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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라가 우스운 사람들
    스크랩된 좋은글들 2026. 2. 20. 03:44

    트럼프 행동은 미국이란 테두리 안에 있고  새로운 법정 만들거나 대법관 늘리진 않아   한국은 3심제가 하루아침에 4심제로 둔갑
    대한민국이 초라하고 왜소하게 느껴진다   모름지기 국가는 '헌법 위에 지은 집'인데  그 집을 우습게 알고 흔드는 현실 서글퍼

     
    지난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32회 국회(임시회) 법제사법위원회 제2차 전체회의에서 추미애 위원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이날 법사위는 '4심제, 대법관 증원' 등에 대한 법안을 논의했다. /뉴스1
     

    전 세계를 광풍처럼 때린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이 미국 연방 대법원의 적법성 판정을 기다리고 있다. 의회의 승인 없이 국가 비상사태를 명분으로 내린 행정부의 명령이 유효한가를 법원이 판단하는 절차다. 맘껏 힘을 자랑하는 트럼프를 가리켜 뉴욕타임스는 “16세기 왕정주의가 부활한 것 같다”며 비판하지만 그조차 18세기 건국의 아버지들이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해 닦아놓은 삼권분립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번 대법원 사건은 1952년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쟁 당시 파업 중인 철강 회사들을 압류했다가 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받은 이래 행정 권력의 한계를 놓고 다투는 가장 큰 ‘권력 분점’ 사례라고 한다.

     

    대법원은 법적으로 따질 게 많다며 계속 선고 날짜를 미루고 있다.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저항 정신으로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은 헌법상 의회에 있는 조세 권한을 트럼프 행정부가 세금 성격의 관세에 대해 휘두르는 것이 과연 옳은가를 판단해야 한다. 트럼프도 일반적인 무역법이 아니라 전쟁이나 국가 비상사태에는 대통령에게 광범위한 경제 권한을 부여한 국제긴급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관세를 부과해 나름대로 법적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국제긴급경제권한법(IEEPA)에 근거해 부과한 상호관세에 대한 최종 결정을 이르면 조만간 발표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은 경기 평택항에 수출용 차량이 세워져 있는 모습. /뉴스1
     

    시장 예측 베팅 플랫폼 서비스인 폴리마켓은 대법원이 트럼프 관세의 손을 들어줄 확률을 27%로 예상하고 있다. 대법원 내에서도 비판적인 기류가 있다는 보도가 간간이 새어 나온다. 만약 위헌 판결이 내려지면 정부는 200조원이 넘는 관세를 기업들에 환급해야 한다. 중간선거에도 영향을 줄 것이고, 무엇보다 트럼프에게 모양 빠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위헌이 되더라도 관세가 즉각 철폐된다는 기대는 접는 것이 좋다. 트럼프도 의회 승인 기반 관세로 전환하는 플랜 B를 가동시킬 것이고, 또 지루한 법적 공방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관세 정책과 우리의 국익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눈에 띄는 건, 행정명령이 있고 그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이 따로 있으며, 법 조항을 적용하는 문제가 이슈가 될 뿐 권력 사이의 견제와 균형이 엄연한 국가의 모습이다. 행정부는 행정부대로 있는 힘껏 일을 벌이고, 의회는 의회대로 심의를 하며, 또 대법원은 다른 위치에서 숙려하고 판단한다. 대법원은 보수 6: 진보 3의 구조지만 아무도 결과를 예측하지 않는다. 예측이 어렵다는 게 핵심이다. ‘미국을 위대하게’라는 슬로건처럼 트럼프의 행동거지는 철저하게 미국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다. 국가의 원칙이나 헌법을 무시하거나 새로 고치려 하지 않는다. 억울하면 대법원에 호소할 뿐 그 위에 새로운 법정을 만들지 않고, 대법원 판사 숫자를 급격히 늘리지도 않는다. 그에게 미국은 우스운 나라가 아니다. 그는 자아가 비대하지만, 미국보다는 작다. 역설적이지만 트럼프는 국가의 룰을 준수함으로써 미국의 위대함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미국인은 나의 이런 관찰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코미디언들이 대통령을 대놓고 독재자라고 조롱하고 지식인들은 미국의 지도력 상실과 도덕적 향방을 우려하며, 미국에 어른거리는 폭정(tyranny)의 그림자를 경계하는 책도 출판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극동의 코리아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조금 공부한다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독재자’가 폭주해도 자신들에게는 여전히 ‘민주주의의 하늘’이 씌워져 있으며,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둘러싸여 전쟁의 위험도 없고, 사회주의가 준동해도 하루아침에 러시아나 중국처럼 될 위험은 없다는 사실에 새삼 눈뜨게 될지 모를 일이다.

    /일러스트=양진경
     

    교과서에서 배웠던 3심 제도가 법사위원장의 방망이 하나로 4심제로 둔갑하는 걸 보며, 나는 대한민국이 한없이 초라하고 왜소하게 느껴졌다. 사심(私心) 가득한 4심제가 국가의 기둥을 흔든다. 국가가 주는 돈과 권력을 휘두르며 법과 상식보다 자기 취향과 욕망을 앞세우는 정치인들을 보면 나라가 불쌍하다. 배보다 배꼽이 크듯, 그들의 편협하고 비대한 자아는 늘 대한민국보다 크다. 어렵게 이룬 민주국가에서 떡 먹듯 계엄을 선포한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작은 생선을 구울 때도 멋대로 뒤적이면 살이 다 부서지는데, 큰 국가를 운영하며 자기 젓가락이라고 마구 휘저었다. 대한민국이 꼭 그 생선 같다. 1000억을 모금해 새 나라를 세우고 국호도 바꾸겠다는 어떤 필부의 발언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한민국이 장난인가.

     

    용어조차 해괴한 ‘윤 어게인’을 외치는 사람들이 모두 윤석열 전 대통령 개인을 추종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윤 대통령에게는 그만한 개인적인 매력도, 정치에서 쌓은 희생과 내공도 없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이 동조한 건 종북 좌파 세력을 척결하고 위대한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계엄을 했다는 그의 레토릭이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이 바란 건 대한민국 체제의 유지 존속, 두려워한 건 남한이 북한이 되는 정도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런 그들의 속내를 헤아리지도 승화시키지도 못하고 한쪽에서는 ‘극우’ 프레임으로 몰아세우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당권에 이용하기에 급급하다. 정권이 힘을 얻으면 개헌을 해서 나라의 틀을 새로 짜려고 하고, 힘이 약한 정당은 선거 때마다 ‘개헌 저지선’을 걱정한다. 그러니 일개 필부도 나라를 우습게 안다.

     

    ‘문장입국(文章立國)’이라는 말처럼, 국가는 헌법 위에 지은 집인데, 대한민국이라는 집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흔들한다. 나라가 없으면 국민도 정치인도 없다. 그 집을 우습게 아는 사람들이 그 안에 살며 집을 흔드는 현실이 서글프다.

     

    2026년 2월 20일 조선일보 박성희 한국미래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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