 향한 욕망으로 멍드는 사회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6. 1. 16. 04:51

    甲의 악취와 乙의 분노로 나라가 어지럽다   갑 되면 항공권·숙박권·법인카드를 펑펑   자식들 진학·취업 쉽고 의혹은 무혐의 처분   오죽하면 '갑과 을 없는 사회' 포스터 등장  평생 갑이 되려 살았으니 갑질은 당연지사  건전한 상식 가진 시민이 그 세력 퇴출해야

     

    동사무소에 걸린 포스터 하나가 눈길을 붙들었다. “갑과 을이 없는 사회, 우리가 바라는 미래입니다.” 갑도 을도 없는 사회라니, 그런 사회가 있나? 존 레논의 ‘이매진’ 가사처럼 “천국도 지옥도 없고, 종교도 없으며,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 그런 곳을 ‘상상’해야 하나. 다른 기준 다 놔두고 하필 갑과 을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나누는 걸 마뜩잖게 여기며 다시 포스터를 훑으니 그 밑에 작은 글씨가 있다. ‘폭언·폭행·업무 방해 행위 등은 형법, 정보통신망법 등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오호, 그러니까 이곳 직원들에게 나이스하게 대하라는 뜻이군.

    일러스트=이철원
     

    그런데 때론 고객이 직원의 눈치를 살피며 비위를 맞춰야 할 때도 적지 않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가. 국회의원은 보좌관에게 갑질을 하지만, 보좌관은 또 피감기관에 갑질을 한다. 갑과 을은 이리저리 자리를 바꾸지만 불변인 건 갑과 을이라는 이분법이다. ‘갑’들의 횡포에 익숙한 우리 사회는 ‘을’의 보호막으로 그득하다. 안내 전화 연결 직전에 흘러나오는 “누군가의 소중한 자녀입니다(그러니 귀하게 대하라)”라는 말은 위 포스터의 목소리 버전이다. 각종 안내원이 ‘감정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보호받고, 위압을 경험한 누군가는 울분을 토하거나 횡포의 증거를 녹취로 남겨두었다가 후일을 도모한다. 을이 살기 힘든 사회, 갑은 살기 좋은 게 우리 사회다.

     

    미국 같은 양당제 국가에서 유권자가 지지 정당을 바꾸는 걸 ‘재편성(realignment)’이라고 부른다. 흔하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외부적 요인으로 지지 정당을 바꿀 때 부르는 말이다. 유권자가 아닌 정치인이 소속당을 바꾼다는 소식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정치인 중엔 소속 정당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다른 당을 쇼핑하듯 기웃거리는 사람이 많다. 소위 ‘가치 정당’이 아니기에 그렇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치를 뺀 자리에 무엇이 있을까. 이해 혹은 친소 관계, 권력욕 등 여러 요소를 거론할 수 있지만, 요즘 들어 비로소 한 단어로 정리가 된다. 그건 ‘갑을 향한 끊임없는 열망’이다. 우리 사회의 최종 병기는 결국 ‘갑’이기 때문이다.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전 원내대표가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열리는 윤리심판원 회의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갑·을 이분법 렌즈로 우리 사회를 보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많다. 줏대 없는 정치인이 왜 그렇게 많은지, 왜 그들은 손바닥 뒤집듯 말을 뒤집고 심한 언행 불일치를 보이는지, ‘자리’를 하나 준다면 영혼조차 팔아버릴 사람이 왜 그렇게 줄을 섰는지. 내 편·네 편으로 나뉜 정치 패널들은 왜 궤변을 일삼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를 사람들이 지향하는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그들에게 국가와 국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자리, 혹은 위치에 가면 출세고 성공이다. 높은 벼슬일수록 좋다. 그 자리는 모든 것을 누르고 이기는 ‘갑’이다.

     

    갑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최근 자주 거론된 두 정치인만 봐도 알 수 있다. 갑이 되면 원치 않아도 비행기표와 숙박권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자신의 비리를 고발하는 투서도 힘을 못 쓰게 만들 수 있고, 피의 사실이 있어도 경찰은 조사도 하지 않고 손쉽게 무혐의 처분을 받는다. 증거들은 스스로 사라지고, 아들들은 원하는 학교와 일터에 척척 들어가며, 부인은 법인카드를 맘대로 긁으며, 지역구 의원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사노비처럼 부릴 수 있다.

     

    그뿐인가.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지시하고, 맘에 안 들면 원색적으로 나무라고 고성과 막말을 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마음 약한 ‘감정 노동자’라면 정신과 약이라도 먹어야 하겠지만, 그건 그들 사정이다. 시세 차익이 40억에 이른다는 로또 아파트에 당첨된 청약 점수에 의혹이 있지만 국토부는 “청문회를 보고 조사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한다. 잠재적 ‘갑’을 지레 배려하는 모양새다. 그러고 보니 대통령도 당선되기 전 각종 의혹으로 범벅이었는데 대통령이 되고 나자 두더지처럼 모두 쏙 들어가 버렸다. 법과 제도가 갑 아래서 춤을 추고 본래 주어진 사명을 망각해 버린다. 이러니 갑이 최종 병기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혜훈 초대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가 지난 13일 오전 서울 중구 예금보험공사에 마련된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며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뉴스1
     

    평생 갑이 되려 살아왔으니 갑이 된 후의 갑질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 그들이 다양한 수법으로 재산을 축적하고, 가족의 편의를 도모하는 일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들을 부러워하며 비슷한 위치에 가기 위해 돈을 뿌리는 사람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갑으로 가는 길엔 공천 헌금 같은 통행세가 필요하다.

     

    미국이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자국 법정에 세우고, 이란에서는 시위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1만2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연초 세계는 정신없이 돌아가는데, 우리는 온 나라가 갑의 악취와 을의 분노로 어지럽다. 다수당은 소수당에 갑질하고, 당선자는 낙선자에게 갑질하며, 국회의원이 구의원에게 갑질한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양반·상놈 같은 봉건 시대 계급 질서가 혼재하고 있다. 오죽하면 ‘갑도 을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포스터가 관공서에 붙어 있겠는가. 처음에는 뜨악했지만, 지금 나라 사정에 딱 어울리는 포스터다.

     

    갑의 혁명과 환골탈태가 필요하다. 을이 녹음한 테이프나 울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통 시민의 건전한 상식에 의해 갑질을 일삼는 세력이 퇴출되고 그 자리에 염치와 도덕성, 공적 마인드를 갖춘 지도자들이 들어섰으면 좋겠다. 갑이 되는 데 관심 없는 사람들이 공복(公僕)이 되어 우리를 위해 일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갑질을 일삼는 사람들은 더 이상 높은 자리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검증 시스템이 작동되기를 바란다. 그들의 갑질이 우리 사회의 성공과 도덕적 기준으로 자리 잡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갑과 을이 없는 사회 우리가 바라는 미래입니다'라고 씌여 있는 포스터. 
     

    2026년 1월 16알 조선일보 사설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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